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안에 잠입했다
검술 대련에서 놈들을 탈탈 털어준 덕분인지,
학교생활 아니 아카데미 생활은 한결 편해졌다.
‘일단 팰러스의 추종자들이 귀찮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쾌적하군.’
내 손에 신나게 얻어터진 똘마니 1, 2, 3은 말할 것도 없었다.
놈들과 나는 수업 몇 개가 겹쳤는데, 강의실에 들어서서 서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으히익!”
“하악!”
대개 이런 괴상한 신음을 내며 뒤로 물러서기 일쑤였으니까.
보리스 놈은 이만 갈 뿐 함부로 덤벼들 생각은 못했으며.
리암은 입을 꾹 다문 채 이따금 내 쪽을 쳐다보곤 했다.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지.’
이 정도면 무력으로 ‘사생아 도련님’을 겁박할 생각은 다들 안 하지 않을까.
게다가 같은 클래스 학생들의 시선도 묘하게 변한 느낌이다.
“세자르 님한테 말 걸고 싶은데 어쩐지 차가워 보이셔···.”
“팰러스 공자님과는 또 다른 타입의 미남이랄까.”
“보니까 카렌이랑 친한 것 같던데?”
···처음과는 상당한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 여학생들과.
“그거 봤어? 발놀림이 예사롭지 않던데.”
“누구한테 검술을 사사한 거지? 웬만한 유파에선 보지 못한 건데···.”
“대체 누가 약골이라는 헛소문을 낸 거야?”
내가 누구에게서 검술을 배웠는지 궁금해하는 남학생들.
이때만 해도 나는 지난번 검술 대련 덕분에 상황이 급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분명 원인이긴 하지만, 더 큰 요인은···.”
카렌은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팰러스 공자님 덕분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몇 시간 없는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지난번의 그 인적 없는 도서실에서 카렌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팰러스가 추종자들을 엄하게 단속했거든.”
“···.”
“그것도 모두가 엿들을 수 있는 학생 휴게실에서, 보란 듯이 문을 열어놓고 말이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저거야말로 원작의 팰러스가 자주 쓰던 수법이었으니까.
‘평판에 신경을 꽤 많이 썼지.’
아마 조만간 내가 속한 클래스에 찾아와 한 편의 쇼를 벌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우니 뭐니 해가며, 그간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같잖은 연극을 펼치는 식으로 말이다.
“팰러스 공자가 사생아 동생까지 포용한다는 미담이로군.”
내 말을 카렌이 받아쳤다.
“미담이 아니라 엿 같은 이야기지.”
“···너 얼굴에 비해 입이 좀 험하다?”
“입 험한 거랑 얼굴이랑 뭔 상관인데?”
그 말에 피식 웃자 카렌은 또 다른 정보를 줬다.
“바야르가 학장에게 불려간 것도 알아?”
“···그래?”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이번 검술 대련 일로 한마디 들었나 봐.”
흠. 학장에게 ‘레핀 가문의 적자’ 어쩌고 저쩌고 한 게 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세자르, 이 똘마니들 몇 명 처리했다고 너무 안심해선 안 돼. ···팰러스의 진짜 정예는 따로 있으니까.”
그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1, 2학년의 하급생들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팰러스를 따르는 똘마니들일 뿐,
팰러스의 진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정예들은 모두 3, 4학년의 상급생들.
“특히 ‘미친 개’는 진짜 조심해야 해.”
‘미친 개’ 타릭.
팰러스의 동갑내기 소꿉친구로, 화학과 의학 등의 분야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녔지만···.
‘일종의 매드사이언티스트 같은 캐릭터이지.’
허가 없이 동물을 잡아다가 해부를 하지 않나.
주변인을 상대로 이상한 약을 먹여보질 않나.
괴이하다 못해 악랄한 기행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놈이 널 주시하고 있을 수도 있어.”
카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닌 것이, 원작에서 저 ‘미친 개’는 팰러스의 앞길을 막는 존재라면 누구든 가차없이 처치하기는 가신이었거든.
게다가···.
‘미친 개 타릭이야말로 4대 원소를 다루는 이능자이니까!’
‘4대 원소를 다루는 자’ 타릭.
‘벽을 통과하는 자’ 우만.
‘잠들게 하는 자’ 브렉.
이 세 명 모두 이능자이며, 팰러스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 한 명이 팰러스를 배신하지.’
그 배신으로 인해 팰러스는 더더욱 미친 놈의 길을 걷게 되고 말이다.
이 세 명 모두 강력한 이능자인 만큼 한 명이라도 포섭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섣불리 다가갔다가 내 목숨만 위험해질 수도 있어.’
무엇보다 지금 이 세 명은 팰러스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상태이니 말이다.
게다가 세자르의 육체를 아무리 단련한다 해도, 이 이능자들 앞에선 무용지물이거든.
“조심할 테니 걱정 마.”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내심 이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카렌은 왜 나한테 이런 정보를 자꾸 알려주는 걸까.’
딱히 안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사면체를 꺼내 보였다.
“그나저나 이것 좀 던져볼래?”
“이게 뭔데?”
“그냥 한 번 던져봐.”
카렌은 새침한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모서리가 녹슨 사면체를 돌려가며 살펴보더니, 대수롭잖게 던져본다.
책상 위에 던져진 사면체가 데구르르 구르더니.
···4가 나왔다.
“오!”
“왜 그런 반응이야?”
카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냐, 고마워. 덕분에 확신했어.”
“···너 설명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지?”
이능자가 분명한 카렌이 4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 사면체의 성능이 나쁘지 않다는 의미.
참고로 말하자면 디터는 4가 나왔으며,
발닉 또한 발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2가 나왔다.
‘비록 내 경우는 잘못 나온 것 같지만.’
내가 아는 바로, 원작의 세자르는 이능자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최소한의 테스트 기기로 삼기에는 괜찮을 듯하다.
“아니, 그냥. 오늘의 운세를 시험해본 거랄까?”
“···.”
카렌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더니 말을 이었다.
“세자르, 너 되게 의외인 거 알아?”
“의외라니 뭐가.”
“나 너 첨 봤을 때 우수에 찬 미소년이라고 생각했거든.”
“틀리지 않았네, 뭐. 난 항상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거든.”
“···우수에 찬 게 아니라 뻔뻔한 미소년이었네.”
카렌이 혀를 차더니 피식 웃는다.
“카렌, 기왕 뻔뻔한 놈이 된 마당에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
“부탁이라니, 뭐?”
“네 친구들 좀 소개해주면 안 돼?”
목적은 사면체 주사위를 굴리게 해서 ‘이능자’ 가능성을 판별하고, 싹수가 보이는 놈 다섯 명을 가신으로 거두는 것.
그러나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후에도 학생들은 도통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긴 괜히 잘못 얽혔다가 팰러스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으니.’
내 말에 카렌은 우물쭈물하더니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음, 그게···.”
“왜, 곤란해?”
“그게 아니고.”
그날, 나는 ‘아카데미의 꽃’이라 불리던 그녀에게 친구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 * *
사건 사고 없이 평탄한 나날이 며칠간 이어지던 가운데.
발닉이 ‘필로스 금광’ 건과 관련해서 진척 사항을 보고했다.
“임리 자작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전갈의 내용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필로스 지대 거래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만,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고 싶군요.
사교클럽 ‘피닉스’에서 사흘 뒤 저녁에 봅시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웬만하면 서면으로만 거래하고 싶은데 말이지.’
아무리 알맹이는 닳고 닳은 사회인이라 해도, 내 겉모습은 어디까지나 열네 살짜리 소년이다.
제 아무리 귀족 신분이라 한들, 이런 모습으로 나서서 거래를 진행했다간 상대에게 우습게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밝히자, 발닉은 의외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제가 도련님의 대리인으로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길드 의뢰 덕분에 이런 식의 토지 거래를 진행해본 경험이 꽤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지만 문제는 이 ‘피닉스’라는 사교클럽입니다.”
사교클럽 피닉스.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발닉의 말이 이어졌다.
“말이 사교클럽이지, 흔히 생각하는 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피닉스는 온갖 뒷골목의 불법적인 거래가 오가는 곳이라고 한다.
애초 이 클럽을 운영하는 것이 왕국 최대의 도적길드라고 덧붙였다.
“그 누구더라, ‘렌’이라는 어린 후계자가 이 클럽에 자주 나타난다 하더군요.”
‘렌 돌로레스!’
“···대박인데.”
“네?”
“아무것도 아니야.”
렌 돌로레스는 원작에선 후반부 가서나 등장하는 인물이다.
‘도적길드 후계자 렌’이 카렌 돌로레스의 쌍둥이 오빠라는 사실은 일종의 반전이고 말이지.
그 렌이 출몰한다는 클럽 이름이···.
“피닉스 사교클럽에는 초대장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걸 구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발닉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 나름으로 백방으로 구해보긴 했지만, 여간한 용병 길드장들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피닉스. 피닉스 클럽···.”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란 생각에 황급히 4차원 주머니를 뒤져보자.
‘찾았다!’
사교클럽 ‘피닉스’의 초대장.
한참 전, 고대 던전의 보상으로 받은 물건 중 하나가 아닌가.
···이걸 여기에 쓰라는 거였군.
“발닉, 초대장은 걱정할 것 없어.”
“네? 그게 무슨···.”
“이미 갖고 있으니까.”
사흘 뒤 저녁, 피닉스 클럽이라고 했지.
이번 기회에 땅도 살 겸 렌과 안면도 터야겠다.
돌 하나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기숙사로 돌아오자 디터가 나와 발닉을 반갑게 맞이했다.
“주군, 농농이가 새로운 걸 배웠습니다.”
“응?”
디터의 재촉에 아기방으로 들어가자,
이제 막 낮잠을 자고 일어난 농농이가 보였다.
‘보모가 실력 발휘를 했다더니.’
아기침대 위에 모빌도 달아놓고, 벽에 이것저것 장식을 해논 것이 제법 아기방답다.
[옹···.]
잠기운이 남았는지 동그란 눈이 감길락 말락한다.
피식 웃으며 농농이의 보드라운 뺨을 손가락 끝으로 누르자.
[옹?]
농농이가 눈을 반짝 떴다.
“농농아, 형아 왔다.”
[옹, 앙!]
내 얼굴을 보자 방긋 방긋 웃는 농농이.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인간이든 동물이든, 아기가 귀여운 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고.
농농이를 보니 아주 탁월하고도 훌륭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귀여운데 누가 건드릴 수 있겠어.
“근데 디터, 아까 농농이가 뭘 배웠다고 하지 않았어?”
이 어린애가 배우면 뭘 배운단 말인가 싶었지만.
디터는 흥분한 기색으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농농이가 새 애교를 배웠습니다, 주군!”
“새··· 애교?”
반신반의하며 되묻는데, 디터가 농농이를 돌아보며 외쳤다.
“농농이 윙크!”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자.
[앙!]
농농이가 제딴에는 윙크랍시고 두 눈을 꼬옥 감는 것이 아닌가.
감은 두 눈 아래로 촘촘하게 자리한 기다란 속눈썹이 뽀얀 얼굴 위로 드리웠다.
‘아이고, 예뻐라.’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와 발닉, 디터 모두 아빠 미소를 짓고 농농이를 바라보았다.
“아고, 어쩜 이렇게 이쁜지!”
“농농아, 너무 잘했어! 윙크 최고!”
[옹, 으그으그···.]
“농농이 최고!”
모두가 농농이의 애교에 사르르 녹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리메이크 버전의 주인공이 세자르가 아니라 농농이였다면 아마 <아기부터 현금 재벌> 뭐 이런 제목이 붙었겠지.’
농농이가 주인공이었다면 피 튀기는 내용 없이 모두가 훈훈하고 행복한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텐데···.
그런 잡생각을 하는데, 농농이가 내게 아장거리며 걸어왔다.
[옹, 옹!]
“그래, 잘했다.”
농농이를 안고 한 바퀴 돌려주기도 하고,
다리에 앉혀 비행기를 태워주기도 하고.
[까르륵, 까륵!]
그때마다 농농이가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의 웃음은 언제 봐도 힐링이 된다니까, 같은 생각을 하며 그 예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어라?’
분명 이 방에 있는 건 우리 세 사람과 농농이뿐인데···.
‘농농이가 웃는데도 금화가 안 나오네?’
디터와 발닉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내심 짚이는 바가 있었으니.
농농이를 안아서 돌려주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까륵!]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금화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농농이의 금화 생산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었다.
나는 농농이를 조심스레 디터에게 안겨준 뒤, 발닉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그리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발닉의 눈이 커졌다.
‘···!’
-나를 감시하는 누군가를 족쳐 배후를 불게 했나요?
···갱신된 도전과제 중 이런 게 있었거든.
즉 이 방 안에 누군가가 숨어서 우리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