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를 역으로 이용하는 법
물론, 전후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겨우 이 갈고리 가지고 무얼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도전과제 중 이런 것이 있지 않았던가.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나요?
예전 같으면 나는 이 과제, 즉 ‘주변을 놀라게 할 일’이 언제 등장할지를 추측하고 그에 대비하려 했을 터다.
사방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몸을 사리며 ‘도전과제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법이 그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지.”
나는 ‘그림자 검객’이라는 이능자가 되었고.
‘그림자 보법’, 즉 최고의 공격 및 방어 수단이 되어줄 기술을 손에 넣었다.
그 말인 즉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여도 된다는 의미.
그런 상황에서 별 대단한 효능이 없는 ‘갈고리’를 보상으로 받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주어진 것을 활용하기보다는, 과제 해결을 위해 내가 먼저 나서서 사건을 벌여야 할 시점.’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그 길로 ‘우애단’ 놈들을 만나러 갔다.
“검술대회에 대비할 계획을 세워야 해.”
계획이래봤자 총 3명이 나갈 수 있는 검술대회에 누가 나가느냐가 전부였지만.
“일단 나와 리암은 확정이고.”
“내가 어쩌다.”
아무래도 ‘내가 어쩌다’는 한동안 리암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 같다.
“앨빈?”
“네, 넵!”
“너 검은 좀 다루냐?”
안경 소년, 아니 앨빈은 합죽이가 된 듯 입을 다물었다. ···저 반응만 봐도 알겠구만.
“그럼 카렌 넌?”
“단검 써도 돼?”
카렌이 예쁘게 웃으며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보였다.
‘아니, 그런 거 품에 넣고 등교하지 말라고···.’
앨빈은 그에 흠칫했고, 리암은 호기심이 동하는 눈빛이었다.
“···될 것 같아?”
내가 면박주듯 말하자 카렌이 쳇, 한다.
“카렌, 세검류는 전혀 못 다뤄?”
“전혀. 단검이면 한 번에 끝장낼 수 있는데. 나 실력 꽤 좋다?”
‘한 번에 끝장’이란 말에 또다시 흠칫하는 앨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그럼 죽잖아.”
“아, 맞다.”
카렌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순진하게 손뼉을 친다.
···얘도 진짜.
리암은 그런 카렌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학생들도 대부분 교양으로 검술을 익히는데, 검술이 아니라 단검술이라니 특이하군.”
리암 녀석 은근 날카롭단 말이지.
나는 창백하게 질린 앨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다, 앨빈. 네가 나가야겠어.”
“저, 저는 안 되는데···.”
“너무 걱정 마.”
씩 웃으며 리암과 눈을 마주쳤다.
“나랑 리암이 다 이겨버림 되니까.”
검술대회는 단체전인데 그 형식이 조금 특이하다.
선봉, 중견, 대장으로 출전하되, 선봉이 1회전에서 이기면 2회전에도 출전한다.
만약 2회전에서도 이겼다? 그럼 3회전에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즉 혼자서 상대선수 전원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
나와 리암의 실력이라면 앨빈이 경기에 단 한 번도 출전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앨빈 또한 내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본적인 연습은 해두자고.”
상황에 따라 앨빈을 ‘버리는 패’처럼 선봉으로 내보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부터 당장 열심히 해볼까?”
내 목소리에 앨빈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하지만 본격적인 특훈을 시작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검술대회의 우승 특전에 눈이 멀어 너 나 할 것 없이 참가 신청을 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실력자를 걸러내는 단계가 존재하는데.
그 예선에 통과하는 것이 바로 지금 할 일이다.
“예선은 내가 치르고 올게.”
내 말에 나머지 세 명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가볍게 통과해줘야지, 안 그럼 팀원들 볼 낯이 없잖은가.
* * *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왕립 아카데미 검술대회.
본격 토너먼트가 시작되면 뜨거운 열기와 함성 속에서 근사하기 그지없는 검술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그곳에 나갈 정예 중의 정예를 가려내는 관문인 예선은 본선과는 달리 토너먼트 형식이 아니다.
“후···. 몇 명이나 남았습니까?”
두 명의 참가자가 대련을 펼치면 평가관들이 그 둘의 기량에 점수를 매기고, 모든 참가자 중 고득점순으로 14명을 추린다.
이 14명이 속한 팀 14개가 본선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평가관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절차가 될 수밖에 없다.
“서른네 명.”
“어휴.”
평소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생단체는 십여 개에 불과하지만, 이 검술대회 준비기간이 되면 학생단체의 개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검술대회에 어떻게든 나갈 기회를 얻어보려고 단체를 급조하는 꼼수를 부리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니까.
“아니, 검술대회 출전용으로 단체를 만드는 건 이제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전부터 두 시간째 형편없는 검술을 지켜보던 평가관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거야 우리 모두의 바람이지, 누군들 그 생각 안 해본 줄 알아? 근데 그게 교칙의 어느 조항에 위배된다고 하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 쭉정이들의 헛짓거리를 언제까지 봐야 하냐고요.”
쭉정이들의 헛짓거리.
젊은 평가관의 말에 나이 든 평가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두 시간은 더 봐야 할 걸? 아직 서른 명은 더 남았잖아.”
“맙소사.”
그렇게 평가관들의 짜증이 극에 달했을 무렵.
연무장에 나타난 두 명의 모습에 나이 든 평가관이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제법 볼 만하겠는걸?”
“저쪽이··· 그 뭐지, 황금태양청년단의 단장 맞나요?”
황금태양청년단.
정치색이 옅은 대신 검술과 무예에 관심 많은 학생들이 주를 이루는 단체.
그 덕분인지 지위 높은 고위 귀족가 자제가 아닌, 검술에 뛰어난 학생들이 간부진을 꿰차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장을 맡고 있는 것은 오랜 무가인 드컨 가문의 차남이었다.
“드컨 가문 출신이니 검술은 뛰어나겠군. 리암 군이 있는 페킹튼 가문 정도는 아니더라도, 드컨 가문 또한 대대로 수도경비대의 요직을 맡아왔으니 말일세.”
“상대가 좀 안 됐는데요? 하필이면 저런 강자와 붙어서.”
젊은 평가관은 곰 같은 체격을 자랑하는 황태단 단장과 마주 선 호리호리한 소년을 가리켰다.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년을 보던 나이 든 평가관이 목록에 적힌 이름을 입 밖에 냈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라고?”
그 순간.
평가관들 사이에 침묵이 자리잡았다.
레핀 가문의 수치라 불리는 사생아는 교수진 사이에서도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으니까.
연무장에 마주 선 두 청년이 준비 자세를 취하는 가운데, 젊은 평가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거 어떡해야 하죠. 학장님이 세자르 군을 잘 챙기라고 하셨는데. ···없는 가산점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걸까요?”
“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 둘이 끙 소리를 내던 순간.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던 세 번째 평가관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네?”
그는 일전 바야르 교관의 수업에 참관인 자격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세자르가 혼자서 다섯 명의 소년을 연달아 상대했던 그 불공정한 대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교관은 자신 있게 말했다.
“세자르 군의 실력이라면 가볍게 이겨버릴 테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늙은 평가관이 혀를 차며 대꾸하자 교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보시면 알 겁니다. ···아마 지금처럼 잡담을 나눌 여유조차 사라질 테니.”
그리고 잠시 후.
교관의 말마따나 평가관 두 명은 넋을 놓은 채 두 청년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자르 군’의 검을.
“···저건 대체···.”
늙은 평가관은 대련이 펼쳐지는 내내 두 눈을 연신 비볐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가의 수치’라는 사생아 소년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검을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젊은 평가관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가 하면 금세 방향을 바꿔 측면으로 들어온다.
뒤로 물러서는가 싶으면 전진해오고, 한순간에 자세를 틀며 순식간에 공수를 전환한다.
어느 모로 보나 휘어짐 없는 직선의 검날이, 저 소년의 손에서는 유연한 뱀처럼 움직인다.
“와아, 저런 건··· 난생 처음 보는데요.”
적어도 그들이 아는 한에서는 이런 변칙적 검술을 구사하는 유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발놀림.’
3분이라는 시간은 생각 외로 길다.
세자르는 그 시간 내내 한시도 쉼 없이 두 발로 스텝을 밟았으며.
그 격렬한 몸놀림에도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말인 즉 평소 운동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다시 봐도 대단하군.’
세자르의 1대5 대련을 인상깊게 지켜보았던 교관은 이번에도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평가관들이 감탄하는 만큼이나, 그 상대는 진땀을 흘리며 고전하고 있었으니.
“젠장!”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나름 최선을 다해봤지만.
황태단 단장이자 드컨 가문의 차남 울릭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빌어먹을···.”
3분의 시간 동안, 그의 검은 단 한 차례도 상대의 몸에 닿지 못했다.
몸에 닿기는커녕 세자르의 검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으니.
“대련 종료!”
평가관의 외침과 동시에 울릭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두 다리가 풀린 나머지 일어설 엄두조차 못 내는데.
“수고했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빌어먹을 사생아’, 아니 세자르가 손을 내밀었다.
울릭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생각 외로 손이 단단하군.’
굳은살이 잔뜩 박였으며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전형적인 ‘검사의 손’.
직접 마주한 세자르는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운 좋게 귀족가에 거둬진 주제에 부모 돈이나 펑펑 써대는 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군.’
황태단 단장 울릭이 자신의 섣부른 평가를 수정한 순간.
“울릭이라고 했나?”
“···그래.”
세자르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체격이 좋길래 검 좀 쓰나 했더니 풍선 근육이었네.”
저 빌어먹을 새끼가···!
폭탄 같은 말을 하고 가버리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울릭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금 제 평가를 수정했다.
세자르 놈이 노력파에 검술 실력이 어마어마할지는 몰라도 성격 하나는 개차반인 게 분명하다고.
한편, 그들의 대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평가관들은 오랜만에 만장일치를 경험했다.
“그럼 이대로 평가를 마무리합시다.”
* * *
예선 결과가 나왔다.
고득점을 얻은 순서대로 1위부터 14위까지 명단이 전부 공개되었는데.
“···와.”
명단을 본 카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앨빈도 입을 떡 벌렸고, 리암은 픽 웃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실력을 다 드러낸 것 아냐?”
명단에 적힌 열여섯 개의 이름 중 맨 위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레핀 가문의 세자르’.
나 역시 조금 놀라기는 했다.
무난히 통과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1위를 차지할 줄은 몰랐으니까.
순수하게 감탄하는 카렌과 앨빈과는 달리, 리암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른 팀에서 견제할 수 있거든.”
성적이 좋을수록 견제당하기 때문에, 예선에선 일부러 실력을 숨기기도 한다는 거다.
‘그건 몰랐네.’
평가 자체는 교관들이 담당하지만, 대진표를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해 검술대회의 자잘한 부분은 학생들이 직접 회의를 통해 결정한단다.
“검술대회 대진표는 보통 제비뽑기로 결정하는데, 이 중 두 팀이 부전승으로 올라간다.”
부전승에 해당하는 제비를 뽑으려고 다들 엄청나게 열을 올린단다.
리암의 말에 따르면 올해는 ‘울릭 드컨’ 황태단 단장이 이 행사를 주관할 거라고.
예선에서 나와 맞붙었으며, 최하위인 14위로 예선을 통과한 울릭 말이다.
‘지금쯤 이를 갈고 있겠군.’
그놈의 단순무식하며 호전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재밌겠네.”
“응?”
내 혼잣말에 고개를 든 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씩 웃으며 앨빈을 돌아보았다.
“리암, 앨빈. 너희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두 사람은 단장과 사이가 좀 어색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황금태양청년단 활동을 이어나가는 터였다.
나는 그 둘에게 이러저러한 정보를 풀라고 지시했다.
‘제비뽑기 대신, 황태단이 확실하게 부전승권을 가져올 방법이 있다고 말이지!’
리암이 실마리를 던지면,
자타가 공인하는 고고학 덕후인 앨빈이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두 사람이 공조했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 거다.
‘빵셔틀로 취급받지만 앨빈이 머리 좋은 건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라 했으니까.’
며칠 뒤.
리암과 앨빈은 내가 말한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왔다.
“어때?”
리암은 대답 대신 킥킥 웃음만 터뜨렸고.
앨빈은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 단장이 절 따로 불러냈어요.”
“그래?”
“그 기막힌 방법이 뭔지 물어보길래 대답해줬더니 오! 이러면서 감탄하더라고요.”
그렇게 방법을 하나 하나 머리에 새긴 울릭은 ‘나 말고 다른 누구한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으름장을 놨단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주 잘했어, 앨빈. 훌륭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란 게 있다.
손으로는 도무지 풀기 어려운 매듭을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잘라냈다는 유명한 고사.
이제는 ‘대담한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뜻하는 격언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쾌도난마가 있지.’
이걸 정석대로 사용해도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겠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이 사골까지 우려먹은 클리셰 오브 클리셰를, 나는 역으로 비틀 생각이니까.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든 갈고리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