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
아까는 그냥 많이 예쁘네, 라고 생각했던 카렌이 갑자기 달라 보인다.
가신으로 거둬야 할 인물 1순위가 아닌가.
‘돋보기 때문인지 벌써 호감도가 20점이 됐네.’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나한테 이런 걸 굳이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마음에 안 드니까.”
“응? 내가?”
고개를 젓는 카렌.
“그 추종자 무리가 아카데미를 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리고··· 팰러스도 마음에 안 들어.”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카렌이 상당히 용기를 내어 한 발언임을 깨달았다.
“다들 팰러스를 가리켜 완벽한 인재니 어쩌니 하지만. 자길 따르는 이들이 그렇게 개망나니처럼 굴게 놔두는 인간이 제대로 된 놈일 리 없잖아?”
나 역시 동감이다.
그래서 질문했다.
“카렌. 내가 보기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뿐이 아닐 것 같은데.”
이 소설 속에 들어오기 한참 전, 평범한 독자 1 시절부터 내내 궁금했던 것을.
“그럼에도 팰러스가 이 아카데미 안에서 ‘선인’으로 통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왕도의 대가>를 읽는 내내 느낀 기이함.
아무리 자신의 이미지를 잘 포장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악행을 이어나가는데 아랫사람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카렌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세자르. 이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그를 ‘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내가 친해두면 좋을 사람, 차기 패권을 쥘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지.”
카렌은 현 왕위 계승 순위 1위가 로건 드 레핀 공작이며 2위가 팰러스 레핀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현 국왕은 9살 어린애이며 어릴 때부터 병약한 탓에 지지 기반이 약하다고 말이다.
‘원작의 내용 그대로군.’
원작에서 팰러스는 현 국왕을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국왕 시해’의 배후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레핀 공작, 즉 아버지마저 살해하기에 이르니.
‘그 모든 악행을 저지른 후 종국엔 왕위에 오르지.’
다시금 생각해봐도 소름끼치는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싶다.
카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인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결국 ‘강자’에 의해 정해지는 거지. ···역사가 승자에 의해 씌어지는 것처럼.”
그 말에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 기억났다.
‘<왕도의 대가> 저자 이름이 역4서였는데.’
아니,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짐작이다.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몰아내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 아카데미에서는 도덕이 절대적이라고 가르치지만, 다 개소리라고 생각해.”
“···그럼 넌 왜 놈과 친해지려 하지 않는 건데?”
내 질문에 카렌은 씁쓸하게 대꾸했다.
“난 이곳 아이들과 다르거든. 고위 귀족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할 필요가 없지.”
얘도 후작가 여식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비고에 적힌 내용이···.
“뭐가 다른데?”
“···어?”
카렌은 흠칫 놀라더니 애써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절대 방심하지 마. 보리스의 힘과 리암의 검술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테니까.”
* * *
몇 개 없는 수업을 듣고 기숙사 건물로 돌아오자.
[옹옹, 으그으그!]
“주군, 오셨어요? 농농이가 주군을 많이 기다렸습니다.”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날 보며 반갑게 옹알이를 했다.
‘안는 폼이 꽤 능숙해졌는걸.’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부자지간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자연스레 내게 두 팔을 뻗어 안기는 농농이.
‘퇴근하는 가장이 이런 기분일까.’
농농이의 정수리에서 나는 우유 냄새를 맡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던 내게, 디터와 발닉이 질문 세례를 쏟아냈다.
첫 수업은 어땠냐, 괴롭히는 놈은 없었냐, 가신으로 거둘 만큼 싹수가 보이는 놈이 있느냐···.
어느 정도 얘기를 나눈 뒤, 발닉을 따로 불러냈다.
“가르쳐보니까 어때?”
최근 디터는 아카데미 군사학부에 응시하기로 마음먹고서 진지하게 수련에 임하는 상태.
내 질문에 발닉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디터 놈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많이 서툴긴 합니다만 기본 센스가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근성이 대단합니다.”
발닉은 세 달 정도면 아카데미 시험에 응시해볼 만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면 안심이고.
나는 자애롭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발닉, 간만에 훈련이나 같이 할까? 디터까지 셋이서 말이야.”
“훈련···이요?”
“왜, 공작저에서 자주 했잖아.”
‘고강도의 지구력 훈련’이라는 말에 발닉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 * *
“바야르 경. 오늘 자유대련에선 특별히 제가 심판을 맡겠습니다.”
다음 번 검술 수업이자 대망의 ‘자유대련’ 시간.
다른 클래스 담당의 검술 교관이 수업에 들이닥친 탓에, 바야르의 얼굴이 확 썩었다.
‘학장에게 언질을 주길 다행이군.’
풋내기들 다섯 명을 연속으로 상대하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바야르가 작정하고 편파 판정을 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검술 교관이 대련 시작을 알렸다.
“1회전, 네이선 블락 대 랄프 틸먼!”
내 차례가 바로 그다음인 만큼, 나는 공터에서 몸을 풀며 준비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내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어이, 공작가 도련님.”
“우리 기억 안 나냐?”
“누구?”
“하하, 기억 안 나는 척하기는. 오늘 너랑 대련할 상대들이거든? 거기다···.”
일단 리암이나 덩치는 아닌 것 같고, 나머지 허수아비들인가 보다.
“나랑은 전에 사교파티 때도 봤잖아. 그때 재밌었는데 말이지.”
나는 계속 스트레칭에 집중하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래, 재밌었지. 오랜만이다.”
“···.”
“야, 뭐야. 네가 전에 이 자식 손봐줬다고 했잖아. 혹시 거짓말-”
“진짜라니까! 이 새끼 그때 완전 벌벌 떨었다고!”
아.
내가 들어오기 전의 세자르를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놈들은 나를 여전히 ‘약골 세자르’로만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야 좋지 뭐.
“2회전, 레핀 가문의 세자르 대 티모시 크롬.”
검술 교관의 말에 학생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절반은 의심하는, 절반은 회의적인 눈빛.
‘보리스를 한 방에 쓰러뜨린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보아하니 덩치 놈이 내 주먹에 맞아 기절한 게 부끄러웠는지 그런 식으로 소문을 내고 다닌 듯했다.
그래선지 나의 대련에 다들 더 관심을 불태우는 모양인데.
‘우연이 아님을 보여줘야겠군.’
나는 대련장 한가운데에 섰다.
티모시, 아니 똘마니 1 또한 나를 마주 보고 섰다.
‘검을 든 자세가 영 어설프군.’
지난번에 카렌이 준 정보에 따르면,
똘마니 1은 후작가의 막내아들로 오냐오냐하며 자랐는데, 아카데미에서도 상대가 일부러 져주는 경우가 많았단다.
‘괜히 후작가 공자님의 자존심을 긁었다가 된통 당하고 싶지 않다 이거지.’
그 덕에 똘마니 1은 자신의 실력을 몹시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원래는 최단시간에 대련을 마칠 생각이었지만···.
‘똘마니 1을 사정없이 패서 나머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똘마니 2와 3은 속전속결로 진행한다.’
선수 시절 지겹게 하던 고강도의 지구력 훈련.
요 며칠간 그것을 꾸준히 한 덕분에 폐활량도 상당히 늘어난 터였다.
놈의 어디를 후두려패주면 제일 아파할까, 를 고민하던 순간,
교관이 시작 구호를 외쳤다.
“으아아아앗!”
똘마니 1이 기합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이봐, 빈틈이 다 보이는데?
‘심각할 정도로 엉성한걸.’
나는 가볍게 스텝만 밟으며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았다.
굳이 안 그래도 사냥감이 알아서 덫을 향해 달려들고 있으니까.
“이 겁쟁이 자식!”
검술을 배웠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자세로 달려드는 놈의 옆구리를,
푸욱!
가볍게 찔러주었다.
“커억!”
“···!”
지켜보던 학생들에게서 소리 없는 경악의 외침이 터져나온 것도 잠시.
부우웅!
그대로 검을 휘둘러 허벅지를 찔러주었다.
“커억.”
아랫배, 허리, 장딴지, 어깨···.
일부러 급소가 아닌 곳만 골라서 수없이 공격했다.
끝이 비록 뭉툭하다고는 하나,
검신이 휘어질 정도로 온 힘을 실어 찌른 한 방의 고통은-
“그아아악.”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렇게 몇 번을 계속하자, 똘마니 1의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나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일어서라. 똘마니 1.”
“흐윽, 흐윽···.”
“패배를 시인하려면 그래도 좋지만.”
“그, 그것만은!”
그래도 근성은 있는지 똘마니 1은 좀 더 버텼지만.
결국 검을 쥘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무너져내렸다.
“···!”
이 모든 상황을 숨 죽여 지켜보던 학생들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웅성거림이 차츰 커져가는 가운데 교관이 얼른 나섰다.
“2회전 대련은 이것으로 종료한다! 세자르 승리!”
3회전 상대는 아까 똘마니 1과 함께 시비를 걸던 똘마니 2였는데.
내가 노려보자 놈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저, 저 기권하고 싶은데···.”
“기권은 불가다.”
처음부터 검을 던져버리고 싶어하던 똘마니 2 역시,
3분 내내 두들겨맞고 들어갔고.
“···.”
지켜보는 학생들의 경악은 점점 더 커져갔다.
다음 차례인 똘마니 3은 참관 교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제발 기권하게 해주십시오! 교관님 제발···.”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형편없기는···.”
참관인의 칼 같은 거절에 똘마니 3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얻어맞고 물러났다.
···이거 어떤 의미론 레전드가 되겠는걸.
2와 3이 전의를 잃은 채 대련에 임한 덕에, 나는 세 명을 상대하고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바로.
“5회전, 세자르 대 보리스 발론.”
보리스, 아니 ‘덩치’였으니.
보리스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대련장 한가운데에 섰다.
‘확실히 앞선 세 놈과는 다르다.’
검을 쥔 자세나 서 있는 태도는 초심자의 그것이지만.
디터에 버금갈 정도로 큰 키와 거대하다 못해 육중한 체격.
웬만한 남자의 허벅지만 한 팔뚝에 나무둘레만 한 허벅지만 봐도 무시무시하다.
‘카렌의 말로는 힘이 너무 압도적이라 기술의 부족을 무마하고도 남는다 했나.’
그러니 한 수, 한 수에 몹시 신중해야 한다.
···저놈에겐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활용하여.
‘스피드와 기술, 그리고 전술을 총동원한다.’
보리스 같은 놈을 상대할 때 딱 좋은 기술이 있지 않은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반격하는 ‘리포스트’.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이번 판의 전술을 구성하는데, 보리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엔 우연히 맞아줬지만, 이번엔 쉽지 않을 거다.”
“우연히 맞아줬다고?”
나 역시 히죽 웃으며 검을 고쳐쥐었다.
“그게 거짓말인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특별히 비밀로 해주지.”
“뭐 이 자식이-”
“다만.”
주변을 둘러싼 학생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 일만큼은 비밀로 못 할 거야.”
“하, 건방지기는. ···내가 앞에 나온 놈들처럼 약해빠진 줄 아나?”
“글쎄. 쟤들보다야 낫겠지만.”
“그거야 당연-”
“너는 특별히.”
부웅!
검을 들어올려 그 끝을 놈의 미간으로 향했다.
“다들 보는 앞에서 오줌을 질질 싸게 해주지.”
“···이, 이 새끼가!”
보리스 놈이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했다.
역시.
이렇게 단순 무식한 놈들은 도발만큼 효과가 좋은 게 없다.
‘이제 워밍업은 이 정도면 충분하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교관이 외쳤다.
“5회전 시작!”
···드디어 본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