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8화 (38/176)

그까짓 거 내가 만들고 만다

어두웠던 시야가 차츰 밝아졌다.

힘겹게 뜬 눈꺼풀 사이로 동그란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앙! 앙!]

꼬물거리는 손이 내 얼굴을 가만가만 만진다.

얼굴이 차츰 가까워지더니 동그란 이마가 내 얼굴에 닿았다.

그 따스한 감각에 정신을 차리자.

[옹, 앙···.]

“농농아.”

찹쌀떡처럼 생긴 농농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농농이가 내 뺨에 제 보드라운 얼굴을 비비는 가운데,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닐까요?”

“수련을 얼마나 하셨길래··· 도련님, 아무래도 몸에 좋은 것 좀 챙겨드셔야겠습니다.”

···디터랑 발닉도 있었네.

지금 이곳은 내 침실.

얘기를 들어보니 수련실에서 ‘그림자 보법’에 처음 성공한 후 곧바로 기절한 모양이다.

“열심히 수련하시는 건 좋지만 부디 몸을 생각하시지요, 주군.”

“그 뭐냐, 칼데안 호수에서 잡히는 잉어가 그렇게 몸에 좋다던데. 그거 하나 구해다가 고아드릴까요?”

둘의 이야기가 어느새 나의 보양식으로 흘러가던 중.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피식 웃었다.

“괜찮으니까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

“수련실에 떨어져 있던 책은 옆에 가져다 뒀습니다.”

디터가 내 옆에 놓인 <수련의 책>을 가리켜 보였다.

“알겠어. 농농아, 고마워.”

[옹옹!]

침대 옆에 서 있던 농농이의 볼에 뽀뽀를 해준 뒤, 세 사람을 내보냈다.

창 밖을 보니 벌써 석양이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려 있다.

‘기절한 지 시간이 꽤 흘렀나 보지.’

그나저나 아까 그건 대체 뭐였을까.

마치 시공간을 넘어서는, 아니 시공간과 내가 분리되는 그 느낌은···.

‘그게 바로 그림자 보법의 효용.’

나는 침대 옆에 있던 <수련의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물음표투성이로 나왔던 부대효과 설명이 해금되었고, 숙련도 표시가 생겨났다.

『‘그림자 보법’(‘그림자 검객’ 전용스킬, 숙련도 lv.1)

- 설명 :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보법.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 지속시간 : 5초

- 쿨타임 : 2시간

- 부대효과 : 자신의 그림자가 닿는 곳 어디로든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엄청난걸.’

단순히 그림자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보법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종의 방어 수단으로 사용 가능한 순간 이동 능력.’

그 사실을 새삼 의식하자 심장이 기대감으로 쿵쿵거린다. 엄청나게 든든한 무기를 얻은 느낌이랄까.

이제는 새로운 도전과제들을 좀 살펴볼까.

“으차.”

나는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꺼내 갱신된 도전과제 목록을 적어보았다.

-미지의 후견인에 관한 단서를 찾았나요?

-이능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나요?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나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능을 사용해봤나요?

-고대 유물의 단서를 얻었나요?

일단 ‘미지의 후견인’은 카렌에게 의뢰를 맡겼으니 단서가 나오는 대로 언질을 줄 거고.

‘이능자 찾기’ 미션은···.

“···리암이 내일 소개시켜주겠지.”

<황금태양청년단> 회원이 50명 정도라고 들었다. 일단 걔들한테 주사위를 던지게 해보고, ‘황금태양’에 가입해 다른 모임과도 접점을 늘려나가야 할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 과제들인데.

“지켜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라고?”

거의 무슨 관종 미션이 아닌가.

거기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능을 쓰라니···.

‘그림자 보법을 사람들 앞에서 쓰란 말야?’

아니, 아니다.

어떤 보상을 주더라도 보법을 공개하는 데서 오는 위험이 더 클 터.

이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맨 마지막 ‘고대 유물의 단서’.

“이건··· 짚이는 게 있는데.”

팰러스가 이 고대 유물의 단서를 어디서 얻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원하던 답을 찾아냈다.

‘검술대회!’

말이 친선 검술대회이지 엄청나게 치열한 경기다.

우승자가 속한 학생모임에 주어지는 특전이 상당하고, 우승자 본인이 받는 상금과 부상 또한 엄청나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드물게 사망자가 나올 정도.

어쨌거나 실보다는 득이 많은 이벤트이지만, 여기에 참가하려면 학생모임의 ‘대투사’로 선정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검술대회라···.”

과제 목록을 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던 나는 이내 흡족한 결론을 내렸다.

···이거 하나로 도전과제 두 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결론 말이다.

* * *

다음 날.

리암은 나와 카렌의 모습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

“그, 저, 으···.”

“왜, 오늘 학생모임에 가입시켜준다고 했잖아. 그새 잊어버렸어?”

물론 리암이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당황 포인트는 그쪽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게···.”

리암이 우물쭈물하며 카렌의 옆얼굴을 힐긋거렸다.

···왜 똑바로 못 쳐다보는 건데.

“근데 왜 카, 카렌까지 온 거야.”

저것 봐라. 귀 끝이 빨개졌네.

무심하게 옆을 돌아보자, 카렌이 발끈하며 대꾸했다.

“난 딱히 오고 싶다고 한 적은-”

“너도 친구 없잖아.”

“···.”

“쑥스러워할 것 없어, 너나 나나 둘 다 비슷한 처지에.”

“난 아니거든. 어? 근데···.”

카렌의 반짝이는 눈이 리암에게 머물렀다.

“너 전에 검술 수업 때 세자르한테 싸움 걸었던··· 리암 페킹튼 맞지?”

리암의 얼굴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카렌이 날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넌 어떻게 속없이 이런 인간이랑···.”

“그게 뭐 어때서. 리암이랑 난 어디까지나 기브 앤 테이크 관계라.”

“기브··· 뭐?”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래 관계다 이거지.”

나와 카렌의 만담 비슷한 대화에 리암이 끼어들었다.

“저기.”

소년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미안하다, 세자르.”

“···?”

“처음만 해도 널 ‘주제 모르고 설치는 망나니 서자’라고만 생각했거든. 그래서 팰러스 님을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겠다 마음먹은 건데.”

리암은 눈에 띄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내가 널 섣불리 판단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왜 굳이 싸움을 걸었는지도 모르겠고.”

“···.”

녀석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해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카렌이 픽 웃으며 끼어들었다.

“야, 리암 얘 귀 빨개졌어.”

카렌,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야···.

나는 민망해할 리암을 대변해주었다.

“리암이 민망할 테니 그런 건 말하지 마, 카렌.”

“···너희들.”

그렇게 쑥스러운 대화는 급마무리되었고.

리암은 우리를 ‘황금태양청년단’, 줄여서 ‘황태단’(···)의 모임실로 데려가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너희도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팰러스단과 노바스단은 이 아카데미 학생 세력을 양분하는 단체다.”

고양이와 쥐처럼 사이가 좋지 않으며, 두 단체의 단원수는 각각 백여 명 정도.

헌데 이 두 단체의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팰러스 공자님을 중심으로 하는 팰러스단은 상당히 수평적인 분위기이지. 팰러스 님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끼리는 무조건 서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쓰고. 평민 출신과 귀족 출신들이 무리없이 섞여지낸다.”

그런 건 몰랐는데, 새로운 정보다.

“반면 노바스단은··· 전형적인 귀족적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같은 단원들끼리도 귀족인지 평민인지, 귀족이라 해도 어느 가문 출신인지, 부모나 누구냐에 따라 그 안에서 서열이 수없이 나뉘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팰러스단이 전반적으로 더 인기가 많은 거라고 리암은 덧붙였다.

그 외에도 십여 개의 학생모임이 더 있으며, 지금 가는 ‘황태단’은 규모로만 보면 3, 4위 정도 하는 곳이지만 정치색이 제일 옅은 곳 중 하나란다.

“중복 가입도 허용하며, 검술에 관심 많은 학생들이 주가 되는 곳이다.”

“흠, 너 같은 놈들 말이지?”

내 말에 리암이 씩 웃었다.

“그래. 세자르 네 검술 실력은 이미 소문이 파다한 상황이니, 네 가입을 반기면 반겼지 거부할 사람은 없을 거다.”

“나는?”

“너는···.”

카렌의 물음에 리암의 얼굴이 또다시 새빨개졌다.

리암 이놈, 아주 투명한 놈이로구만.

복도 끝에 다다르자 ‘황금태양청년단’이라는 표지가 붙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리암을 선두로 하여 우리 셋이 들어가자, 모임실 안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반갑다.”

가입신청서를 쓰려면 단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리암의 말에, 나는 대뜸 모임실 앞에 자리한 연단에 올랐다.

이 아까운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되거든.

“너희들, 주사위 던지기 해볼래?”

···그렇게 시작된 주사위 던지기는, 이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모임실에 자리해 있던 십여 명의 ‘황태단’ 소년들은 연단 앞에 줄지어 선 채 차례로 주사위를 던졌다.

“1이다!”

“나도 1인데?”

“아니, 이놈의 주사위는 왜 1 말고 다른 건 안 나오는 건데?”

저렴한 대신 정확도가 떨어진다더니, 완전 정확한 것 같은데?

“에이, 또 1이야!”

“다른 거 나오는 놈 없냐?”

그렇게 거의 모두가 1이 나와 아쉬워하고 있던 차.

맨 마지막에 소심하게 서 있던 안경 낀 소년이 조심스레 주사위를 던졌다.

사면체가 탁자 위로 휙 날더니···.

“어?”

···3이 나왔다.

그 주변에 서 있던 소년들 또한 깜짝 놀라 외쳤다.

“야, 이 자식 3 나왔어!”

“3이다, 3!”

“근데 3 나오면 뭐가 좋은 건데?”

“몰라, 그냥 3이라니까!”

대화만 보면 전부 바보들 같지만, 이곳이 왕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오는 왕립 아카데미임을 잊지 말자.

어쨌거나.

나는 3이 나와 어리둥절한 소년에게 다가갔다.

“너, 이름이 뭐야?”

“···.”

나를 본 소년의 눈에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얘는 반응이 왜 이렇대.

“너··· 세자르 맞지?”

“맞는데. 너 이름은 뭐냐고.”

소년이 대답하려던 순간, 그를 둘러싼 황태단 소년 중 한 명이 외쳤다.

“안경 병신이잖아!”

그와 동시에 우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년들.

“너 이 새끼, 내 심부름 또 까먹었지?”

“이 새끼는 말해줘도 10초 후면 잊어버린다니까.”

말하자면 이 동네의 빵셔틀이라 이건가.

카렌이 얼굴을 구겼고 리암은 민망해했다.

이런 놈들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란 생각에 씁쓸해하는데.

“무슨 일이냐?”

‘황금태양청년단’의 단장이 도착했다.

* * *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라면 나를 환영까진 아니더라도 가입시켜주지 않을까 했지만.

황태단 단장은 우리 세 명을 모임실 밖의 복도로 불러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안 돼.”

그건 나와 리암 모두의 판단 미스였다.

“어째서입니까, 선배?”

“하, 리암 넌 진짜 분위기 파악을 왜 이리 못하냐.”

“그게 무슨.”

단장은 한심하단 눈으로 리암을 내려다보았다.

“저 자식이 팰러스 공자님껜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거, 진짜 몰라서 이래?”

“그렇다 해도 이건 부당합니다. 우리 ‘황금태양청년단’의 가입조건에 세자르는 어디 하나 부족함이-”

“왜 이제 와 순진한 척이야. 너도 팰러스 님 발바닥 핥는 놈들 중 하나면서.”

“말씀이 심하십니다!”

단장은 픽 웃더니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하, 지랄하네. 팰러스 님이 아니더라도 저 자식은 내가 가입 안 시켜, 아니 못 시켜. ···어디 사창가에서 태어난 사생아 따위가 기어들어와-”

“그 정도만 하지.”

나는 단장 놈의 말을 끊었다.

“더는 들어갈 생각도 없으니까.”

천천히 걸어가 단장 앞에 가 서자, 놈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니 놈이 단장이니 마음대로 가입시키고 말고 하는 거야 다 좋은데 말이야. 나더러 사창가 태생 따위··· 라고 했나?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

놈의 면상을 똑바로 마주 보며 힘주어 말했다.

“내가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려고.”

“···무슨.”

“어디까지나 만약, 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야. 내가 이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어디 전쟁터에라도 나가 아주 아주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 치자. 그런데 아버지, 아니 공작각하께서 아주 기뻐하시네?”

단장은 이 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같은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각하께서는, 이 대단한 공을 세운 서자를 적자로 인정하겠다! 고 만천하에 공표하는 거지. 역사상 그런 일이 아예 없던 건 아니잖아?”

단장 놈의 눈이 커졌다.

예로부터 적서 차별은 서양이 더 심했지만, 정식 후계자가 없다든가 서자가 대단한 공을 세운 경우에는 적자로 인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정말 만의 하나, 내가 레핀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는다면···.”

“···.”

“네가 드컨 남작의 둘째아들이랬나? 저 수도 끄트머리에 콩알만 한 영지를 지닌 가문 맞지?”

침을 꼴깍, 삼키는 단장 놈을 노려보며 말을 맺었다.

“···그때 가서 내 바짓가랑이 붙들고 질질 짜며 후회하지 말라고, 병신아.”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말에 놈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렸다.

“가자.”

리암이 엉겁결에 나를 쫓아왔고, 카렌은 말없이 총총거리며 걸어왔다.

나는 모임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안경 병신’에게 손짓했다.

“너도 와라, 빵셔틀.”

“어? 빵···?”

안경 소년은 내 기세에 밀려 그대로 따라나왔다.

‘생각이 바뀌었다.’

인맥 풀을 넓혀서 이능자를 찾고.

검술대회에 대표로 나간다.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내가 직접 만들면 되지.”

그까짓 학생모임, 내가 하나 만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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