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
개인 수련실은 기숙사 관마다 십여 개씩 있는 것으로, 사전 신청자에 한해 수련실을 배정해준다.
내가 있는 북관에도 수련실이 꽤 있는데,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텅 비어 있다고 했다.
이능을 얻었음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만큼, 수련하는 모습 또한 비밀에 붙여야 한다.
‘나도 이능을 수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굳이 실내에서 할 필요가 없지.’
사실 이능자가 된 순간까지만 해도 너무 좋았지만,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하던가.
‘그림자 검객이라니.’
무협지에 나올 법한 이능명에 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동네에서 검으로 최강이 되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싶어서 말이지.
‘검술 능력보다도 다른 쪽의 이능이면 했는데.’
가능하면 방어에 관련된 것이라든가.
사람의 심리를 읽거나 조종하는 식의, 좀 더 신박하게 활용 가능한 이능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본격적으로 ‘이능 스킬’을 단련할 시간.’
‘이능을 어떻게 쓰는데?’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도전과제 목록 중 ‘정보 탐색’에 관한 것이 있었지 않은가.
며칠 전, 피닉스 사교클럽에서 카렌에게 의뢰를 하고 돌아오자마자 과제가 달성되었다.
[도전과제 ‘믿을 만한 소식통이 생겼어’ 달성! - 믿을 만한 전문가 카렌에게 '정보 탐색' 의뢰를 맡겼습니다.]
[보상 ‘수련의 책’을 수령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이 바로 이 <수련의 책>.
수령할 당시에만 해도 아이템 설명이 ???뿐이었지만 이능이 발현되고 나니 그 내용이 해금되었다.
『‘수련의 책’(가격 : ????)
- 설명 : ‘스킬’을 빠르게 단련하는 방법이 적힌 책.
- 비고 : ‘이능자’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수련법으로, 일반인에게는 책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가죽 장정이 너덜너덜해진 허름한 책을 펼치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가 나왔지만.
그 위에 손을 가볍게 올리자-
“와.”
부웅- 하고 진동이 일며 그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그림자 보법의 기본>.
그 아래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발전되어 이어졌는지 등, 그림자 보법의 역사와 기원, 이론에 관한 원론적인 설명이 길게 이어졌지만···.
중요한 건 이거였다.
-‘그림자 보법’의 숙련도를 높이려면 수련이 필수입니다. 수련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 문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눈앞의 바닥에 푸른색 동심원이 나타났다.
‘뭐지?’
멈칫하자 동심원이 사라지더니, 이내 내 발 근처에 다시 생겨났다.
‘혹시··· 이걸 밟으라는 건가?’
타이밍에 맞춰 동심원을 밟자.
발바닥에서 둥- 하고 진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찌르르 하고 발을 타고 올라오는 이 느낌은···.
‘대체 뭐지?’
의문의 답을 찾을 새도 없이 새로운 동심원이 생겨났다.
눈앞에 생길 때마다 곧바로 그것을 밟았다.
탁, 타탁.
‘일종의 리듬게임 같은걸.’
제때에 밟으면 발을 통해 진동이 느껴지고, 타이밍을 놓치면 진동이 오지 않는다.
나는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동심원을 밟았다.
원이 생겨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후우, 후우.”
처음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던 그것은, 어느새 정말 ‘수련’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갔고.
때맞춰 밟을 때마다 발바닥을 통해 진동, 아니-
‘이런 걸··· 기氣라고 하는 건가?’
여타 소설이라면 ‘마나’라고 칭하는 게 어울릴 법한 힘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발바닥 끝에서 올라온 그 힘은 점차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그 힘이 닿을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개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기묘한 감각이다.’
어느새 전신에 땀이 흥건해진 가운데, 동심원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내 몸은 생각하지 않은 채 저절로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탁, 타다다닥, 타닥.
‘몸이··· 무겁군.’
그저 걸을 뿐인데. 아주 빠르게 걸을 뿐인데.
호흡이 가빠지고 옆구리가 뻐근하게 아프다.
속도가 늘어날수록, 보법을 계속할수록 느껴지는 고통은-
“크윽.”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온몸을 찔러대기 시작했지만,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이 고비만 넘어서면, 이것만 견뎌내면.’
러너스하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라톤에서 흔히 찾아오는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이겨낸 다음에는, 엔돌핀이 분비되어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뿐해지는 현상이 찾아올 거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후욱, 후욱.
후욱, 후욱.
호흡을 간신히 다스려 가며 페이스를 되찾았다.
어느새 무수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동심원들.
의식의 끈을 놓은 채 몸이 움직이는 대로 그것들을 따라가자-
‘드디어!’
몸이 가벼워진다.
폐가 잔뜩 부풀어오름과 동시에 두 다리가 저절로 ‘보법’을 행한다.
몸이 저절로 붕 뜨는 기분이다.
지금 있는 이 공간, 이 시간대를 초월하는 듯한 희열감이 느껴진 순간-
‘이건!’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눈앞의 공간이 일순 암전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시야는-
“여긴···.”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던 벽 바로 앞.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말하자면 순간이동을 한 건가?’
그림자 보법.
곧, 자신의 그림자가 펼쳐지는 곳 이내에서 시공간을 넘어 이동하는 것!
그 기이한 현상을 몸소 체험하고 나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
팔 위로 돋아난 소름을 보며 멀뚱히 서 있는데 반가운 메시지가 떴다.
[‘그림자 보법’의 운용에 성공했습니다.]
[’그림자 보법’의 부대 효과가 해금됩니다.]
[숙련도가 1 오릅니다.]
그때 깨달았다.
이 그림자 보법은 위기의 순간에서 내 목숨을 구해줄, 최상의 방어 수단이라는 것을.
‘자객이 접근한다거나, 폭탄이나 위험 물체가 날아온다거나 할 때.’
그림자가 닿는 곳으로 순간 이동하면 그만 아니겠나!
강렬한 희열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고,
잔뜩 긴장되었던 온몸이 이완됨과 동시에-
쿵!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버렸다.
* * *
팰러스를 중심으로 하는 <왕국수호청년단>이 배정받은 기숙사 동관.
동관 1층 휴게실은 ‘팰러스단’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인 데다, 감당 안 되는 망나니들이 상주하다 보니 언제나 너저분했다.
하지만 팰러스를 비롯한 소수의 정예만이 드나들 수 있는 ‘간부실’은 사정이 달랐다.
“늘 그렇듯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구나.”
팰러스의 말에 우만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팰러스 님.”
팰러스를 발견한 브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클클, 팰러스 님 오시면 안 그래도 이걸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책상 뒤편에 앉아 있던 타릭이 안경알 너머의 두 눈을 음흉하게 빛내며 킬킬거렸다.
“됐다, 앉거라.”
간부실 한가운데에 자리한 고급스러운 안락의자.
자신의 지정석에 앉은 팰러스에게로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머니를 똑 닮은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
조형미를 자랑하는 이목구비에 완벽한 비율을 지닌 체격까지 공작부인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팰러스. 너는 나 대신 패왕의 길을 걸을 사람이다.’
리아나 공작부인은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팰러스에게 수없이 강조했다.
자신이 올라가지 못하는 정상에 올라 이 세상을 내려다보라고.
그리고 아홉 살 때였나.
팰러스가 기르던 개를 ‘재미 삼아’ 죽였을 때, 공작부인은 활짝 웃었다.
‘팰러스, 그건 대단한 재능이다.’
‘아무런 감정 없이 생명을 앗을 수 있는 덕분에, 너는 우위에 서게 될 것이야.’
‘그러니 하찮은 인간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남의 감정에 공감할 줄 모르는 팰러스를 그녀는 특별히 훈련시켰다.
사람의 표정을 어떻게 읽어내는지.
작은 제스처 하나로 어떻게 감정을 뒤흔들고, 어조의 변화로 동요를 이끌어내며,
종국에는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기억하렴, 팰러스.
사람들은 가식으로 점철된 달콤한 말에 진심을 내어주고, 진심이 없는 미소에 쉬이 충성을 맹세한단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지만 그녀의 간섭이 우스울 지경에 이른 오늘날에는,
팰러스는 그 모든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그 개가 시작이었던가.’
그가 걸어온 패왕의 길에는 유혈이 낭자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알 바가 아니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 것이 되지 않으면 부숴버리는 것이 정답이지.’
온 세상이 제 발 아래 있으며, 모두가 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 있었으니.
“우만, 바야르가 체포당했다고 했나?”
“네, 사전에 학장과 얘기가 돼 있던 모양이군요. 바야르 경이 설마 그런 빤히 보이는 덫에 제 발로 달려들 줄은 몰랐지만···.”
“아니, 바야르라면 능히 그럴 만하다.”
훔 바야르와 림 바야르.
그 능력에 비해 어머니가 과하게 싸고 도는 쌍둥이 형제.
‘그나마 형 쪽은 검술 실력만큼은 봐줄 만하지만.’
둘 다 두뇌가 없는 것처럼 구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형 바야르를 그의 경호원으로 붙여주었지만, 사실은 감시역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던 터.
도리어 팰러스 자신에게는 반가운 소식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재미있군.’
과거에 세자르는 말 한 마디로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팰러스. 이제 세자르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보렴, 너의 섣부른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하여 팰러스는 한 가지 시험을 해보았던 것이다.
충성스럽지만 우둔한 소년 ‘리암’을 자극해 세자르를 공격하게 한다면···.
‘세자르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바야르 형제마저 이 꼴로 만들다니.
‘물론 바야르 놈들이 목이 잘리든 감옥 안에서 썩든, 나완 상관없는 일.’
그는 그중 누구에게도 애정이나 집착 따윈 없었다. ‘자신의 사람’이라 한다면 여기 있는 세 명이 전부가 아닐까.
“하, 또 그놈의 세자르입니까. 당장 잡아다가 목을 꺾어버릴까요? 분부만 내리시면···.”
쇼맨십에 가까운 과잉 충성이 몸에 밴 ‘잠들게 하는 자’ 브렉.
“넌 재워놓고 죽일 거 아냐. 그러면 너무 쉽지. ···그 뽀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나? 크큭.”
악명만큼이나 그 본성도 괴랄하기 짝이 없는 ‘4대 원소를 다루는 자’ 타릭.
“···미친 놈들.”
이 중 유일하게 정상인이자 팰러스의 비서 역할을 하는 ‘벽을 통과하는 자’ 우만.
그는 이 세 명 중 유일하게 팰러스가 ‘신뢰하는’ 상대로, 절대적 충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애초 내가 아니었으면 살아날 수 없는 목숨이기도 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도 쉽게 배신할 수 있다. 하지만 우만만큼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팰러스는 확신했다.
게다가 ‘벽을 통과한다’는 무시무시한 이능.
그 확신과 신뢰가 아니었다면, 우만이 지닌 이능의 정체를 안 순간 놈을 바로 죽였을 거다.
저 가느다란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부러뜨렸을 거라고, 팰러스는 종종 생각했다.
“팰러스 님이 명하신 대로 세자르의 기숙사를 염탐하고 왔습니다. 덩치 큰 종자 하나에 호위무사 한 명. 집안일을 봐주는 사용인을 두 명 둔 것까지는 평범합니다만···.”
하지만 그러기엔, 우만은 너무나 훌륭한 정찰병이니까.
“이상하게도 실내로는 들어갈 수 없더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벽을 통과하는’ 제 능력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정확하진 않지만, 세자르의 식솔 중 한 명이 ‘무효화’ 같은 유의 이능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호오.”
생각에 잠긴 팰러스에게 우만은 ‘바야르 경 사건’ 때문에 이 이상 염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바야르 경이 보낸 감시역 용병 때문에 세자르가 경계 수준을 높였다며 말이다.
“그래. 염탐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세자르가 학생 모임 가입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나?”
팰러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이 형님의 모임에 들어와야지.”
간만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