참 쉽죠?
모두가 기다렸던 검술대회 대진표를 작성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학생회관의 대회의실은 일종의 원형 극장처럼 생겼는데, 가운데 연단을 중심으로 좌석이 둥그렇게 둘러싸듯 놓인 구조였다.
“모두 주목.”
그 연단 위에 올라선 것이 바로 ‘황태단’의 단장 울릭.
나와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했을 때만 해도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오늘 따라 활짝 펴 있었다.
“작년까지는 제비뽑기로 대진표를 작성했지만, 올해는 그 형식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역시.
리암과 앨빈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쓸 생각에 들떠 있는 것 같다.
울릭은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 뭐냐. 제비뽑기는 너무 운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새로이 생각해낸 방법이.”
울릭이 눈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황태단 부단장이 준비해온 것을 들고 연단 위에 올라섰다.
그의 손에는 아주 복잡하게 얽힌 노끈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 실뭉치를 제일 먼저 풀어내는 팀에게 부전승권을 주는 겁니다.”
갑작스러운 규칙 변경에 좌중에서 웅성임이 일었지만.
울릭이 한 손을 들자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당황스러운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비뽑기가 정말로 공정한 방식일까요?”
“···.”
도리어 의문을 제기하는 화법에 좌중이 조용해진 사이.
울릭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팀과는 달리 싸우지 않고 8강에 올라갈 수 있는 부전승권. 그것을 순전한 운만으로 내어준다? 저는 그보다는···.”
그의 손가락이 노끈뭉치를 가리켰다.
“우리 학생들의 지혜를 시험해서 결정하는 편이 훨씬 공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릭이 눈짓을 보내자, 부단장이 주춤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고사 중 ‘대륙제일왕’이라 불렸던 제왕 타소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그의 설명은 간략했다.
제왕 타소가 어느 지방에 갔는데, 그곳의 신전 기둥에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한 매듭이 묶여 있었고.
그 매듭을 풀어내는 자야말로 이 지방의 왕이 될 자라는 신탁이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왔다고 말이다.
“제왕 타소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 매듭을 풀어냈고, 결국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울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누가 부전승권을 가져갈지 결정해보는 것 어떻습니까!”
웅성웅성, 수군수군.
처음만 해도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호기심과 흥미가 동한 덕분인지 분위기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가 “뭐 나쁘지 않지!”라고 외친 것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급변했고.
결국 울릭이 주장한 방식으로 부전승 팀을 결정하기로 결론이 났다.
“저놈, 생각 외로 잘하네.”
내 혼잣말에 리암 또한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앨빈은 어쩐지 쑥스러운 반응이었는데.
“저 이야기를 사람들이 재밌어할 줄 몰랐네요.”
···고대신화 덕후인 자신이 전해준 이야기를, 울릭과 그 똘마니가 달달 외워서 사람들에게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어쨌거나 내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가운데, 울릭이 지원자를 받았다.
“한 팀당 제한시간은 3분으로 하지요. 먼저 도전하실 분 있습니까?”
대회의실에 자리한 인원은 대략 오륙십 명.
검술대회에 출전하는 세 명의 대표뿐 아니라 그 외 인원도 함께 참가한 듯했다.
다들 망설이던 가운데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명랑태평청년단의 칼 피거, 도전해보겠습니다!”
일명 ‘명태단’ 대표가 제일 먼저 나섰다.
단상 위에 놓인 노끈뭉치 앞에 서더니, 아예 그 앞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매듭풀기에 열중했다.
그러는 한편, 황태단 부단장은 회중시계를 들고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와, 엄청 열심히 푸는데?”
“이러면 뒤에 도전하는 게 이득 아니야? 쟤가 어느 정도 풀어놓으면···.”
“아냐, 그러다 누가 먼저 풀어버림 어떡해?”
다른 팀 대표들이 그것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앨빈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울릭 놈에겐 언제 나서라고 했어?’
‘세자르 님 말대로 일부러 맨 나중에 하라고 했어요.’
보아하니 울릭은 지적 논리에 약한지 앨빈의 있어 보이는 설명에 껌벅 넘어간 듯하다.
‘진정한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다.’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고다.’
그렇게 말했더니 울릭은 콧김을 내뿜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앨빈을 보았다.
“너 은근 말 잘한다?”
“아, 아뇨. 저야 세자르 님이 얘기하신 거에 살만 붙였을 뿐인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칭찬 받은 게 기분 좋은지 앨빈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다.
한편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매듭 풀기’에 도전했는데.
“어우, 왜 안 되는데!”
“인간적으로 이거 풀 수 있는 거 맞아? 어째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엉켜서···.”
“엄청 빡빡하게 묶여 있어서 아예 풀리지가 않는다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저 매듭은 내가 앨빈에게 친히 알려주어 황태단 부단장에게 전해진 방식이니까 말이다.
‘일명 보이스카우트 매듭.’
내가 다녔던 체대에서는 캠핑을 자주 갔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매듭으로 텐트를 고정’하는 거였다.
요령만 알면 쉽게 묶고 풀 수 있는 매듭이지만, 자연적으로는 여간해서 풀리지 않는 형태다.
결국 초반의 도전자들 서너 명이 다 나가떨어졌다.
그다음에 도전한 학생들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타소 왕처럼’ 매듭을 풀겠다며 달려들었지만.
“아냐, 이건 아무래도 아니야!”
하다 하다 노끈을 침으로 녹이겠다고 달려든 학생 하나를 황태단 부단장이 말리고 나서야 소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리암이 한마디했다.
“저건 인간적으로 좀 심한데.”
“그러게.”
그렇게 십여 명의 도전자들이 일제히 나가떨어졌을 즈음, 황태단 단장 울릭이 슬슬 나가려고 눈치를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다.’
손을 들고 일어나기 직전, 나는 리암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너 노래 좀 하냐?”
“···웬 뜬금없는 질문이야?”
“노래 잘하냐고.”
“뭐, 못 부르진 않는데.”
리암은 당황한 와중에도 페킹튼 가문에서는 연중 한 번씩 가족모임을 가지며, 거기서 자신은 매번 부모님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고 덧붙였다.
‘···그림처럼 단란한 가족이네.’
보아하니 리암 녀석은 뭘 시키든 절대 빼지 않는 성격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 일명 ‘우애단’의 단장 세자르. 매듭 풀기에 도전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서려던 울릭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내가 연단으로 걸어가자 부단장이 회중시계를 들어 보였다.
“지금부터 시간을 재겠습니다. 제한시간은 3분이며-”
“잠깐만.”
매듭 풀기에 나서기 전, 나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매듭을 푸는 동안 저기 있는 리암 페킹튼 군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삽시간에 제게로 향하자, 리암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내가 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리암 군이 속한 충성스러운 페킹튼 가문의 가훈은···.”
나는 리암의 반박을 무시하며 씩 웃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좌중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쯤 리암의 귀 끝이 빨개져 있겠지.
“여러분이 리암 군의 노래를 감상하실 동안 저는 매듭을 풀고 있겠습니다.”
내가 눈짓을 보내자, 부단장이 초를 재기 시작했다.
리암은 매우 민망한 기색이었지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세상 만물에 편재한 알레스시여, 우리에게 생명의 축복을 주옵시고···.”
알레스신을 칭송하는 기도송이 시작되자, 어쩐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니 근데 꼭 ‘기도송’이라서 숙연해진 것 같지는 않은데···.
리암은 아랑곳않고 자신의 노래에 열중했다.
“두 눈을 감고 겸손히 무릎 꿇사오니···.”
모두의 시선이 리암에게 쏠린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매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선이 쏠리면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지.’
그리고 부담을 느끼면 느낄수록, 얼마든 풀 수 있는 문제도 풀지 못하기 마련이고 말이다.
게다가 이건 맨손으로 풀기에는 너무 빡빡하게 묶여 있다.
‘손으로는 못 푸는 매듭이지만, 얼마 전에 받은 갈고리를 이용하면···.’
나는 갈고리의 구부러진 부분을 이용해 안쪽에 숨겨진 매듭을 하나둘씩 천천히 끌러나갔다.
그렇게 수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매듭이 다 풀렸다.
3분이 뭐야, 2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노끈은 이제 뭉치가 아닌 기다란 끈 형태로 되돌아온 터.
온통 조용한 가운데서 리암이 2절을 시작하려던 그때, 내가 손을 들었다.
“다 풀었습니다.”
“···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실내.
이윽고 결과물을 확인한 부단장이 외쳤다.
“진짜··· 풀었습니다!”
그 말을 기점으로 대회의실은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뭐?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풀어? 심지어 처음보다 더 엉켜 있었는데···.”
몇몇은 그 말을 믿지 못해 직접 연단 앞으로 달려나왔으나.
“헉, 진짜로 풀었어!”
“뭐야, 그럼 부전승권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지만, 나는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저건···.’
기이할 정도로 큰 키에 비쩍 마른 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실눈이 나를 집요하게 쫓고 있다.
···팰러스단의 모임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 얼굴이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카렌을 보며 아까 그 ‘실눈’을 슬쩍 가리켰다.
“저거 누군지 알아?”
축하의 말을 건네려던 카렌이 목소리를 죽였다.
“미친 개 타릭이잖아. ···설마 팰러스의 정예들이 검술대회에 참가할 줄은 몰랐는데.”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 팰러스는 이 검술대회에 관심조차 안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우승 특전이래 봤자 놈에겐 딱히 대단한 게 아니니까 말이다.
‘팰러스뿐 아니라 고위 귀족가 자제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지금 이곳에 있는 참가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 이들이 태반이다.
2/3 정도가 군사학부 소속이며, 평민이나 중하위귀족의 차남이 대부분.
‘근데 왜 이번엔 마음이 바뀐 거지.’
유일하게 짚이는 것은 며칠 전에 놈과 나눴던 대화.
내게서 어떠한 이용 가능성을 엿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팰러스는 제 아래로 들어오라고 내게 권했고.
나는 그것을 단칼에 거절했다.
혹시 그에 앙심이라도 품은 걸까.
‘···결국 이렇게 원작이 바뀌는 건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리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세자르.”
카렌이 고개를 쏙 들이밀더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암 네가 사람들 앞에서 진짜 노래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
“근데 너.”
카렌은 리암의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음치였구나?”
“···!”
“근데도 당당하게 노래하다니, 진짜 대단해. 나였다면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안 나왔을 텐데···.”
그녀가 뭐라 뭐라 말을 이었지만, 리암은 이미 들리지 않는 기색이었다.
‘너 음치’라는 팩폭에 깨나 충격받았는지 동공에 초점에 사라진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나··· 먼저 간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대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카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떡해. 나 혹시 또 못 할 말 한 거야? 설마··· 리암은 자기가 음치인 줄 몰랐던 건가?”
···이래서 아싸는 안 된다니까.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진실을 폭로해버린 카렌은 앨빈과 함께 급히 리암을 쫓아갔다.
저 앞에 선 울릭이 충격받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어, 어떻게 이런···.”
“어떡하죠, 단장님?”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됩니까?”
일부러 크게 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설마, 본인들이 새로운 규칙을 제시해놓고서 이제 와 말을 바꾸려는 건 아니겠죠?”
“···.”
“어쨌거나 저 매듭을 다 풀었으니,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건 저희 ‘우애단’입니다.”
나를 보는 얼굴들을 한 차례 돌아보며 덧붙였다.
“···부전승으로 올라갈 또 다른 팀은, 제비뽑기로 정하든가 주사위를 던지든가 알아서 하시죠.”
“잠, 잠깐만!”
울릭이 뭐라 말꼬리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무시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럼.”
이게 다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원래 울릭 놈에게 알려준 각본은 이거였지.’
복잡한 매듭을 칼로 단번에 두 동강 낸 알렉산더 대왕처럼, 울릭은 준비해둔 칼로 저 매듭을 잘라낼 예정이었다.
물론 앞서 열다섯 팀이 모두 달려들었다가 제 풀에 나가떨어진 다음, 영웅처럼 앞으로 나간 뒤.
‘풀리지 않으면 잘라내면 그만이지 않은가!’
-라는 대사를 위풍당당하게 던지며 싹둑! 썰어버리는 것이 그의 큰 그림이었지만···.
문제는 아무도 풀지 못할 것 같았던 매듭을, 내가 그냥 손으로 풀어버렸다는 거다.
‘물론 그냥 손 힘으로만 푼 건 아니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미리 넣어뒀던 갈고리의 금속 감촉이 느껴진다.
그 왜, 생활의 지혜처럼 각종 꿀팁을 모아놓는 사이트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클립을 활용해 엉킨 끈 풀기’다.
‘말하자면 여기 있는 이 갈고리를 활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
이 구부러진 끝을 매듭에 걸어서 당기면, 손 힘만으로 푸는 것보다 훨씬 쉽게 풀 수 있다 이 말씀.
‘참 쉽죠?’
다 쓴 갈고리를 바닥에 던져버리자 챙강,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는 가운데.
기다렸던 메시지가 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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