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자에게 ‘스킬’이 있다고?
이윽고 연달아 나타난 메시지에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능자 칭호 ‘그림자 검객’ - 고유스킬 ‘그림자 보법’을 깨우쳤습니다.]
[상태창에 ‘이능자 스킬 리스트’가 추가됩니다.]
그림자··· 검객이라고?
거기에 이능자 스킬은 또 뭐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주군?”
“세자르, 왜 말이 없어?”
어느새 저희들끼리 통성명을 마친 듯한 디터와 발닉, 카렌이 나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당황스러웠으니까.
‘원작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었잖아!’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세자르 레핀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가 중간에 이능을 개화한다는 언급도 전혀 없었고 말이다.
‘···설마.’
『주인공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가 내 조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걸까?
말하자면 작가 ‘역4서’는 나를 리메이크판 소설의 주인공으로 낙점한 거고.
‘기존에도 이능자라는 설정은 있었으니.’
아예 새로운 설정을 만들기보다는 ‘세자르 레핀’을 이능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훨씬 편하겠지.
하지만 정말로 상상도 못했다.
‘세자르가 이능자가 되다니!’
강렬한 기대감에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뛰어대는 가운데, 나는 세 사람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냐.”
굳이 자초지종은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이능을 발현시켰음을 이들에게 딱히 숨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능은 신이 내려주는 재능이자 기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그것이 이 세계의 보통 사람들이 지닌 생각이다.
내가 이능을 발현시켰음을 알게 된다면 그 연유를 궁금해할 텐데.
‘도전과제 세 개를 동시에 달성해서 일타삼피 보상으로 받은 거야!’
···라고는 할 수 없잖은가.
무엇보다 이능이 있음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필히 교단에 가서 그 사실을 알리고 등록해야만 한다.
‘그러면 교단의 제지를 받게 되지.’
알레스 교단.
왕국이 믿는 유일신의 유일한 교단이며, 산하에 수많은 종파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에는 교권보다 왕권이 우세한 상황이지만, 백 년 전만 하더라도 교황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설정이라 했던가.’
어쨌거나 그쪽과 얽히는 골치 아픈 일만큼은 사양이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지.
“···그나저나, 너희는 서로 통성명 했나 봐? 이쪽은 돌로레스 후작가의 카렌이야.”
내 말에 발닉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허허, 진작에 인사드렸지요! 도련님은 왜 말씀도 안 해주셨습니까!”
“말을 안 하다니 뭘···.”
발닉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이런 미인 영애분과 친분을 쌓으셨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옆을 돌아보자 디터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카렌은 쑥스러운 듯 눈빛을 피한다.
“허허, 그럼 이만 수업 들어가시지요!”
“···그래.”
“카렌 아가씨, 우리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주군을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리긴 뭘 부탁드려?
황당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카렌이 방긋 웃으며 레이디 중의 레이디처럼 대답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미소 짓던 그녀는,
“늦겠다. 얼른 들어가자.”
디터와 발닉이 사라지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야.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뭐가.”
“···너 아까랑 왜 이리 다르냐?”
내 질문에 카렌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가 내숭 떠는 거 처음 봐?”
“하.”
픽 웃으며 강의실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따라갔다.
* * *
오늘의 수업은 여러 학부가 합동으로 듣는 대형 강의.
2시간짜리 강의의 쉬는 시간을 맞이해,
나는 숨은 이능자들을 물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뭐, 뭐야!”
“···흐악!”
“···!”
똘마니 1, 2, 3과 보리스, 리암.
‘팰러스 추종자’ 패거리들 앞에 가서 서자, 놈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개중 그나마 침착을 유지하며 묻는 리암에게, 나는 사면체 주사위를 내밀었다.
“던져봐라.”
“···.”
리암은 뭔가 흉계를 숨긴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순순히 받아들어 던졌다.
“1이네. 다음.”
“···지금 뭐한 건데?”
“나머지 똘마니들도 다 던져봐.”
“이, 이 자식이 누구더러 똘마니래!”
“···뭐?”
발끈하던 보리스는 내가 슥 돌아보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줘, 줘봐. 던져볼 테니.”
결과는 모두 1.
‘이놈들 중에 이능자가 없는 건 분명하군.’
“협조해줘서 고맙다. 그럼-”
“야, 뭐야. 끝까지 이유 안 알려줄 거야?”
귀찮게 구는 보리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려주면 니가 어쩌려고?”
“···아니, 그냥···.”
나는 아예 강의실 맨앞의 연단에 올라갔다.
“던져보고 싶은 사람?”
똘마니들에게 주사위 굴리게 하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나머지 학생들은,
줄까지 서가면서 차례로 사면체 굴리기에 협조했다.
“나는 1.”
“1 나왔는데?”
“1이네.”
“···1인데.”
“뭐가 좋은 건데?”
거의 백여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주사위를 굴리게 해본 바.
‘4는 한 명도 안 나왔네.’
이능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2나 3, 즉 ‘이능을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학생은 또한 없었다.
즉 전부 다 1이 나왔단 얘기다.
‘이능자 비율이 이렇게 낮았나.’
소설로 볼 땐 팰러스 옆에 이능자가 넘쳐나길래 개나 소나 이능자인 줄 알았지.
역시 좀 더 많은 학생들과 접촉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멀찍이 앉은 리암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어이, 리암.”
“···왜.”
“너 오늘 아침에 꽤 친절하더라?”
그 말에 리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보리스와 똘마니들이 다가오기 직전.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내일, <황금태양청년단>에 데려가줘.”
‘팰러스단’과 ‘노바스단’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학생 모임이지만, 드물게도 정치색이 없는 단체다.
리암 페킹튼이 주요 간부로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지.
“···.”
리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멀어졌다.
* * *
수업을 전부 마치고 돌아오자 디터와 발닉 그리고···.
귀여운 목마를 탄 농농이가 나를 반겼다.
[옹! 에이!]
목마가 앞뒤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농농이가 까르르 웃어댔다.
“어? 농농이 뭘 타고 있는 거야?”
“아, 그게···.”
디터가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발닉의 말을 들어보니 디터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거란다.
‘손재주가 상당하네.’
[앙! 앙앙! 에이!]
그러고 보니 장난감이라 할 만한 게 없었는데, 진짜 장난감이 생겨서 무척 신난 모양이다.
“요즘 농농이가 할 줄 아는 말이 늘었습니다, 주군.”
“말? 무슨 말?”
“에이, 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디터가 진짜 아빠라도 되는 듯,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말했다.
“농농이가 숫자나 글자만 보면 ‘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목마에도 숫자를 새겨주었죠.”
“어, 음, 그래···.”
그냥 하는 말 아닌가?
하지만 디터는 농농이가 이제 문자를 제법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벌써 글자를 알아보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요정이라 그런지 다른 아기들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은···.”
‘벌써’라고 말하기엔··· 농농이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았는걸.
하지만 팔불출처럼 농농이의 영특함을 자랑하는 디터를,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누가 농농이 아빠 아니랄까 봐.’
두 귀여운 녀석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데, 발닉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그··· 아침에 말입니다. 카렌 아가씨와 사이가 되게 좋아 보이시던데.”
뭐야. 그 얘기였어.
“그냥 친구니까 신경쓰지 마.”
“거참, 도련님은 그 잘생긴 얼굴을 뒀다가 어디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저한테 그런 얼굴이 있다면 엄청 잘 썼을 텐데···.”
그때.
디터가 순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근데 요즘 아가씨들은 좀 남자다운 타입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자식이 은근 콤플렉스를 건드리네.
현생의 김현우는 미남은 아니었어도 남자다운 타입이었던 반면.
세자르는 잘생기긴 했는데 뭐랄까, 선이 너무 곱단 말이다.
“정말로 여자친구 없으십니까?”
“여자는 개뿔. 친구도 없다.”
약골 겁쟁이 도련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카렌 외에는 먼저 다가오는 상대가 없으니 말이다.
친구가 없단 내 말에 둘이 벙찐 반응을 보였다.
“···네?”
“당연한 것 아니겠어? 팰러스가 내 존재를 고까워하는 걸 뻔히 아는데, 누가 먼저 나서서 가까워지려 하겠어. ···뭐, 카렌도 친구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하지만 말이야.”
귀족사회의 인맥은 거미줄처럼 촘촘이 얽혀 있다.
그것은 이제 겨우 십 대인 아카데미생들도 예외가 아니며, 이들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부모 대의 인간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수도 근방의 사교계는 레핀 공작부인이 꽉 잡고 있으니 그 아들인 팰러스를 누구도 거스르려 하지 않을 거고.’
무엇보다 수도 귀족 중 절반은 그들 모자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나머지 절반은 약점을 잡혔다는 식으로 원작에 서술되었으니 말이다.
“참 씁쓸한 일이군요.”
발닉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그게 이 동네 귀족판의 생리 아니겠어.”
“근데 도련님이야 그렇다 치고··· 카렌 아가씨는 왜일까요?”
그러게. 카렌은 왜 친구가 없을까?
나도 내심 그게 궁금했던 터다.
“너무 예뻐서 그런가?”
발닉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도 카렌이 단연코 눈에 띈다며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군계일학이시지요, 군계일학!”
“글쎄, 그것보다는···.”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하던 디터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과 어딘가 좀 달라서이기 때문 아닐까요?”
“다르다고?”
“네. 저도 귀족 영애들을 자주 뵌 건 아니지만, 말투나 서 있는 자세라고 해야 할까···.”
디터는 카렌이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 귀족가 여식들과는 묘하게 다르다고 설명했다.
“다른 귀족 영애들은 그런 걸 은연 중에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하긴 귀족가 자제들, 그중에서도 특히 여식들은 예절수업을 아주 엄격하게 받는다 들었다.
고기를 써는 행동 하나에서도 ‘태생의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말이지.
나야 현대인이니까 그런 걸 전혀 못 느꼈지만··· 이라고 생각하던 순간.
카렌의 상태창 내용이 기억났다.
- 비고 : 돌로레스 후작가와는 별 친분이 없음.
···후작가의 딸인데, 후작가와 별 친분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구절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순간.
“그리고 도련님. 지시하신 대로 개인 수련실을 정리해놨습니다.”
발닉은 곧바로 나를 개인 수련실로 안내했다.
* * *
“여기입니다. 그럼 편하게 수련하고 나오시지요.”
발닉이 나간 뒤.
나는 내게 배정된 ‘개인 수련실’을 뿌듯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훌륭한데.’
손바닥만 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수련실은 꽤 널찍했다.
환기구 역할을 하는 창문은 크기가 작고 벽 위쪽에 달려 있다.
‘창문으로 누가 훔쳐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군.’
안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말이다.
나는 곧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능을 각성한 이후로 확인하고 싶어서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하던지.
“역시.”
원래는 없던 ‘이능자 스킬 리스트’라는 메뉴가 새로이 생겨났다.
해당 항목을 확인하자.
『이능자 ‘그림자 검객’ 스킬 리스트
- ‘그림자 보법’ (숙련도 lv. 0)
- 설명 :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보법.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 지속시간 : 5초
- 쿨타임 : 2시간
- 부대효과 :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지속시간은 증가하고 쿨타임은 감소합니다.)』
그림자 보법이라니, 이름만 봐서는 무협지에 나올 법한 스킬명이다.
그 아래에는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새로운 스킬이 해금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헌데 스킬 리스트가 있고, 새로운 스킬이 해금된다는 건, 한 명의 이능자가 다양한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의미인가?
‘원작에선 이렇지 않았는데.’
이능자들은 단 한 개의 능력만을 지녔다.
‘벽을 통과하는 자’는 벽만 통과하고, ‘잠들게 하는 자’는 잠재우는 것이 능력의 전부라는 얘기.
그런데 이게 스킬의 개념이었다니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왕 능력을 받았으니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이제는 규격 외의 능력, ‘이능’을 시험해볼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