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야말로 추리의 정석
그로부터 약 5분 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얼굴에 피멍이 잔뜩 든 사내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물론 아이 정서에는 안 좋은 광경이니, 농농이는 보모에게 맡긴 채 놈을 서재로 끌고 온 터였다.
“저, 전혀 아기님의 목숨을 위협하거나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발닉은 아기침대 아래의 빈 공간에 숨어 있던 사내를 기어코 찾아냈다.
전문적이고도 진심 어린 주먹다짐에 사내는 ‘길드 의뢰를 받아 잠입한 용병’이라고 정체를 밝혔다.
의뢰의 목표물은 당연한 얘기이지만 나, 세자르 레핀이며.
“누가 의뢰한 거지?”
“모, 모릅니다! 저는 아무것도···.”
사내가 열심히 발뺌하는데,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디터였다.
“어딜 감히 우리 주군을···.”
“···디터, 너 힘 조절은 했지?”
“그럼요, 주군.”
디터가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때렸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사내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긴 했지만- 의식을 잃지 않은 채 순순히 불었다.
“아카데미의 검술교관, 림 바야르 경입니다.”
“···.”
“주군, 그자를 잡아서 족치시지요!”
“당장 그 자식의 멱을 따오겠습니다!”
몹시 흥분한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의뢰의 내용은?”
“다, 당신을 퇴학시킬 명분을 찾아내라고···.”
즉, 퇴학감이 될 만한 꼬투리를 잡거나 없으면 만들어보라는 의뢰였겠지.
“어째서냐? 도련님을 퇴학시키다니 어째서···.”
그것까진 모르겠다는 사내의 말에 발닉은 금방이라도 한 대 더 칠 기세였지만,
내가 나서서 말렸다.
“아니, 굳이 그럴 것 없다.”
“하지만 도련님,”
“어째서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으니까.”
나는 이제 바닥에 고개를 조아린 채 달달 떠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바야르가 내게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서겠지.”
“···결투 말씀이십니까?”
“아카데미 교관이 학생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거든.”
마음 같아서는 나를 언제라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더는 이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라면, 마음 가는 대로 결투를 신청해도 무리가 없으니까 말이지.”
귀족사회 내의 결투 열풍은 어마어마하다.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결투를 하다가 크게 다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할 정도다.
발닉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공작저의 훔 바야르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그 원망의 화살을 도련님께 돌리는 셈이군요.”
며칠 전엔가 발닉은 공작저의 소식을 전해준 바가 있다.
‘암살 혐의로 옥에 갇혀 있던 훔 바야르가 풀려났습니다. 원래는 처형당할 예정이었지만, 공작부인이 공작각하의 발치에 매달려 애원한 끝에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 하더군요.’
추방형.
국경 너머 온갖 맹수가 들끓는 땅에 맨몸으로 쫓겨나는 형벌이다.
사형보단 나을지 모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참혹한 형벌임은 마찬가지.
‘그나저나 공작부인과 바야르 경은 대체 무슨 사이일까.’
공작에게 매달려 감형을 요청할 정도의 관계라니.
나는 그 둘의 관계에 관한 의문을 머리 한 켠에 미뤄둔 채, 눈앞의 문제에 집중했다.
‘나 역시 림 바야르와는 언제고 간에 결판을 내야 한다.’
그자에게 나는 동생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 철천지 원수.
그러니 이렇게 용병까지 고용해 나를 감시하려 한 거다.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 있자, 용병은 목숨의 위협이라도 느낀 건지 묻지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그, 길드엔 저 같은 놈이 한둘이 아닙니다.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하는-”
“돈만 주면 뭐든 한다고 했나?”
“옙, 그, 그런데 왜···.”
나는 굳은 표정을 풀고는 용병을 일으켜 앉혔다.
“자네 이름이 뭐지?”
“···이, 이름요?”
“아니, 도련님 이런 쓰레기 따위에게···.”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용병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 * *
‘세자르 레핀’의 치부를 캐내려 잠입했던 용병은 ‘의뢰’라는 말에 태도가 돌변했다.
특히 ‘바야르가 준다는 의뢰비의 두 배’를 준다고 하자 급공손해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용병에게는 정해진 주인이 없습니다. 돈 주시는 분이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놈 역시 발닉 못지않게 훌륭한 자본주의의 첨병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놈을 데리고 학장실로 향했고, 용병은 사전에 입을 맞춘 대로 증언을 했다.
···림 바야르가 어떤 의뢰를 했는지, 그가 보낸 밀서와 인장을 찍은 계약서를 증거 삼아서 말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것을 본 학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으니.
잠시 후 학장실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발닉이 나를 맞이했다.
“도련님, 말씀하신 대로 기숙사의 경호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학생들이 사는 기숙사에 일개 용병이 숨어들었다는 충격적인 사건.
아카데미 행정실에서는 이 같은 ‘위협’에 즉각적이고도 진지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경비인력을 늘리고, 각종 잠금장치를 비롯한 안전수단을 확충한다고 하더군요.”
“그거 다행이네.”
“헌데 도련님, 이렇게 놈을 도발해도 괜찮은 걸까요? 설마 결투를 정말 신청해오기라도 하면···.”
발닉의 표정이 어두웠다.
림 바야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만큼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일부러 도발한 거야. 너무 걱정하진 마, 발닉. ···다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말이야.”
나는 최근에 갱신된 도전과제 목록을 떠올렸다.
『도전과제 목록
-검술대련 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나요?
-내 목숨을 위협하는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렸나요?
-믿을 만한 전문가에게 '정보 탐색' 의뢰를 맡겼나요?
-미지의 후견인에 관한 단서를 찾았나요?
-나보다 강한 이를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나요?』
맨 윗줄의 도전과제는 ‘검술수업’이라는 표현이 ‘검술대련’으로 변경된 터였고.
‘내 목숨을 위협하는 누군가’.
‘나보다 강한 이’.
과제 두 개에 나온 이 표현이, 아무래도 동일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짚이는 바가 있다.’
게다가 이 용병에게 진실을 캐낸 뒤, 도전과제 하나를 달성하며 보상을 받은 바였다.
[도전과제 ‘물고문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달성! - 나를 감시하는 누군가를 족쳐 배후를 불게 했습니다.]
[보상 ‘가면’을 수령했습니다.]
얼굴 전체가 아닌, 눈만 가리는 모양의 파란색 가면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지.
‘용도를 좀 자세히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무도회에서나 쓸 법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받을 때만 해도, 이런 걸 어디에 쓰라고 싶었지만···.
“발닉. 슬슬 외출 준비를 해볼까?”
“네? 외출 준비라 하심은···.”
사교클럽 피닉스.
매일 수요일 저녁, 그곳에서는 가면을 쓰고 참석하는 ‘가장 무도회’가 열린다 한다.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사업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신종 비즈니스 인맥 모임이란다.
그때서야 나는 과제 보상으로 받은 ‘가면’의 용도를 깨달았으니.
“피닉스 사교클럽에 가보자고.”
땅도 사고, 인재도 얻고, 정보 의뢰도 하고.
세 마리 토끼를 잡으러 갈 시간이다.
* * *
“나리들,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우리를 음습한 뒷골목에 내려놓았다.
해가 저문 시각임에도 거리는 온갖 불빛으로 훤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뒷골목의 풍경인가.’
칼 좀 쓴다는 낭인들, 어리숙한 행인의 주머니를 털 준비가 된 소매치기들, 사내의 음심을 자극하는 차림으로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들···.
이국적이면서도 낯선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니 발닉이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눈 뜨고 코 베어가는 동네입니다. 얼른 목적지로 향하시지요.”
사교클럽 피닉스는 그 뒷골목 한가운데 자리해 있었다.
여느 가정집처럼 생긴 건물의 문을 두드리자, 보초로 보이는 험상궂은 사내가 초대장을 요구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보초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자, 널따란 홀 안이 온통 시끌벅적했다.
가면을 쓴 채 화려한 차림을 한 사람들.
한 손에는 술잔을, 한 손에는 사업용 서류를 든 모습이 어딘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런 식의 사업 모임에 익숙해 보이는군.’
발닉 또한 사전에 정해놓은 신호를 이용해 임리 자작과 접촉하기로 한 터였으니.
“그럼 도련님, 저는 임무를 수행하고 오겠습니다.”
“잘 부탁하지.”
나는 그와 떨어져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늘 나의 목표는 ‘렌 돌로레스’에게 의뢰를 제안하는 것.
‘어디 있을까.’
어릿광대 모자, 두 눈만 가려주는 가면, 덩치를 커 보이게 하는 망토 차림으로 홀 안을 배회하자.
저 안쪽에 기다랗게 줄을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잠시만요.”
뭐 하는 줄이냐고 묻자 ‘검은손’의 후계자에게 의뢰를 하는 대기줄이라고.
‘유레카!’
도적길드 ‘검은손’의 후계자라면 내가 찾는 렌 돌로레스가 아닌가.
나는 줄 맨 끝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 바로 앞에는 뒤통수를 반질반질하게 깎은 사내가 서 있었는데, 보아하니 탁발 수도사 같다.
‘소설 세계관 내에 탁발 수도사가 있는 교단은 트리니다드 수도회뿐인데.’
트리니다드 수도회.
원작에선 팰러스의 간계에 빠져 끔찍한 테러도 불사하는 광신도 집단으로 묘사된다.
‘교리를 벗어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했던가.’
그런 미치광이 교단과도 거래하는 길드다, 이 말인가.
도적길드라는 곳의 거래망이 얼마나 넓고 촘촘한지 새삼 느껴진다.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호명될 때마다 사람들이 안쪽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기다렸을까.
“다음 사람.”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렌 돌로레스’는 생각보다 날씬한 소년이었다.
지나치게 하얀 피부와 날씬한 체구, 가면을 쓰고도 가려지지 않는 미형의 얼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의뢰를 드릴 게 있는데요.”
“···말씀해보시지요.”
목소리도 생각 외로 가느다란걸, 이라고 생각한 순간.
소년의 책상 위에 놓인 ‘확대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내가 카렌에게 준 건데.
“···.”
멍하니 고개를 들자, 가면에 뚫린 눈 구멍으로 새파란 눈동자와-
눈 옆에 난 눈물점이 보였다.
“···카렌이네.”
“···!”
“너 여기서 뭐하냐?”
대뜸 던진 질문에 렌, 아니 카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소립니까. 우린 초면인데-”
“우리 사이에 섭하게 진짜 이럴 거야, 카렌?”
카렌이 입을 벌린 채 잠시 아무 말도 못하더니, 다시금 방어에 나섰다.
“···하, 대체 뭘 보고 내가 ‘카렌’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그 확대경.”
“이, 이건 여동생이 나한테 준···.”
“눈물점.”
“···!”
또다시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카렌에게,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점의 위치까지 같을 수는 없잖아?”
“···.”
“그러니 이제 그만 인정하는 게 어때, 카렌?”
카렌은 입술을 깨물며 분한 듯 말을 받았다.
“넌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추리해낸 거야? 여태껏 아무도 못 알아봤는데.”
···아니, 애초에 이런 어설픈 남장을 아무도 못 알아차린다는 게 말이 되나 싶은데?
‘이런 얄팍한 소설 설정 같으니라고.’
게다가 이건 뭐 추리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걸 추리라고 부르면 코난 도일 경께 너무 죄송한 일이지.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카렌, 네게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위협에서 나를 도와줄 ‘미지의 후견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흑의 기사’에 관한 단서를 찾아달라고 요청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