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저 위로 데리고 가마
학장의 표정이 매우 안 좋아졌다.
다른 학부는 몰라도 교양학부에서 학생들의 싸움은 주요 인사들의 싸움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사건.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핀 공작을 모욕했다고?
‘식은땀을 다 흘리시네.’
얼굴이 하얘지다 못해 파랗게 질린 학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 그··· 그런 상황인 줄은 몰랐네만.”
“학장님이야 당연히 모르셨겠지만요.”
“내가 보리스 군에게는 따로 잘 타이르겠네. 그 친구가 원래 좀 그런 경향이 있어, 새로운 편입생만 보면 기싸움을 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세자르 군이 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다.
공작한테 꼰지르지 말라, 이거지?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을 했다.
“네?”
“그러니까 알잖나, 각하께는···.”
“아.”
나는 두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각하께 이번 일을 말씀드려라, 그건가요? 학장님이 절 따로 불러서 훈계하셨다고-”
“훈계는 무슨!”
이제는 보라색 얼굴이 된 학장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부모에 대한 모욕을 가만히 참고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기에 불려왔는데.”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두 눈만 껌벅이는 학장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학장님의 생각과 달리, 전 이번 일을 단순한 학생들 간의 기싸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보리스 군이 우리 레핀 가를 능멸하고, 레핀 공작을 모욕한 셈이니까요.”
“···!”
“그런데 학장님은 지금 그 친구를 ‘타이르는’ 정도로 넘어가자, 그렇게 얘기하시는 것 아닙니까.”
나는 짐짓 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학장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학장님. 어째서 공작각하가 저 같은 서자를 아카데미에 편입시켰는지 궁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
“그것은.”
나는 여유로운 태도로 한 박자 쉬고서 말을 이었다.
“···제가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나면 레핀 가의 적자로 삼아주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학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 그게 진짜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아카데미, 그것도 교양학부에 편입시켰겠습니까.”
“하긴···.”
“이건 학장님만 아는 비밀로 하십시오.”
‘비밀’이라는 단어에 학장이 마른입술에 침을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먼 미래에는 적자로 인정받을 테니 이 정도 허풍은 쳐도 되겠지.’
어쨌거나 ‘레핀 가의 적자’는 생각보다 꽤 잘 먹혔다.
학장의 표정이 곧바로 바뀌며 태도 또한 온순해졌으니까.
“그··· 정황도 들어보지 않고 대뜸 이곳에 불러내서 미안하네, 세자르 군.”
이것 봐라.
아무리 왕립 아카데미 학장이라도 레핀 공작가의 (예비) 공자 앞에서는 별 수 없다 이거지.
“아닙니다, 학장님. 저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네. 사실은···.”
학장은 쭈뼛거리며 변명조로 말을 이었다.
“그··· 검술교관인 바야르 경이 워낙 자네 얘길 안 좋게 해서 말이지.”
이곳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당황했다.
한 박자를 놓친 후에야 뒤늦게 대꾸했다.
“바야르··· 경이라뇨?”
학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에 붙은 교강사 사진을 가리켰다.
그 한가운데에,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바야르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검술교관인 림 바야르 경 말일세. 그리고···.”
이어서 학장이 해준 이야기에서, 나는 의외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 * *
학장과의 면담을 무사히 잘 마무리한 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말이 학생기숙사이지, 제일 비싼 방을 신청한 덕분에 북관의 4층을 통째로 쓰고 있다.
‘과연 귀족학교는 다르다 이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디터와 발닉, 그리고 농농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첫날 수업은 어떠셨나요, 주군.”
[앙앙, 옹···.]
그리고 디터와 발닉 두 사람이 며칠간 고심하고 수소문해서 찾아낸, 믿음직스러운 사용인 두 명도 함께 있었다.
“잘 부탁하네.”
농농이를 봐줄 보모와 잡일을 담당할 남자 하인 하나.
두 사람이 내게 꾸벅 인사했다.
일전에 사용인을 한둘 고용하자는 뜻을 밝혔을 때, 디터와 발닉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그러다 농농이가 금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떡합니까?’
‘농농이를 누가 납치라도 해가면···.’
그러한 합리적인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애초 그 부분은 던전을 떠나기 전, 정령과 얘기한 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금화가 나오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 없다. 노움은 고대의 요정이니만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편이니.’
정령은 농농이와 뭔가 대화를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 셋 외의 시선이 느껴지면 노움의 능력은 자동으로 봉인될 거다.’
즉,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는 농농이 깔깔거려도 금화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면 농농이의 금화 생산량이 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저렇게 귀여운데.’
보모 또한 농농이의 귀여움에 흠뻑 빠진 모습이었으니.
“어이구, 우리 농농 님은 어쩜 이렇게 귀여우실까!”
[까르륵!]
여인은 농농이를 그냥 평범한 아기로만 여기는 눈치였다.
헌데 시커먼 남자 세 명 사이에 아기가 있다는 걸 의심스러워하진 않으려나.
사용인들에겐 뭐라고 얘기해뒀냐고 디터와 발닉에게 묻자, 디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것이···.”
“허허허, 도련님. 그게 말이지요.”
그때.
보모가 농농이를 안고서 디터에게 다가왔다.
“디터 님. 아기님이 아빠를 찾으시는데요?”
[마! 마!]
···설마.
디터 너, 자기 애라고 해버린 거냐.
나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디터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푸하하하!”
발닉만이 속 시원히 웃었고.
영문을 모르는 보모는 자애롭게 웃으며 농농이를 디터에게 안겨주었다.
“참, 요즘 세상에 이렇게 젊은 아빠가 온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는 경우도 많지 않은데 말이지요.”
“···.”
“물론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농농 님에게는 이렇게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으니 얼마나 복 받은 일입니까.”
아, 그런 거였어?
어린 나이에 불장난으로 생긴 아기.
그러나 엄마는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리고, 그 아기를 홀로 키우는 것이 바로 우리의 디터···.
“···푸훗.”
“웃지 마십시오, 주군.”
디터는 사용인들을 납득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며 열심히 변명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빠.]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가 내 옷자락을 잡으며 한 말에,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보모가 한마디했다.
“호호, 농농 님이 주인어른을 참 잘 따르네요?”
[빠! 빠!]
아빠 아냐 꼬맹아···.
그렇게 한 차례 작은 소동이 있은 뒤, 보모는 농농이를 재운다며 안쪽 방으로 물러갔다.
“벌써 해가 지는군.”
기숙사 건물의 지대가 높은 데다 꼭대기 층이어서 그런가.
창문 너머로 수도의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온 도시가 석양에 물들어 붉게 빛나고 있다.
“주군, 보기만 해도 근사하네요.”
마냥 풍경을 순수하게 감상하는 디터와는 달리, 나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이렇구나.’
그리고 더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목이 빠져라 위를 올려다보던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지.’
가진 거라고는 독기와 노력이 전부인 흙수저 출신의 김현우.
그런 내게도 저 위에서 홀로 빛나는 선망의 대상이 있었다.
‘마치 세자르가 팰러스를 우러러보며 느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현생의 감상에 젖어 있던 중,
발닉이 뚱딴지 같은 소릴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발닉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상상 못 하다니, 뭘?”
“저 같은 놈이 그런 고급 호텔에도 묵어보고, 금화 한두 개도 아닌 몇십만 단위의 돈을 가져보고.”
“맞아요, 다 주군 덕분입니다. 저 역시 전쟁 노예 생활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겼는데.”
나는 발닉이 유목민, 디터가 전쟁 노예 출신이었음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발닉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잘 모르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같은 놈들은 늘 그런 걸 느낍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열심히 살아도 지금 이 위로 절대 올라갈 수 없다는, 뭐 그런 절망감 말이지요.”
어쩔 수 없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다.
···하지만 겉보기만 신분제가 아닐 뿐, 내가 살았던 세계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 기분이 뭔지 나도 잘 알아.”
특히나 내가 있던 체육계는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이 금은수저, 최소한 동수저는 되는 놈들 가운데서.
흙수저 출신의 내가 국가장학금에 목을 매며 아득바득 노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그럼에도 내게 돌아온 것은-
선수단 내의 은근한 따돌림과 코치진의 차별, 잘못된 지시로 인한 치명적인 부상 따위가 전부였으니.
“하긴··· 도련님도 힘든 시간을 보내셨지요.”
발닉은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 같긴 하지만, 뭐 그럼 어떤가.
현생의 김현우나 이곳의 세자르나,
영원한 엑스트라이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은 피차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세자르의 몸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눈앞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으니까.
“앞으로는 달라질 거다. 아니, 이미 달라졌고 더더욱 달라질 거다. ···그리고 그것은 디터, 발닉. 너희 역시 마찬가지다.”
“···.”
나는 두 사람과 번갈아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저 위로 끌고 올라갈 거니까.”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이것이 바로 진짜 목적.’
앞서 비싼 호텔에 묵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새것으로 치장하는 식의 사치를 부렸던 것.
여기에는 단순한 사기 진작 이상의 목적이 있었으니.
디터와 발닉.
이 둘이 스스로의 의지로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하게 만드는 거다.
‘산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와, 산등성이에라도 올라본 자는 생각하는 것부터가 다르다.’
원작의 팰러스가 했던 말이다.
팰러스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성장시켰고.
그들은 결국 자진해서 팰러스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가신이 되었지.
나 또한 팰러스의 이 같은 방식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었는데, 팰러스가 왕위를 손에 넣은 후에는···.
‘후환을 제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치부를 공유하는 자를 모두 제거하는 것.’
훗날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을 아는 자.
즉 자신의 수족이 되어주었던 수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럴 마음은 없고.’
나는 팰러스처럼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는 아니니까.
더불어 내 사람들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윈윈 전략이 아닌가.
<왕도의 대가>가 모델로 삼은 17세기는 ‘평민의 지위 상승’이 가능한 시대다.
‘돈 많은 평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세습작위를 사는 바람에 유럽의 귀족 인구가 대폭 늘어났다고 했나.’
나는 디터와 발닉을 번갈아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최소한 남작 작위 정도는 지닌 귀족으로 만들어주마.”
그 말에 두 사람은 입만 멍하니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튀어나올 듯 커진 두 눈에는 단순한 놀람을 넘어 경악과 충격, 그리고···.
강렬한 감동이 담겨 있었다.
“아, 근데.”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내가 목숨을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네?”
“아무래도 여러모로 찍힌 것 같거든.”
편입 첫날 만에 어떻게 망나니가 되었는지 들려주자, 디터와 발닉의 입이 떡 벌어졌다.
“주군,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게요, 왜 굳이···.”
걱정스러운 기색의 가신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미친놈은 무서워서 피하거든.”
“···.”
방금 저 둘, 살짝 학을 뗀 것 같았는데.
“그리고 지난번에 구해논 버프코트 어디 있지?”
“그건 또 왜···.”
방탄조끼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입고 가야 할 것 같다.
-검술수업 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나요?
내일 첫 시간이 검술수업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