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또 이렇게 되네
신기한 일이다.
공작가에서 지긋지긋하게 봤던 얼굴을 여기서 또 보게 되다니.
“리암 페킹튼.”
“네!”
“보리스 발론.”
“···.”
“보리스? 보리스 결석인가?”
“아뇨, 출석했습니다!”
아카데미 둘째 날은 검술 수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수업의 담당교관이···.
‘바야르 경의 쌍둥이형이라고?’
나는 연단 위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저의 바야르와 얼굴은 똑같지만 키가 꽤 크고 어깨도 더 넓으며.
‘무엇보다도 체격이 훨씬 좋군.’
오랜 시간 무술을 연마한 근육질의 체구. 서 있는 자세부터가 실력자 냄새를 풀풀 풍긴다.
척 봐도 허수아비 같던 공작저의 바야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쪽은 림 바야르, 공작저는 훔 바야르라고 했던가.’
어제 오후.
학장실에 불려갔던 나는 학장의 입에서 의외의 정보를 들었다.
‘몰랐나? 림 바야르 경은 레핀 공작저에서 근무하는 훔 바야르 경의 쌍둥이 형일세.’
바야르의 쌍둥이 형제라니.
공작저의 바야르는 ‘공작 암살 혐의’로 투옥돼 있을 텐데, 그 원망의 화살을 내게로 돌린 것 같다.
학장은 검술교관이 나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 탓에 오해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학장님, 아무래도 바야르 경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 같군요.’
‘개인적인 원한?’
‘바야르 경의 쌍둥이 동생, 훔 바야르 경이 레핀 공작의 암살 혐의로 투옥된 것을 알고 계신지요.’
‘무, 무어라!’
학장이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실을 밝혀낸 게 바로 접니다. 그 공을 인정해 아버지께서 절 이곳에 입학시켜주신 거지요.’
그제야 학장은 일의 전후관계를 이해한 듯했다.
‘···바야르 경이 자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단단히 얘기해두겠네.’
학장의 그러한 배려가 득이 될지 독으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척 봐도 실력이 상당해 보이는 검술교관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검술수업에서 왜 목숨을 잃을 뻔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러한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바야르 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싸움 아닌 눈싸움이 몇 초간 지속되었을까.
“편입생인가.”
“네.”
“앞으로 나와보도록.”
···설마 이렇게 학생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
긴장감을 티내지 않으며 연단 앞으로 나아갔다.
학생들의 시선이 내 온몸으로 쏟아진다.
‘야, 이거 완전히 우주대스타네.’
어제 그런 일을 벌인 만큼 관심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각오한 바였지만.
우주대스타도 모자라 거의 동물원 원숭이급이다.
다른 학부 학생들까지 나를 구경하러 몰려왔으니까.
“···.”
내가 슥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서 안을 바라보던 머리들이 쏙 하고 사라졌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20대 후반의 닳고 닳은 사회인이었던 내 입장에선 귀엽게 느껴질 뿐이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내 이름을 모를 리 없는 림 바야르가 천연덕스럽게 물었고, 나 역시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레핀 가문의 세자르입니다.”
“그래, 세자르 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란다.
림 바야르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 이번 시간부터는 중급 검술학을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커리큘럼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
“다음 시간에 자유대련을 하겠다.”
자유대련!
그 한 마디에 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룰은 간단하다. 누구든 원하는 상대에게 대련을 신청할 수 있으며, 거부는 불가능하다.”
신청을 마친 이가 다른 이를 지목하면, 지목받은 사람은 또다시 대련을 신청한다.
이렇게 릴레이 형식으로 대련 순서를 정한다고 설명했다.
“정 불가피한 경우라면 대련에서 제외시켜주겠다. 다만··· 비열한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감수해야 할 거다.”
바야르가 나를 슥 돌아보며 말을 맺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학생 하나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 하지만 교관님! 전에는 실력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조를 짜고, 그 조 안에서 대련을 하는 형식이 아니었나요?”
하긴 정상적인 수업이라면 저렇게 진행되는 게 맞는 거지.
“예전에야 그랬지. 하지만 편입생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이런 형태의 대련 역시 필요한 법이다.”
그 말에 나는 대번 상황을 알아차렸다.
바야르의 눈이 내게 향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전의를 꺾어버리기라도 할 셈인가?’
그래봤자 교관과 학생이 대련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교관은 학생들의 술렁임을 잠재우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제일 먼저 신청하겠는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리암 페킹튼, 자유대련을 신청합니다.”
“흠, 리암 군의 검술 성적은 A랭크였던가.”
아카데미에서는 각 과목의 실력을 S~D랭크로 평가한다는 설정이었으니 A랭크라면 상당한 실력자인 듯하다.
그런 생각이나 태평하게 하던 나를, 리암이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기 앉은, 세자르 군과 겨뤄보고 싶습니다”
그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교관이 말했다.
“어떤가, 세자르 군. 대련을 받아들이겠는가?”
거부하면 비겁자에 겁쟁이라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리암이란 놈이 제 아무리 강한다 한들 어디까지나 열네 살 소년.
나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강한 정도가 아닐까 싶었으니까.
“그럼 다음 신청자를 지목하게, 리암 군.”
하지만 그것은,
내가 바야르를 비롯한 저 패거리의 비겁함을 얕잡아본 셈이었다.
리암은 씩 웃으며 ‘덩치’, 아니 보리스를 지목했고.
“이 보리스 발론, 저 역시 세자르 군과 대련하고 싶습니다.”
보리스가 지목한 다음 소년 역시.
“저 역시 세자르 군에게 대련을 신청합니다.”
“저도 세자르 레핀 군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총 다섯 명이 연달아 내게 대련을 신청했고,
학생들의 술렁임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바야르조차 제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신청자의 말이 끝난 순간 어디선가 이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그에 동조하듯 반발의 말이 쏟아져나온 순간.
“그만!”
바야르가 교탁을 탕, 내리치며 제지했다.
“규칙은 규칙이다.”
“···.”
“내 방식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당장 이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일도 아닌 불의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란 쉽지 않으니까.
‘이쪽 바야르도 인성이 거지 같긴 마찬가지로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자, 바야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세자르 군. 내 방식에 불만이 있나?”
“없습니다. 다만.”
저놈들 역시, 내 잔머리를 얕잡아본 것은 마찬가지다.
“혼자서 다섯 명을 연달아 상대해야 하는 거니, 제가 제 대련 상대들보다 불리한 조건에 놓인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디스어드밴티지를 안고 시작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
바야르는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니 대련 방식과 순서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제 대련 상대는 총 다섯 명입니다.”
1대5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자, 바야르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상대들의 순서는 제가 지정하겠습니다. 한쪽이 검을 놓치거나 전의를 상실하거나, 혹은 급소를 노출하는 것으로 승패를 결정합니다.”
일부러 바야르 대신 다른 학우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련 한 번당 제한시간은 3분입니다.”
“···허가하마.”
방금 전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바야르의 얼굴이 허를 찔린 듯 바뀌었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분위기에서 검술 수업이 끝났을 무렵.
붉은머리를 길게 기른 미소녀가 내 앞에 와서 섰다.
“너, 이 대련 받아들이면 안 돼.”
“···뭐?”
대부분 예쁜 편인 소녀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다.
그녀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널 골탕먹이려는 ‘그 추종자’들의 비겁한 술수니까.”
그 추종자란 팰러스 똘마니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팰러스 무리를 이렇게 대놓고 경계하는 게 꽤 마음에 드는걸.
근데 얘가 대체 누구지.
“너 이름이 뭐야?”
“하, 지금 그게 중요하니?”
“중요한데.”
네가 원작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캐릭터인지 알아야지.
“내 이름은 카렌이야. 카렌 돌로레스.”
카렌 돌로레스?
그게 누구였더라.
“가서 교관님한테 못 한다고 해. 아까는 거부해서 안 된다고 하셨지만, 네 상황을 잘 설명하면 이해해주실 거야.”
“···아닐 텐데.”
카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뭐라 뭐라 말을 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나를 신경써주는 게 고맙기는 하지만···.
‘이 기회를 틈타 오히려 놈들을 대대적으로 밟아줄 생각이거든.’
불리한 상황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장단점을 사전에 숙지하고 대련에 임한다면-
‘전승을 거두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근대5종 단체전은 토너먼트 방식이 아니라 풀리그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한 선수가 하루에 십여 명 이상을 상대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를 대비하기 위해 고강도의 지구력 훈련을 한다.
헌데 선수 대부분이 수영이나 육상 전공 출신이다 보니, 펜싱전공 선수 혼자서 나머지 선수들을 모조리 이겨서 종합 성적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거든.
‘혼자서 무려 20연승을 거뒀던 선수도 있었지.’
그런 훈련을 꾸준히 해온 내게는 그리 불리하기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카렌, 카렌.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라고 생각하던 중.
‘생각났다.’
카렌 돌로레스.
조연급은 아니고 비중 있는 단역이었다.
‘아카데미의 꽃이라 불리는 엄청난 미녀.’
나는 다시 한 번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예쁘기는 정말 인형처럼 예쁘지만···.
그래봤자 열네 살 소녀이니 지금 내 눈에는 그냥 귀여운 여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이 카렌의 쌍둥이 오빠 ‘렌 돌로레스’가 대륙 최고의 정보통으로 알려진 도적길드 후계자라는 것.
후일 팰러스의 주요 조력자로 등장하는데,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만나는 걸로 나오니 아직은 서로 모르는 사이일 거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렌’을 영입할 가능성이 얼마든 있다는 거지.
그러려면 우선 카렌과 친해져야겠다.
“카렌.”
“···응?”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 * *
얘기를 하자는 말에 카렌은 나를 학부 도서관으로 데려왔다.
“도서관에서 얘기해도 돼?”
카렌은 대답 대신 주변을 눈짓했다.
···과연 사람이 없긴 없다.
“너도 알겠지만, 교양학부생 중 제대로 공부할 마음이 있는 인간은 없거든.”
카렌은 교양학부생들과 다른 학부생들의 실력 차이가 엄청나다고 덧붙였다.
하긴 그쪽은 실력만으로 이곳에 들어온 평민이나 하급귀족들일 테니.
“나처럼 도서관에 매일 오는 쪽이 오히려 별종인 셈이지.”
카렌이 평소 애용한다는 책상 위에는 두꺼운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도 대륙공용어가 아닌, 알 수 없는 고어들이 책등에 적힌 것이 대부분이다.
‘의외로 학구파인가 보네.’
카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 권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
“나한테 대련 신청한 놈들.”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이지?”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으나···.
“리암이 A랭크로 제일 실력이 좋아. 보리스는 B. 나머지는 전부 C 아니면 D야. 리암은 대대로 기사단장을 역임한 가문의 출신인 만큼, 검술에 정통한 편이지만.”
그녀의 설명은 예상 외로 꽤 전문적이었다.
“체격이 작고 완력이 부족한 편이야. 그리고 보리스는 검술 자체는 형편없지만, 힘이 엄청 좋은 데다 몸놀림이 날렵해서 실력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봐.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어.”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카렌이 덧붙였다.
“이 정도면 됐지? 그럼 이제 가봐.”
뭐라 대꾸도 하기 전, 그녀는 책상에 펼쳐놓은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놈의 고서들은 왜 이리 글자가 작대.”
연구용 서적을 보는 건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글자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니···.
‘아.’
여태껏 방치만 해놨던 그놈의 확대경을 어디다 써야 할지 깨달았다.
나는 4차원 주머니 속에서 그것을 꺼냈다.
“자.”
내가 내민 확대경을 본 카렌의 눈이 커졌다.
“뭐야?”
“소중한 정보를 줘서 고맙다고.”
과학시간에 쓰는 그저 그런 플라스틱 돋보기가 아닌, 손잡이와 유리알 주변에 금세공이 돼 있는 고급 확대경이다.
이 시대에는 지식인들만 쓸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인 셈이지.
카렌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받아들었다.
“···실없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표정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준다니까 잘 쓸게.”
입술을 비죽거리며 웃음을 참는 카렌.
얘도 츤데레과인가 생각하던 순간.
[새로운 인물을 만났습니다.]
[‘카렌’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아카데미 학생 카렌(호감도 20점)
- 이능 ????의 소유자(*호감도 50 이상 시 해금됩니다)
- 특성 : ‘비밀의 소유자’, 쿨내, 츤데레, 반골 기질
- 비고 : 돌로레스 후작가와는 별 친분이 없음.』
이놈의 상태창은 왜 이리 랜덤인···
카렌이 이능자였어?
‘이런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