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40화 (40/176)

팰러스와 처음 대면하다

팰러스는 자신을 따라 <왕국수호청년단>의 모임실로 들어온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가 커지고, 왜소하던 몸도 제법 살이 붙어 보기 좋아졌다.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더니··· 어머니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

몇 년 전 아버지가 갑작스레 데리고 왔을 때만 해도.

세자르는 초점 없는 퀭한 눈이 눈에 띄는 앙상한 소년에 불과했다.

이 아이가 누구냐, 어디서 데려왔냐고 앙칼지게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레핀 공작은 이렇게만 답했다.

‘이름은 세자르요. 그 이상 묻지 마시오.’

아이는 저택가의 가장 후미진 방을 받았다.

하인들은 그 아이가 공작의 사생아가 아닐까 수군거렸고, 그렇게 시작된 소문은 어느새 소년이 사창가 출신이라는 식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하지만 공작은 딱히 소문을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기정 사실화해 소년을 자신의 서자로 삼았다.

‘귀찮게 둘러댈 필요가 없으니 잘됐지 않소.’

공작은 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의 아내나 하나뿐인 아들이 그 소문으로 어떤 피해를 입을지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애초에 남편이나 아버지다운 애정을 보여준 적도 없기는 했다.

그렇다고 막상 저 세자르라는 아이를 소중히 생각하는 건가 싶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언젠가 어머니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 아이를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자 공작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정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면 저 녀석이 사람 구실을 하도록 당신이 교육시키시오.’

그렇게 세자르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공작의 명백한 방치와 어머니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점점 더 궁지에 몰리던 소년에게, 팰러스는 이따금 다가가 관심과 애정을 맛보여주었다.

그에 길들여진 소년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팰러스의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세자르, 그간 많이 변했구나.”

그 말에 세자르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팰러스와는 어느 한 구석 닮지 않은 차분한 인상의 외모 또한 이제 제법 사내다운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형님.”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저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까 그 주사위는 무엇이었지?”

“···주사위요?”

“주사위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줄을 서서 학생들에게 던져보게 했냐는 거다.”

그때껏 주먹 속에 주사위를 꽉 움켜쥐고 있던 세자르는 팰러스의 말에 픽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재미 삼아 던지게 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주머니에 주사위를 집어넣는 것을 팰러스는 놓치지 않았다.

저런 능청스러운 태도나 자신의 말에 웃으며 대꾸하는 것 또한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니.

게다가 이곳 모임실에는 단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팰러스단에 가입시키시려는 걸까?”

“팰러스 공자님이 직접 데려오시다니···.”

“공자님의 포용력은 정말···.”

“야, 이쯤 되면 진짜 큰일나는 것 아냐? 전에 세자르 괴롭혔던 놈들 말이야.”

그 둘을 둘러싼 단원들의 뜨거운 시선과 수군거림 속에서도 세자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 노골적인 관심을 즐기는 듯 보일 정도였으니.

소년은 모임실 안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한 차례 둘러보았다.

“과연 그 ‘팰러스단’의 모임실이라 그런가. 실내가 상당히 훌륭하군요. 그런데···.”

자세를 고쳐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말을 잇는다.

“절 부르신 이유가 대체 뭡니까?”

팰러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형이 동생을 부르는데 특별한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형님. 제가 입학하자마자 형님이 절 부르셨다면 당연히 그렇게 믿었겠지만, 아시다시피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네가 혼자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을 내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자못 자애로운 듯 대꾸하자, 세자르가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떤다.

“뭐 이제 와 불러주신 것을 서운하다 탓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사양 않고 본론부터 꺼내셔도 된다, 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팰러스는 하, 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또한 자세를 고쳐앉으며 세자르와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래.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세자르.”

비록 어머니는 ‘아무리 새끼라도 사자는 사자’라며 세자르의 싹을 도려낼 것을 종용했지만.

팰러스는 소년에게 아직 이용할 만한 가치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왕권이 불안정한 시대에는 더더욱.

‘애초 그 이용가치가 아니었더라면, 냉혈한 같은 아버지가 세자르를 데려왔을 리 없으니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우리 <왕국수호청년단>에는 너와 진실한 우정을 나눌 만한 건실한 청년들이 많은 만큼, 네가 이 아카데미에서 더 뜻깊은 시간을 보내는 데-”

“아뇨, 괜찮습니다.”

“···뭐?”

너무도 쿨한 거절에 팰러스는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평소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 ‘그 힘’을 무심코 펼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세자르.”

아까보다 좀 더 힘이 실린 목소리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왕국수호청년단>으로 들어오겠나?”

‘힘’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

하나. 단답형의 질문을 할 것.

둘. 그 질문에 상대가 긍정의 대답을 할 것.

그러나 그 조건이 무색하게도, 그가 약간의 위압감을 행사하며 질문하면 대부분이 ‘네, 팰러스 님’이라고 답하곤 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

세자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권유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설마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팰러스가 당황한 사이.

세자르는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따로 하나 만들었거든요, 그놈의 청년단.”

그 마지막 말에 모임실 안은 폭탄을 떨어뜨린 듯 시끄러워졌다.

“방금 들었어? 감히 팰러스 님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간이 큰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거기에 누가 들어간대?”

“···그만!”

팰러스의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한 마디에, 웅성임이 삽시간에 멎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자르가 말을 이었다.

“신경써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아시다시피 나무 그늘 아래서 새로운 싹이 자라긴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자신이 알던, 상습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유약한 세자르가 더는 아니었다.

팰러스 자신이 아예 모르는 존재였다.

“형님의 그늘이 아닌, 온전히 저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말이지요.”

“글쎄, 네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만···.”

팰러스는 어느새 온기가 싹 가신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온실처럼 보장된 환경이 아닌 곳에서 그런 싹이 제대로 자랄 수나 있는지 의문이로군.”

“형님, 제 태생을 잊으셨습니까.”

그러나 세자르는 도리어 웃으며 대꾸했다.

“제일 천한 곳,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이 귀하디 귀한 이들만 온다는 아카데미에 들어온 저입니다. 화초는 온실을 벗어나면 죽지만, 잡초는 어딜 가든 그 질긴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살아남기 마련이지요.”

소년은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맛있게 마셨습니다. 그럼 이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등을 보이며 모임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팰러스는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세 명의 정예 중 브렉이 얼른 손짓을 해 보였다.

‘뭐해! 얼른 다들 나가라고!’

그의 눈빛을 알아차린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어느새 브렉, 타릭, 우만 세 명의 정예만이 남았을 때.

팰러스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만.”

“네.”

“나의 사랑하는 아우가 대체 무슨 이유로 모임을 만든 건지 알아보거라.”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팰러스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제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잡초라도 빛과 물이 없는 곳에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겠지.”

* * *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모임실을 나왔다.

“후아.”

복도를 걷는 동안 심호흡을 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봤지만 쉽지가 않다.

두 손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아까 그건 뭐였지.’

팰러스가 던진 주사위 결과는 분명 4였다.

주사위가 틀리지 않았다면 놈이 이능자라는 얘기인데···.

‘팰러스가 이능자란 얘기는 원작에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이능자라면 대체 무슨 능력을 지닌 걸까.

‘게다가 아까의 그 소름 끼치는 기분.’

그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 때문일까.

팰러스와 처음 마주했을 때 나를 덮쳐온 그 거부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긴커녕 더욱 강렬해졌다.

어쩌면 더욱 길게 이어나갈 수도 있었던 대화를 굳이 끊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세자르. <왕국수호청년단>으로 들어오겠나?’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아주 친절하고도 자애롭기 그지없는 권유의 질문이었지만.

그 부드럽고도 온화한 목소리가 어째서 내게는 숨이 확 막히는 듯 느껴졌을까.

한 차례 숨을 고르며 심장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그의 눈길을 피하며 흔들리는 이성을 힘겹게 붙들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네, 형님’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하는 느낌이었어.’

세자르 또한 이능자가 아니긴 했지만 이 경우야 소설 리메이크 때문에 변경된 거였고.

아니면 그런 건가?

‘원작의 팰러스에게도 이능이 있었지만, 독자들에게는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든가···.’

하지만 대체 그럴 만한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작가 역4서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좋을 만한 이유가···.

머릿속에서 용솟음치던 의문은 이내 또 다른 의혹으로 이어졌다.

‘만의 하나 <왕도의 대가>가···.’

역4서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아니라, 정말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라면?

기이함에 가까운 가정이 머릿속을 강타한 순간.

“세자르, 괜찮아?”

카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보아하니 내내 복도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 그래.”

“얼굴이 창백해. 뭐 이상한 해꼬지라도 한 건 아니지?”

“전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픽 웃자 그제야 카렌은 안심한 듯 굳은 얼굴을 폈다.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아무도 없는 주변을 괜스레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죽여 말한다.

“네가 맡겼던 의뢰 있잖아.”

‘흑의 기사’에 대한 단서를 찾아냈다고, 카렌은 속삭였다.

* * *

“미치겠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단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카렌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단 본격적인 얘기에 들어가기 앞서 이것부터 말해줄게, 세자르.’

‘네가 찾는 흑의 기사, 본명 에드문드 세비어 경은···.’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말을 이었다.

‘이미 5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

에드문드 세비어, 별칭 흑의 기사.

현 국왕의 백부이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진 고故 이언 왕세자의 최측근이었지만.

왕세자의 죽음 이후 내란에 휘말려들어 본인뿐 아니라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했단다.

‘그러니 세자르, 이쪽 일은 그리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세자르가 공작저에 온 4년 전부터 후견인은 매달 편지를 한 통씩 보내왔으니까.

진짜 후견인이 죽었다면, 편지를 보낸 건 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어쨌거나 카렌이 찾아냈다는 ‘단 하나의 단서’가 바로 이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쪽지다.

쪽지에 적힌 것이라고는 이 한 줄의 문구가 전부.

『공작각하께.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길 바라오. 그 아이는 각하께도 소중한 부하였으니.』

여기 이 ‘공작’이란 게 레핀 공작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인 데다, ‘그 아이’가 가리키는 게 누구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나이만 봐도 세자르가 공작의 부하일 수는 없으니까.’

현 상황에서는 뭐 하나 짚이는 것이 없네···라고 고민에 빠진 순간.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미래의 셜록 홈즈 꿈나무’ 달성! - 미지의 후견인에 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보상 ‘갈고리’를 수령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눈앞에 떨어졌다.

“진짜 그냥 갈고리잖아.”

한쪽 끝은 날카롭고 다른 쪽은 실을 꿸 수 있는 고리 형태. 굵기가 가느다란 것이 낚시대에 끼워쓰기 딱 좋아 보인다.

이런 걸 대체 어디다 쓰라는 건가, 생각한 순간.

“아.”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허접한 갈고리를 이용해 도전과제 중 하나를 아주 그럴싸하게 해결하고.

종국에는 검술대회 결과를 내게 유리하게 만들 방법 말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원작 전개를 180도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눈앞의 갈고리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

···내가 몸소 앞장 서서 예상 외의 이벤트를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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