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9화 (39/176)

예상 외의 이능자를 찾아내다

학생모임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발기인 1명, 회원 3명이면 누구나 이 아카데미 안에서 학생모임을 만들 수 있으니까.

“실행력이 엄청나네.”

“한시가 급한 사안이라.”

카렌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한시가 급하다니, 대체 왜?”

“곧 이야기할 거야.”

어제 오후.

황태단 단장 놈에게 거절당하자마자 나는 행정실로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신규 모임 창설을 신청했다.

단체명을 뭘로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세자르와 친구들>로 했다간 만들자마자 탈퇴할 줄 알아.’

‘그럼 카렌 , <세자르와 와와>는 어때?’

‘···.’

십여 분간의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단체명은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으로 결정되었고.

“···진심인가요?”

황당해하는 행정관에게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줄여서 ‘우애단’ 정도로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신청은 금방 통과되었지만, 10명 이하의 소규모 모임에는 활동 공간을 주지 않는 게 원칙이란다.

그리하여 ‘우애단’의 단장인 나, 세자르 레핀은 단원들을 내 기숙사로 데려오게 된 것이었다.

“우와···.”

“으리으리하네.”

“세자르, 너 돈 좀 있구나?”

고급 호텔 수준으로 꾸며놓은 기숙사 실내를 보더니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세 명.

다들 기본 기숙사실에서 생활하는지, 이런 곳은 처음이라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특히나 안경 소년이 제일 난리였다.

“이건! 얼마 전 수도 경매에 나왔던 조각가 크루스텔의 역작으로 불린 작품 아닌가요!”

“앗 설마 이건 남부 광산지대에서만 나온다는 루테륨으로 만든···.”

“이 책을 여기서 보다니!”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고고학이나 풍속학 덕후인가 보다.

거실 탁자에 다같이 둘러앉자 사용인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안경 소년은 여기저기 놓인 장식품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고, 카렌은 새침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데.

리암이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세자르 너···.”

“응?”

“공작각하의 총애를 받고 있구나. 몰랐다.”

아무래도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때, 아기방의 문이 열리며 농농이를 안은 보모가 나왔다.

“어머, 주인어른 오셨네요! 이쪽은 친구분들이신가요?”

[앙, 아앙!]

농농이의 등장에 세 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아기가 여기 있냐, 는 반응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디터라고, 내 종자 녀석의 아이야. 몇 년 전에 거하게 사고를 쳐서 말이지.”

“···.”

어쩐지 분위기가 급숙연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농농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세 명의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농농이가 평소보다 더 재롱을 피웠다.

[앙, 옹, 까르륵!]

윙크를 한답시고 두 눈을 꼭 감지 않나.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귀여운 척을 하질 않나.

두 팔을 흔들며 춤도 춘다.

‘농농이 너 은근 관심받는 거 좋아하는구나···.’

거기에 이 세 명은 -안경 소년, 리암, 카렌의 순으로- 아주 열렬한 호응을 보냈으니.

“너, 너무 귀엽습니다! 농농 님, 한 번만 더 윙크를···.”

“으윽, 시, 심장이···.”

“우리 그냥 농농이 팬클럽 창설하면 안 돼? 단체명을 <농농사랑단>으로 할까?”

그렇게 농농이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낸 뒤.

가출했던 이성이 어느 정도 되돌아온 녀석들과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일단은 안경 소년의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저, 저는··· 앨빈이라고 합니다.”

농가 출신의 평민으로, 성적이 좋은 덕에 운 좋게 장학금을 받아 아카데미 행정학부에 입학했다고 한다.

“머리가 엄청 좋은가 보네.”

“아니, 아닙니다.”

내 말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젓는 앨빈.

카렌이 한마디했다.

“앨빈, 우리끼리인데 그냥 반말로 하지 그래? 네 출신이 어떻든 이 아카데미에선 그게 관행이라고.”

하지만 앨빈은 말을 놓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결국 ‘너 편한 대로 해라’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소년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통성명을 마친 후,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째서 갑작스레 모임을 창설하자고 한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한 달 뒤, 검술대회가 열린다는 건 다들 알지?”

모를 리가 없다.

‘아카데미 검술대회’는 리암처럼 검술에 뛰어난 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즐기는 축제의 장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왜, 검술대회에 참가라도 하려고? 그것 땜에 모임을 새로 만든 거야?”

카렌의 새침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리암이 조심스레 한마디한다.

“굳이 왜?”

검술대회 우승자가 받는 특전과 보상은 빵빵하다.

우승자가 소속된 단체는 1년간 원하는 공간을 모임실로 배정받을 수 있으며.

우승학생들은 각각 소정의 상금과 졸업 후 추천장으로 쓰이는 ‘상장’의 일종을 받는다.

하지만 학생들이 노리는 것은 이 ‘본상’보다도 ‘부상’이다.

그 학기가 끝난 후의 방학 기간에 열리는 정기왕궁연회에 정식 초대를 받는 것!

‘다들 이것 때문에 그 난리를 치는 거지.’

국왕을 비롯해 왕궁 주요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찍어놓을 수 있는 기회이니까.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팰러스 같은 ‘고위 귀족가 자제’들은 굳이 검술대회에 관심을 갖지 않는 거다.

“공작각하의 총애를 받는 너라면, 굳이 이 초대장이 없더라도 얼마든 왕궁연회에 초대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리암의 논거는 합당했으나, 문제는 그것이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아무래도 이쯤에서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다.

“뭔가 잘못 아는 것 같은데, 리암. 나는 딱히 총애를 받고 있진 않아.”

“그럼···?”

“이 아카데미에 편입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자력으로 손에 넣은 거야.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나는 더 위로 올라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검술대회에 반드시 우승해야 해.”

“···.”

“게다가 이건 너희들에게도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라고 보는데.”

나는 세 명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검술 명가의 자제이지만, 위의 형들에게 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리암.

다른 걸 다 떠나 평민 출신인 앨빈.

진짜 후작가 아가씨인지 의심이 되는 카렌.

‘하긴 후작가의 영애가 도적길드의 후계자일 리가 없잖아?’

어쨌거나 이들이야말로 ‘출세의 기회’가 누구보다도 절실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내가 진짜로 노리는 것은 그쪽이 아니었으니.

‘고대유물의 단서!’

그냥 기념품인 것처럼 나왔던 검술대회 부상.

이게 후반부에 가서야 고대유물의 단서가 되는 아이템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걸 추적해 고대유물을 찾아낸다.’

각종 맹수가 유물을 지키고 있다는 설명이 나왔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

잠시 고민하던 소년소녀들은 참가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가하는 거야 좋은데, 어떻게 우승할 생각이지?”

“그거야 간단하지.”

카렌의 아주 합당한 질문에 나는 씩 웃으며 리암을 돌아봤다.

리암이 움찔한다.

“나와 리암 둘이서 다 이기면 되거든.”

“···내가 왜.”

“황태단에선 대표로 못 나간다며?”

“그거야 그렇지만.”

나름 간부라고는 해도, 황태단에선 이미 다른 놈들이 ‘대투사’로 출전하기로 얘기가 된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랑 나가. 나간다고 손해 보는 거 아니잖아?”

“내가 어쩌다···.”

한숨 비슷한 것을 쉬는 리암을 보더니, 카렌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리암, 너 은근히 잘 말린다는 얘기 듣지 않아?”

“···.”

그녀의 웃음소리에 금세 새빨개지는 리암의 귀 끝.

티가 나도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냐.

* * *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애매한 사이단>, 일명 ‘우애단’ 등록도 잘 마무리되었고, 검술대회 신청도 완료했다.

그 외에도 틈나는 대로 주변에 ‘이능자 주사위’를 던져보게 했다.

보모와 잡일꾼도 1이 나왔으며 농농이는···.

[압!]

“농농아, 먹으면 안 돼!”

먹는 건 줄 아는지 자꾸 입에 넣으려고 하는 통에 숫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온갖 학생 모임을 기웃거리며 ‘주사위 던지세요’를 외치는데, 무슨 간판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는 기분이었다.

처음만 해도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어? 혹시 주사위 던지게 하려고 온 거야?”

“나도, 나도 굴려볼래!”

“내가 다음 차례다!”

어느새 소문이 난 건지 사면체를 던지겠다고 줄을 서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호기심 때문인지 다들 희희낙락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

“아, 또 1이다!”

“다음.”

“뭐야, 이 주사위는 1 말고 다른 수는 안 나오는 거야?”

“그다음.”

“한 번만 더 던져보면 안 될까?”

이번에 들른 곳은 학생단체 중 네 번째로 크다고 하는 곳.

40명 정도 던져봤는데 전부 1밖에 안 나왔다.

4가 아니라 2나 3만 나와줘도 좋을 텐데.

‘이번에도 실패인가.’

어쨌거나 -미발현 이능자이긴 하지만- 앨빈 한 명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다.

자리를 옮겨야지, 하며 주사위를 정리하려던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늦긴 했지만, 나도 던져봐도 될까?”

그와 동시에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다.

어쩐지 쌔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금발머리의 미청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청년 몇 명과, 그 주변으로 홍해처럼 쩍 갈라져 있는 학생들 또한.

‘저건.’

누군지 모를 수가 없다.

다른 학생들과는 이미 존재감부터가 다르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발산하는 팰러스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

겨우 몇 걸음을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폭발할 듯 쿵쾅거리는 심장, 바짝 마른 입안.

텍스트로 수없이 접했던 인물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굉장히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발에 채이는 단역이나 흔한 조연도 아닌, 주인공이 아닌가.

···나 같은 고인물 애독자에겐 기이한 애증마저 불러일으키는.

‘정통의 핏줄, 타고난 총명함과 발군의 검술 실력,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갖춘 완벽한 청년.

팰러스 레핀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준비된 패왕이었다.’

알 수 없는 선망과 원망이 한데 뒤섞인 감정 속에서,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온 팰러스를 마주 보았다.

팰러스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자애롭게 말했다.

“널 이제야 보는구나, 세자르.”

그러나 파충류처럼 번들거리며 잔혹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 때문일까.

한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무심코 말해버렸다.

“안 되는데요?”

사방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제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뭐? 라고 묻는 팰러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주사위 던지기 끝났습니다, 형님.”

그 순간, 조각처럼 완벽하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의 한쪽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것 참 아쉽구나. 그런데 어쩌지.”

팰러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탁자로 가져가더니, 그 위에 놓인 사면체를 움켜쥐고는-

“···이미 던져버렸는데.”

휙, 던져버렸다.

위로 날아올랐다가 책상 모서리에 걸려 떨어지려던 사면체를-

내가 탁! 하고 간발의 차로 붙잡았다.

과연 몇이 나왔을까.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손에 쥔 사면체의 숫자를 확인하려던 순간, 팰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형과 얘기 좀 하지 않겠나? ···나의 사랑하는 아우님.”

사랑은 개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천천히 손을 뒤집어 주먹을 펼치자 나온 것은-

‘숫자 4다!’

사면체 바닥에 적힌 것은 다름 아닌 숫자 4.

그렇다면 팰러스도··· 이능자라는 건가?

나는 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지요.”

가슴팍 아래서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티 내지 않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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