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4화 (34/176)

누구에게 검술을 사사했냐고?

“흑의 기사라고?”

내가 꺼낸 말에 카렌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남장을 한 모습도 예쁜 걸 보니 역시 미인은 미인이구나 싶다.

“레핀 공작저에서 집사장으로 근무하는 카를이라는 사내가 있는데···.”

과거 그 카를과 ‘흑의 기사’가 결투를 했었고.

이 결투로 카를은 큰 부상을 입어 검의 길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용병들 사이에도 꽤 유명한 일화라고 하더군.”

당시 왕실친위대였다면 지금은 어디선가 한 자락 하는 인물이 돼 있을 수도 있다.

‘검술 실력과 권력을 한데 갖춘 후견인을 찾아내는 것만큼 내게 도움이 되는 일도 없겠지.’

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적더니, 이내 말했다.

“그 정도면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의뢰는 이게 끝?”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과 함께 목에 건 목걸이를 풀어 카렌에게 내밀었다.

황금색 로켓 목걸이를 열어보이자, 오각형의 한가운데를 화살이 꿰뚫고 있는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어느 가문의 문양인지 알아봐줬으면 좋겠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이건 누구 거야?”

카렌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쩌면 지금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와의 관계가 확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렌을 가신으로 거둬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다.’

기왕 그녀와 가까워지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좀 더 솔직하게 대답해도 상관없겠지.

“내 친어머니.”

“···.”

카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하며 힘주어 말했다.

“내 친모의 정체를 밝힐, 유일한 단서이기도 하지.”

카렌은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개인적인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 방을 나섰다.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네.’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쌍둥이 오빠 렌’이라는 가상인물로 활약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아카데미라든가 귀족 사회에선 여성들이 어느 정도 대우 받고 있지만···.

‘너도 알겠지만, 이 뒷골목 세계에선 여자로 살아남는 게 쉽지 않거든.’

거대 길드의 후계자에게도 그런 고충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카렌은 다른 의뢰보다 내 의뢰를 우선시하겠다고 약속한 터였으니.

“임리 자작과 거래를 잘 마쳤습니다.”

문 앞에서는 발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 잘됐네.”

당연히 잘할 거라 생각했던 터라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발닉이 음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흐흐, 평균 시세보다 훨씬 싸게 거래했지요.”

“···뭐?”

보아하니 칭찬을 바라는 표정인데.

발닉이 내민 계약서를 보니 ‘평균보다 싼’ 정도가 아니라 아주 학을 뗄 정도로 싸게 거래했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이 정도면 이 발닉도 도련님의 가신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 아닙니까?”

저 잘했죠, 라는 표정을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그래. 아주··· 훌륭하네.”

“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발닉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콧노래를 불렀지만.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반년 뒤에 그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면···.’

그때 가서 임리 자작이 나를 얼마나 욕할지 상상이 안 되는걸.

‘상종도 못할 지독한 놈’으로 악명을 떨치는 미래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이후 며칠간, 아카데미는 한 가지 소식으로 시끌시끌했다.

“그거 들었어? 바야르 교관이 사임했대!”

“헐, 대박. 대체 왜?”

1학년 검술 수업을 담당하는 림 바야르 경이 스스로 교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에 학생들은 깜짝 놀란 터였다.

‘나야 예상했던 바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잘린 게 아닌가 싶지만, 외부적 이미지도 있고 하니 ‘사임’의 형태로 진행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필시···.

“···곧 놈이 결투를 신청해오겠군.”

나는 다가올 결전의 순간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업을 마친 뒤, 기숙사 앞에 자리한 체력단련장으로 향하자.

투웅! 퉁!

단련장에서는 익숙한 뒷모습들이 허수아비를 상대로 발을 날리고 있었다.

“도련님!”

“어, 주군 오셨습니까!”

땀투성이로 뒤돌아본 것은 디터와 발닉.

“요즘 디터가 아주 열심입니다! 검술 실력도 부쩍 늘었고 말이지요.”

그 말마따나 두 사람은 최근 훈련 시간을 부쩍 늘린 터였다.

그 둘의 탄탄하다 못해 돌덩이 같은 몸을 보자 나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훈련하지.”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다양한 훈련을 했다.

일단은 단련장 안을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하고.

“···도련님, 이쯤 하고 들어가시는 게-”

“무슨 소리야, 이제 슬슬 몸이 풀리고 있는데.”

상체와 하체를 집중 단련하는 트레이닝과 근지구력을 기르는 운동까지 마치고 나자.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마지막으로 대련까지 하고 나자, 전신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후우, 후우···. 하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호흡을 다스리는데.

마찬가지로 옆에 드러누운 디터가 한마디했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훈련하시는 것 아닐까요? 점점 훈련량을 늘리시는 건 좋긴 하지만···.”

“무리라니, 무슨 소리.”

그 말대로 나는 최근 훈련량을 꽤 늘렸다.

하지만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고, 내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서 계획한 훈련 스케줄에 따르고 있다.

“공작저에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잖아?”

그곳에선 일단 영양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

빵쪼가리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잘못했다간 골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로는 일국의 왕이 부럽지 않은 식사를 제공받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이렇다.

『세자르 레핀 (14세, 남, 170cm, 59kg)』

체중 ■■■■□|□□□□□ (표준이하)

근육량 ■■■■■|■□□□□ (표준)

체지방 ■■■■□|□□□□□ (표준이하)』

키가 1센티미터 컸으며, 무엇보다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나 늘었다는 게 고무적이다.

체중과 체지방도 표준에 가까워졌으니 이젠 근육을 늘릴 차례라는 거지.

“게다가 이놈의 아카데미는 널널해빠졌다고. 일주일에 수업이 열 시간뿐인 게 말이 돼?”

“···그럼 나머지 시간에 다른 학생들은 뭘 합니까?”

“보통은 ‘학생 모임’에 참여하지.”

“학생 모임이요?”

나는 아직 어느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이능자들을 탐색하려면 발을 좀 넓혀봐야겠지.

“말이 학생 간의 모임이지, 사실은 미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발판이라고 할 수 있어.”

아카데미 내의 학생모임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단체다.

첫째. ‘팰러스단’이라는 별칭이라 불리는 <왕국수호청년단>.

“여기는 특정한 주제 같은 건 없는, 오로지 ‘팰러스 공자님’을 추종하는 놈들이 모인 단체야. 그런 주제에 영향력도, 규모도 제일 큰 곳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

“이름이 거창하네요.”

“왕국을 수호하긴 개뿔이,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원작에서는 이 팰러스단이 주축이 되어 현 국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둘째는 ‘노바스단’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진실의 청년단>.

“여기도 팰러스단처럼 그냥 정치 단체야. 차이가 있다면 저쪽은 팰러스를 중심으로 하는 대신, 이쪽은 노바스 공작가의 후계자가 중심이라고 할까.”

“노바스 공작가라면··· 모후이신 안느 전하의 가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노바스 공작가.

제1공작가라 불리는 레핀 가문과 맞먹는 위세를 자랑하는 곳이다.

레핀 가문이 왕실의 친가라면, 노바스 가문은 외가라고 볼 수 있으니까.

‘아홉 살짜리 국왕을 대신해 섭정을 펼치는 것이 그의 어머니 안느 드 노바스라고 했나.’

그러니 그 두 가문의 사이가 물과 기름 같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두 곳 말고 다른 곳에 가입하는 게 좋을 듯한데, 문제는 학생모임에 들어가려면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거다.

‘친구가 없어···.’

그나마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카렌뿐인데, 그 카렌마저도 친구가 없다 하니···.

“···주군.”

생각에 잠겨 있던 나의 옷자락을 디터가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왜? 라는 얼굴로 돌아보자 디터가 눈짓으로 어느 곳을 가리킨다.

‘저건···.’

체력단련장 한구석에서 조용히 훈련하는 듯 하나, 눈에 띄게 서성이며 이쪽을 쳐다보는 소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리암이었다.

“그··· 주군과 검술 대련했던 그분 맞나요?”

디터의 물음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놈이 요즘 자주 이쪽을 쳐다보던데.’

딱히 이곳에서만이 아니다.

검술 대련에서 탈탈 털어준 이후, 놈은 집요할 정도로 내 근처를 오가고 있다.

‘게다가 놈의 기숙사는 이 북관도 아니란 말이지.’

아무래도 나를 노리고 이쪽에서 서성대는 게 분명한데.

디터가 어쩔까요, 라는 눈빛을 보내던 와중,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지.”

디터가 말릴 새도 없이, 나는 곧바로 리암 앞에 다가가 섰다.

멍하니 앉아 있던 리암은 갑작스러운 눈을 크게 떴다.

“어이.”

“···.”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여전히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리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명히 하고. ···아니면 형님이 날 감시하라고 시켰나?”

“···그건 아냐!”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그것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얼굴이 아닌가.

제 앞에 털썩 주저앉자, 리암이 몸을 움찔했다.

“딱 5초 준다. 그 안에 할 말 있음 하고, 아님 다시는 따라다니지 마.”

“···.”

“감시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리암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팰러스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님 이놈도 나한테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은 건가?

‘학생 간의 결투는 금기시되지만···.’

비밀리에 목숨 걸고 싸우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니 말이다.

그러나 리암은 완전히 예상 밖의 얘기를 꺼냈다.

“···너, 누구한테 검술을 배웠지?”

“뭐?”

리암은 주먹을 꽉 쥐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나는 기어다닐 때부터 검을 쥐고 놀았어.”

아. 검술 명가의 자제다 이 말인가.

“가문의 천재라 불리는 형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왔다. 그에 걸맞은 성취 역시 이뤄왔고. 그런데···.”

고개를 든 리암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너의 그런 검은 난생 처음이었다.”

“···.”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발놀림하며,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전술이며···.”

리암은 한층 더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체 누구에게 검술을 사사한 거지? 어디의 어떤 유파가 그런 검법을 구사하는 거냐?”

‘하, 뭐야.’

나름 긴장했더니, 검술 덕후의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이건가.

저 멀찍이서 경계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디터에게 나는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 너.”

“···?”

“나랑 거래할래?”

“거래라니, 무슨···.”

“내가 구사하는 검법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대신-”

영문을 몰라하는 리암에게 씩 웃어 보였다.

“네가 속해 있는 학생 모임들 있잖아. 거기에 나 좀 추천해줘.”

···이능자를 찾아내려면 인맥 풀부터 넓혀야지 않겠어?

* * *

빡빡한 훈련 덕분인지 밤에 꿀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발닉이 문 앞에 놓인 편지를 가지고 왔다.

“도련님, 이런 게 왔는데요.”

편지봉투 안에 든 것은 바야르 놈이 보낸 ‘결투 초청장’이었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 공께 사내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합니다.

(중략)

결투 일시 : 내일 오전 9시, 아카데미 연무장

결투방식 : 검

바야르 가문의 림 드림』

결투의 규칙, 입회인 등이 자세히 적힌 초청장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데 발닉이 내 손에 들린 초청장을 발견했다.

“헌데 그건···.”

“아, 이거.”

‘결투 초청장’을 본 디터와 발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사람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결투장에 나가서는 안 된다며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이렇게 초청장까지 보내왔는데, 나가지 않으면 실례가 아니겠어?”

어차피 저 시간은 검술 수업이라 나가긴 해야 하니 피할 수는 없다.

이 동네에선 결투 신청에 무조건 응하는 게 일종의 국룰이기도 하고.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삼총사와 각각 한 번씩 결투하게 된 데는 이런 연유가 있지.’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 나간다.”

다만-

안전, 아니 반전의 장치를 마련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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