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1화 (31/176)

대박의 냄새가 난다

리암은 섬뜩한 기분에 소름이 끼쳤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순간.

“6회전 종료! 세자르 승리!”

···전혀 예상 못 했던 결과가, 교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졌다고?”

금속의 감촉이 목에서 떨어져나간 뒤에도,

리암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 * *

유서 깊은 왕립 아카데미의 학장실.

역대 학장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가운데, 학장은 어두운 얼굴의 교관 한 명과 대치 중이었다.

“바야르 교관.”

“···.”

“내게 뭐 할 말 없나?”

림 바야르.

레핀 공작가의 개인 검술스승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레핀 공작 암살 혐의’로 투옥돼 있는 훔 바야르의 쌍둥이 형.

회갈색 머리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상의 소유자이지만, 전신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실력 있는 검객.

그것이 림 바야르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대체 무슨 얘길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검술 교관으로 썩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리 훌륭한 스승도 아니었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는 건실한 강사였는데.

‘···원망스러운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나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핀 공작을 죽이려 했다는 시점에서부터 그의 동생 바야르는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학장은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말을 받았다.

“내가 주의를 주지 않았나. 세자르 레핀 군을 자극하지 말라고.”

“···자극하지 않았습니다만.”

“바야르 교관.”

인자해 보이기만 하던 학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이 아카데미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

“그저 평범하게 수업을 했으면 됐을 일 아니야. 그런데 굳이 수업 내용을 바꿔서 검술 대련을 했다고? 그것도 대련 신청 규칙을 교묘하게 바꿔 혼자서 다섯 명을 상대하게 만들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바야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자율에 따른 결과입니다.”

“하!”

학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강력한 기세에도 바야르는 요지부동이었다.

“바야르 교관, 내 그대의 마음을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 앞으론 제발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사내의 눈은 흉흉하게 빛났다.

후, 한숨을 내쉬던 학장이 몸을 돌리려던 바야르에게 한마디했다.

“세자르 군이 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네?”

“아니, 아닐세.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방금 학장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바야르가 미간을 좁히는데 학장이 덧붙였다.

“그냥, 자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얘기일세.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학장실을 나선 바야르는 입안이 몹시 썼다.

‘레핀 공작은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창부에게서 얻은 사생아를 팰러스 님이 계신 이 아카데미에 편입시키다니.

그리고 그런 사내와 함께 살고 있는 마님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실까.

림 바야르는 마님, 아니 ‘리아나’만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그것이 억눌러야만 하는 부질없는 연심임을 잘 알지만서도.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학장실을 나서 학생관의 복도를 걷노라니,

저 안쪽 학생 휴게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게냐.”

“···그게.”

림 바야르는 참지 못하고 휴게실 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다행히 휴게실 문이 활짝 열린 터라 모든 대화가 여과 없이 밖으로 들려왔다.

“혹여 세자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것은 팰러스 공자님의 노기 어린 목소리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일찍이 얘기하지 않았더냐. 더는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죄, 죄송합니다 팰러스 님!”

“팰러스 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몹시 노기 어린 목소리에 추종자들, 특히 1학년생들은 고개를 푹 숙였고.

그 큰 소리에 휴게실을 지나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와, 지금 팰러스 공자님이 추종자들 혼내나 봐. 얼마 전에 단체로 세자르 님한테 덤벼들었다며?”

“안 그래도 요즘 걔네들 너무 지나치다 싶었는데···.”

“저 온화한 분이 저렇게 불 같이 화내시는 건 처음 보네. 배다른 동생이라도 한 핏줄이라는 건가.”

어느샌가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가운데, 팰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다 내가 부덕한 탓이 아니겠느냐.”

“공자님!”

“팰러스 님···.”

“너희의 과오는 곧 나의 과오. 나 역시 너희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는 거다.”

바야르는 참지 못하고 창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꿀을 바른 듯한 금발과 눈부시게 푸른 눈동자.

조각가가 공들여 깎은 듯한 이목구비마저 그분을 떠올리게 하는 팰러스의 얼굴에선,

진심 어린 슬픔이 배어나왔다.

“세자르 그 아이는··· 일찍이 제대로 된 관심과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다.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태어난 너희들과는 태생이 다르다는 거다.”

그 수심 어린 표정과 울림 가득한 목소리 때문일까.

팰러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 이들을 말 한 마디로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며 바야르 또한 감탄하기는 마찬가지.

‘과연, 나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신 분.’

차마 탐낼 수조차 없는 ‘그분’을 고스란히 닮은 팰러스를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는데.

팰러스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내 아우가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너희가 조금만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 마지막 말에, 훔쳐듣던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역시 팰러스 공자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지.”

“공자님의 인품이란···.”

“사생아 동생도 감싸안을 정도의 포용력이라니···.”

“그런 포용력이니 저런 불량배 같은 놈들도 다 품어주시는 것 아니겠어?”

학생들 모두가 ‘팰러스 공자의 미담’을 방방곡곡으로 퍼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가운데에.

빨간머리의 미소녀, 카렌 돌로레스만이 어두운 낯빛이었다.

* * *

1대5의 불공평한 대련을 무사히 승리로 마무리한 직후.

사소하지만 소득이라 할 만한 변화가 몇 가지 생겨났다.

첫째로는 도전과제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것.

[도전과제 ‘내 앞길을 막지 마라’ 달성! - 사사건건 방해하는 학우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몹시 당황했는데.

‘검술수업 중에 목숨 잃을 뻔하는 거, 그걸 해결한 거 아니었어?’

이번 일로 목숨의 위기를 넘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찮게 구는 놈들을 손봐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아직 위협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로군.”

새삼스러운 사실에 미간을 잔뜩 좁히고 있는 내 머리 위로, 갑작스레 뭔가가 떨어졌다.

아얏.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떨어진 주사위 하나가 보였다.

‘웬 주사위?’

흔히 보는 육면체 주사위가 아니다.

피라미드 비스무리하게 생겼지만, 모든 면이 삼각형인 사면체 주사위.

1~4까지 눈이 적힌 주사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능 테스트 사면체’(가격 : ????)

- 설명 : 사면체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의 ‘이능자 여부’를 테스트하는 것으로 ‘미발현된 이능’까지 판별해낼 수 있다.

던져서 1이 나오면 이능이 없는 사람.

2나 3이 나오면 ‘이능 발현 가능성’이 있는 미발현자.

4가 나오면 이능자다.

- 비고 : 이대륙에서 흔히 쓰는 이능 테스트기. 저렴한 대신 정확도가 떨어진다.』

잠깐만, 이거···.

‘대박인데?’

안 그래도 슬슬 아카데미 안에서 이능자를 물색하려 하던 참이었다.

‘카렌 돌로레스’처럼 운 좋게 상태창이 떠주면 그야말로 베스트이겠지만.

‘이능자의 소질이 있어도, 미발현 상태이면 상태창에도 나오지 않을 거 아냐?’

원작에서 팰러스 또한 이능자들 여럿을 포섭하는데.

보통은 14세 전후로 발현되지만 예외적으로 늦은 나이에 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주 결정적인, 강력한 이능일수록 더 늦은 나이에 발현하기도 하니까.’

물론 비고에 적힌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구절이 살짝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드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나는 시험 삼아 사면체를 던져보았다.

휙, 하고 떨어진 주사위는 데구르르 구르더니···.

통.

“···2가 나왔네?”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던져봤다.

이번엔 3.

‘어라.’

몇 번 더 던져봐도 마찬가지다.

2 아니면 3.

“정확도가 떨어지는 편이라더니···.”

이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2와 3이 나오다니.

성능이 심하게 의심스럽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대로 디터에게 던져보게 해야겠어.

‘카렌한테도 던지게 해봐야지.’

그 두 사람 정도면 ‘이능자 테스트 주사위’의 성능을 시험하기에는 충분할 거다.

그리고 두 번째 변화는···.

“어제 이후로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단 말이야.”

“뭐, 그 정도면 매운 맛을 보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놈들을 엿먹여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뭔가 변화가 느껴진다.

지나갈 때마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과 수군거림은 일상이지만,

과거에는 그 성질이 의혹과 힐난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봤어, 방금? 1대5로 이겼다는 세자르 님.’

‘마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체격이···.’

‘그 추종자 무리를 개 패듯이 패주는데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니까?’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고 발닉은 오히려 저가 더 어깨에 힘을 팍 주는 것이 아닌가.

“흐흐, 녀석들이 이제야 도련님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게죠!”

뭐, 진가라기는 뭐하지만.

쓸데없이 귀찮게 굴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싶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의 발닉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발닉, 혹시 아직 용병 길드에 등록된 상태인가?”

“그럼요. 근래 몇 년간 의뢰를 안 받긴 했지만, 이래 봬도 A급 용병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적 길드만큼은 아니지만,

용병 길드 역시 대륙을 관통하는 정보망을 탄탄하게 갖춘 곳이다.

“뭐든 말씀하시지요.”

“왕국 서부의 필로스 지대라고 알고 있나?”

필로스 지대.

발닉 역시 알고 있는 듯 미간을 좁혔다.

“거긴 허허벌판 아닙니까? 넓기만 넓지 경작도 안 되는 척박한 땅인데다 야생동물이 속출해서 골칫덩이인 땅이라고 들었는데···.”

“거기 소유주가 임리 자작 맞지?”

“아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용병 길드를 통해 그자에게 비밀리에 접촉해, 땅을 사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

다만 내 신분은 무엇 하나 밝히지 않은 채.

“음, 그런 식의 거래에 응할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여태껏 팔리지 않아 골치를 썩고 있던 것 같으니 반가워할지도 모르겠군요.”

발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헌데 도련님은 그 땅을 대체 왜 사려고 하시는 겁니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손해만 보실지도 모르는데···.”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그런 건 궁금해하지 말고.”

일단은 내 말에 따라주면 좋겠다 얘기하니 발닉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뭐, 도련님이 손해 보실 일을 하실 리는 없겠지요. 상대를 탈탈 털면 털었지 본인이 피보는 일은···.”

“뭐?”

“허허, 아무튼 알겠습니다! 당장 길드로 달려갑지요!”

발닉은 시원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이 두 사람은 이런 게 좋다니까.’

디터와 발닉의 장점.

내 명령이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일단 따르고 본다는 거다.

그리고 발닉에게 구입 의사를 전하라고 밝힌 저 땅은···.

‘나중에 금광이 발견되거든.’

그게 지금으로부터 꼭 1년 뒤의 일이다.

덕분에 임리 자작은 떼부자가 되지만, 이 땅을 탐내던 팰러스의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빼앗기고 말고.

이 ‘필로스 금광’은 팰러스의 강력한 경제 기반이 되어주니까 말이다.

사실, 세자르가 된 순간부터 이 정보를 염두에 둬왔다.

하지만 무일푼인 탓에 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필로스 금광이 내 것이 되는 미래라니.

상상만 해도 달콤하기 그지없군.’

자금이 충분한 지금이야말로,

땅을 구입할 적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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