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5화 (35/176)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우는 법

다음 날 아침.

결전의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바야르 교관, 아니 바야르 경이 ‘그 세자르’에게 결투를 신청했대!”

검술 수업을 듣기 위해 향한 연무장에는, 이미 결투 소식을 듣고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있었으니.

그리고 그 인파의 한가운데,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온 게 눈에 보이는군.’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결투에 대비한 차림.

허리에는 긴 검을 찼고,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넘쳐흐르는 림 바야르였다.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세자르 군, 아니 이제는 세자르 님이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

“세자르 님께 이 림 바야르, 기사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천천히 놈의 앞에 가서 섰다.

최근 세자르의 키가 부쩍 컸다고는 하지만, 바야르 놈과 비교하면 피지컬의 차이가 상당하다.

그 사실을 의식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구경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응 또한 각양각색이다.

“완전 대박. 세자르 놈이 탈탈 털릴 거 아냐!”

“근데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냐? 아무리 사임했다 해도 전 교관이 학생한테 결투를···.”

“뭐 어때, 요즘 저 자식 기세등등한 게 눈꼴시렸는데.”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냐? 결투하다가 심각한 부상이라도 입으면···.”

절반은 내가 바야르에게 털리길 기대하는 모양이고.

절반은 교관이 학생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분위기.

‘바야르 본인은 내게 공개적인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사람들 많은 데서 일을 벌인 듯한데···.’

그때.

연무장까지 나를 호위하고 온 발닉이 조심스레 귓가에 속삭였다.

“도련님, 혹시··· 곤란한 상황을 염려하신다면 구경꾼들을 쫓아버릴까요?”

제 딴에는 내가 지는 모습을 보이길 꺼려 할까 봐 신경써준 듯했지만.

나는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니.”

“···네?”

“가능하면 더 모아봐, 발닉.”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운 법.

게다가···.

‘이 많은 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면?’

두고 봐라, 바야르.

제 꾀에 제가 빠지는 꼴이 뭔지를 보여줄 테니.

주먹을 꽉 쥐며 놈을 향해 한 발 다가가려던 순간.

“응해서는 안 돼.”

나를 만류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르 네가 아무리 변칙적인 검술을 구사한다 해도, 바야르는 이길 수 없어.”

그쪽을 돌아보자 의외의 인물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리암?”

리암은 멋쩍은 기색으로 눈을 피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형님들의 검을 봐와서 알아. 바야르가 이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있는 건 우연이 아니야.”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길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라.”

“이길 생각이··· 없다고?”

“형님이 어떻게 하는지 잘 보라고.”

의아해하는 리암에게 씩 웃어 보인 후,

나는 두어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바야르 놈과, 놈과 나를 에워싸듯 서 있는 구경꾼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진다.

“일단 바야르 경. 경의 요청에 대답하기에 앞서···.”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게 결투를 신청하는 이유가 뭔지 듣고 싶군.”

그 말에 림 바야르가 미간을 험악하게 구겼다.

“하, 지금 몰라서 묻는 겁니까! 충성스러운 기사인 내 동생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게도 누명을 씌우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군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야르 경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수군거림이 커져갔지만, 나는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허, 누명이라. ···그대의 동생 훔 바야르 경이 정말로 충성스러운 기사라고 생각하나?”

바야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 내 말을 비꼬는 겁니-”

“충성스러운 기사가 주군을 향해 독사를 푸는 짓을 하는가?”

그 나직하지만 단호한 말에 사방에서 경악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둘째. 내가 그대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바야르가 울그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되받아쳤다.

“학장님께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명예를 중시하는 내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내 방에 자객을 보낸 것까지 거짓으로 치부하려나 보지?”

“자, 자객이라니!”

물론 자객은 아니었지만, MSG 한 방울 정도 쳐주는 건 나쁘지 않지.

‘자객’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등장하자,

구경하던 학생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건.”

나는 바야르가 반박에 나서기에 앞서, 품에 간직해온 서류부터 꺼내 보였다.

“바야르 경이 용병을 고용해 내 기숙사로 잠입시킨 사실을 입증하는 계약서다.”

“···!”

“ ···경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더러 서명과 가문의 인장까지 남아 있지.”

헉.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에서 결국 경악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것 아냐?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학생에게 자객을···.”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니까, 눈빛도 쌔하니···.”

“완전 소름 끼쳐!”

여론이 내 쪽에 유리해지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하려는 바야르를 마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 내가 말한 것 중 거짓이 하나라도 있나?”

“···.”

“이쯤 되면 누가 명예를 훼손당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만!”

바야르가 시뻘개진 얼굴로 내 말을 잘랐다.

허리에 찬 검을 빼들자, 스릉! 하는 금속음이 울린다.

“검을 뽑아라, 세자르!”

“···.”

“네가 진정한 사내라면, 기사라면!”

사내의 명예.

기사의 자긍심.

“더는 세 치 혀로 왈가왈부하지 말고 검을 들란 말이다!”

이 나라에서 지나칠 정도로 신성시되는 그 두 가지를 들먹이자, 방금 전만 해도 시장통 같던 분위기가 돌연 숙연해졌다.

일종의 비장함까지 흐르던 바로 그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바야르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얼른 침착을 되찾고 말을 받았다.

“결투에 응하러 나온 것 아니었나! 그러니 잡담은 그 정도 하고-”

“아닌데?”

“뭐가··· 아니라는 거냐?”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나려는 바야르에게, 나는 미소까지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결투에 응하러 나온 게 아니라고.”

“그게··· 무슨. 그럼 이 자리에는 왜···.”

“경이 내게 초청장을 보냈잖아?”

나는 품에서 결투 초청장을 꺼내 보였다.

“명색이 초청을 받았는데 이 자리엔 나와줘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결투를 청했다고, 그걸 내가 꼭 받아들여야 하는 법 같은 건 없잖아?”

물론 ‘사내의 명예’를 건 결투에 응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걸어오는 결투를 피해 달아나는 순간, 상종도 하지 못할 겁쟁이 취급을 받게 되니까.

하지만.

고정관념은 깨라고 존재하는 것 아닌가.

바야르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뭐, 뭐라고?!!”

그래.

저렇게 느낌표가 물음표와 함께 나와줘야지.

이제 놈의 얼굴은 저 옆나라 공포만화에 나올 법한 경악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당황하다 못해 충격을 받은 것은-

“바, 방금 뭐라고 했어?”

“결투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완전 반전이네.”

나와 바야르를 둘러싼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어깨만 으쓱하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질 게 뻔한 싸움에 왜 응해야 하는데?’

도전과제 중 이런 게 있지 않았나.

-나보다 강한 이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나요?

그걸 보자마자 나는 ‘나보다 강한 이’가 ‘림 바야르’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놈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궁리했지.’

하지만 지난주 검술 수업 당시.

바야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손수 대련을 펼쳐 보였다.

페널티를 몇 개씩 부여하고 시작한 대련인데도···.

‘엄청난걸.’

바야르는 그러한 페널티가 우습다는 듯 아주 손쉽게 이겨버렸으니.

그 대련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살짝 절망하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 숙면을 취고 일어나자 번뜩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아닌가.

‘콜럼버스의 달걀.’

동글동글한 모양 때문에 좀처럼 세워지지 않는 달걀.

이것을 콜럼버스는 밑부분을 살짝 깨뜨려서 세웠다고 하지.

‘물론 실제로는 콜럼버스가 아니라 어떤 피렌체 건축가의 일화라고 하지만.’

이처럼 누구나 해낼 수 있지만, 쉬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콜럼버스의 달걀이라 부른다.

(알렉산더 대왕이 잘라낸 것으로 유명한, 자매품 ‘고르디우스의 매듭’도 있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초청장’을 받고 그 자리에 나갔으니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은 아니되,

‘무모한 결투는 당당히 거절한다!’

두 눈을 껌벅대며 현실 파악을 하고 있는 바야르와,

주변을 둘러싼 학생들을 한 차례 돌아보며 말했다.

“왕국 최고라 불리는 이 왕립 아카데미의 최우수 검술교관이자 실력자 중의 실력자로 불리는 그대가···.”

나는 양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설마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열네살 소년에게 진심으로 달려들 생각이었나?”

“어···.”

“아직 한창 자라는 중인, 하지만 그래봤자···.”

나는 바야르의 머리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작으며, 덩치 또한 아름드리 나무와 보릿단 정도로 차이나는 상대에게···.”

사실 그 정도로 차이 나지는 않지만, 이런 식의 설전에선 어느 정도 과장하는 편이 좋다.

“전력 승부를 걸 생각은, 설마 아니었겠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묻자, 바야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어버버거렸다.

“자, 잠깐만, 그렇다기보다는-”

“그대가 아까 기사의 자긍심을 운운했던가?”

하지만.

나는 그에게 변호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을 잘랐다.

기껏 잡은 발언의 주도권을 넘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바야르 경이 말하는 ‘기사의 자긍심’이란,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불리한 상대를 완력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하나 보지?”

그 순간.

우우우-

관중이 야유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바야르를 향해.

“물러나라, 바야르!”

“보기 흉하다, 바야르!”

“···어린 학생을 상대로···.”

“자객까지 보낸 주제에 어딜!”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소와 우롱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확신했다.

중립의 입장으로 지켜보던 여론이 이제 내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음을.

그리고 그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림 바야르 본인이 가장 먼저 느꼈을 터.

“···크으.”

그렇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던 그는···.

“으아아아!”

돌연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젠장.’

나는 뒤로 재빨리 물러서며 허리춤에 찬 아다만티움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섣불리 빼서는 안 된다. 좀 더 기다려야 한다.

“헉, 바야르가 그냥 달려드려나 봐!”

“어떡해, 누가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촹!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바야르가 검을 빼든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바야르 경!”

누군가의 벽력 같은 호통 소리에, 놈이 움직임을 멈췄다.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온 학장의 목소리였다.

‘···저 노인네는 시간 맞춰 오라고 했더니 왜 이제야 오는 거야.’

학장이 나와 바야르 사이를 가로막고 서자,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었다.

장황한 변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었으니 망정이니, 안 그러면 까딱 없이 칼 맞고 저 세상 갈 뻔했다.

“하, 학장님! 그게, 그게 아닙니다! 제발, 제 얘기 좀···.”

“얘기는 경비대에 가서 하시지요.”

그 순간.

학장의 뒤에 서 있던 자가 나섰다.

“수도경비대의 크라우츠 대원입니다. 바야르 가문의 림, 그대를 귀족 자제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합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바야르를, 경비대원은 사정없이 질질 끌고 갔다.

학생들의 쏟아지는 시선 아래서 치욕적으로 퇴장하는 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이 다행히 계획대로 진행되었군.’

바야르 놈은 내가 자신과 동생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니 이번 결투를 피해봤자, 내 목숨을 앗아갈 때까지 이런 짓거리를 계속할 거였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위협을 두려워하느니···.

‘이렇게 한 번에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베스트니까.’

바야르가 이렇게 완벽하게 덫에 걸려줄 줄은 나도 몰랐지만 말이다.

내게 머물러 있던 구경꾼들의 시선이 차츰 옅어졌다.

주변을 둘러싼 인파가 하나 둘 해산하는 가운데.

“주군!”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충실한 가신 디터와 발닉이 제일 먼저 달려왔고.

“···야, 완전 조마조마했던 거 알지?”

친구 없는 나의 유일한 친구인 카렌이 팔짱을 낀 채 걸어왔으며.

“···.”

그런 우리를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던 리암은 말없이 등을 돌리고 멀어졌다.

나 또한 두근거리던 가슴을 추스르는데.

눈앞에 메시지가 우다다다 나타났다.

[도전과제 ‘구사일생’ 달성! - 검술대련을 했다간 까딱 죽을 뻔했습니다.]

[도전과제 ‘니가 이래도 안 물러서고 배겨’ 달성! - 내 목숨을 위협하는 바야르 놈을 치욕의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다음 거는?

나보다 강한 바야르 놈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잖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조금 후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메시지가 하나 더 나타났다.

[도전과제 ‘미래의 설전 꿈나무’ 달성! - 나보다 강한 바야르 놈을 말빨로 이겼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이렇게 세 개를 한 번에 달성하면.

[특수과제 ‘일타삼피’ 달성!!! - 특수보상이 해금됩니다.]

그래. 일타삼피다.

지난번에는 던전 초대장을 줬는데 이번엔 뭘 주려나.

보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는데.

예상치 않았던 메시지가 나왔다.

[보상으로 ‘세자르의 숨겨진 이능’이 개화됩니다.]

뭐라고?

세자르의··· 이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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