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26화 (26/176)

한 방에 때려눕힌다

왕립아카데미에는 총 다섯 개의 학부가 있다.

고급 장교를 양성하는 군사학부.

행정관을 양성하는 행정학부.

왕실 치하의 고위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부.

전문 화가나 공예가를 양성하는 예술학부.

이 네 곳에는 주로 평민들이 들어가며, 드물게는 하급 귀족들도 입학한다.

아카데미의 꽃이라 불리는 마지막 학부가 바로 ‘교양학부’다.

교양학부란 귀족가의 촉망받는 자제들만이 입학 가능한 엄선된 엘리트 집단이자,

향후 왕궁의 핵심 인사를 배출해내는 곳.

“들었어? 새로운 편입생 이야기.”

평소에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이 교양학부 건물이 오늘 따라 시끌시끌했다.

“왕족들이나 탈 법한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며?”

“그게 다가 아니라니까, 무려···.”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 대화는 이어졌다.

“···레핀 가문의 수치!”

“헉, 설마··· 사창가에서 데려왔다는?”

“맞아, 그 ‘세자르’가 교양학부로 편입했다니까?”

왕국의 제1공작가 레핀 가문의 가십에 사람들은 관심이 많았다.

과거 ‘철혈공’이라 불렸다는 레핀 공작과 사교계의 유명인사인 리아나 공작부인.

그 둘의 사이가 좋지 않으며, 공작이 데려온 ‘사생아 세자르’야말로 불화의 씨앗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공작 각하도 대단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서자를 이 교양학부에 입학시키시다니···.”

“헉, 조용히 해!”

그 문제의 사생아가 들어온 순간.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선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

외국의 왕족 같은 화려한 차림을 하고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소년은,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모습으로 소년, 아니 세자르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띤 채.

‘저 사람이 그 사생아라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뭐랄까···.’

‘···의외로 근사하잖아?’

의심 한가득이던 여학생들의 눈빛은 관심과 선망의 눈빛으로 변했으며.

‘약골이라더니 몸이 꽤 단단해 보이는데?’

‘검술을 정식으로 배운 것 같은 자세인걸.’

‘공작이 비밀리에 검술 스승을 붙였다더니···.’

대놓고 무시할 준비가 돼 있던 남학생들 또한 태도가 급변했다.

세자르를 중심으로 한 무리의 원이 형성되었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던 그때.

“어이, 공작가 도련님.”

“야, 천하의 세자르 님이 아카데미에 편입을 다 하셨네.”

“우리 봤던 것 기억나나?”

···팰러스를 추종하는 한 무리의 소년들이 세자르를 둘러쌌다.

“어머, 어떡해.”

“쟤들이 또 작정하고 시비를 걸려나 본데.”

내심 세자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불태우던 소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 중 수많은 남학생의 연모 대상이자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다는 ‘아카데미의 마돈나’ 카렌 역시 그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으니.

‘질 나쁜 놈들이 접근했군.’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 권력자로 군림 중인 팰러스.

레핀 공작의 적장자인 본인은 학식이면 학식, 인품이면 인품, 검술 실력 할 것 없이 완벽한 인재로 통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그 추종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저 모양일까.’

이 추종자들은 팰러스가 보는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다가도, 그가 없는 데서는 아카데미 안을 설치며 온갖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자르라는 소년을 둘러싼 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말들을 뱉어내는 중이었으니.

“운 좋게 공작 각하의 눈에 들었다고 건방 떠는 것도 유분수지, 여기가 어딘줄 알고 감히 아카데미에 들어올 생각을···.”

“···팰러스 님이야 관대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가 않거든?”

“네 까짓게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네 몸에 흐르는 천한 피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 마지막 말에,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나머지 학생들 사이에서 헉,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말을 면전에서-”

“방금 어떤 새끼야?”

추종자 가운데 한 덩치를 자랑하는 소년이 뒤를 돌아보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

카렌 또한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저런 깡패 같은 놈이 후작가의 자제라니.’

바깥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교양학부야말로 제 가문과 지위만 믿고 날뛰는 망나니들 소굴이었다.

그런 이들을 경멸하는 그녀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세자르를 흘긋 훔쳐보았다.

‘···듣는 내가 다 낯부끄러울 지경인데.’

그는 예상 외로 덤덤한 얼굴이었다.

화가 나지만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저 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저런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아무렇지 않은 걸까.

‘어릴 적부터 심한 말을 수없이 들었겠지···.’

소년의 아름다운 옆얼굴에 우수가 서린 듯 보인다.

선이 곧고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 때문일까.

“···어떡해, 너무 안됐어.”

그녀처럼 생각하는 여학생들이 꽤 많은 듯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가운데.

세자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

추종자들이 당황함과 동시에,

지켜보던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덩치’ 앞에 다가와 섰다.

덩치는 순간 당황했다.

···큰 키가 절대 아닌 소년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세자르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놈이 내 부모를 모욕한 이상.”

“···?”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인 거다.”

그게 무슨, 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퍽!

둔중한 타격음이 울렸고-

“···?”

쿵! 하며 덩치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주먹 한 대에 ‘덩치’가 기절해버렸다고?

당황한 카렌이 옆을 돌아보자.

“···.”

교실에는 이미 경악의 침묵이 자리잡은 터였다.

세자르가 손을 툭툭 털고서 고개를 들자.

주변 이들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불만 있으면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도록.”

“···!”

“얼마든 받아주겠다.”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으며 걸어나가는 세자르의 앞으로,

학생들이 홍해처럼 반으로 쩍 갈라졌다.

* * *

기숙사 동관 1층 휴게실.

본디는 모든 학생들에게 개방된 공간이나 언젠가부터는 ‘팰러스단’이라 불리는 청년들만 쓰는 공간이다.

평소 망나니들이 어질러놓아 번잡하던 휴게실은 오늘 따라 눈부실 정도로 깨끗했다.

드물게 팰러스가 오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웬일로 팰러스에 대한 찬양 대신, 조금 다른 화제가 그의 추종자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팰러스 님은 너무 관대하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붓동생에게 그리 잘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의 추종자 중 가장 충성스럽지만 우둔하기 짝이 없는 청년 하나가 말했다.

“말이 의붓동생이지, 천한 것에게서 태어난 사생아 따위를···.”

“루크.”

금발과 푸른 눈을 자랑하는 화려한 미남자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이 청년들의 실질적인 리더인 팰러스 공자였다.

“···말조심하거라.”

“죄, 죄송합니다.”

여태껏 책에서 눈을 떼지 않던 팰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탁 소리 나게 책을 덮는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묻어난다.

“아무리 천출이라 하여도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사안이다. 적자로 받아들이신 것은 아니니 어디까지나 온정을 베푸시는 차원이긴 하지만.”

은연 중에 ‘적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부분을 강조하며 팰러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레핀 가의 장남으로서 그분의 뜻을 존중함이 당연한 것. ···그러니 더는 내 앞에서 너희가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팰러스를 오랜 시간 따라온 추종자들은 그의 표현에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잘 알았다.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말라.

즉,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리라.

세자르를 어떻게 엿 먹여줄지 추종자들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눈치 없는 어느 추종자 하나가 폭탄 같은 화두를 던졌다.

“근데 어제 보니까 그놈이 트레비산 명마를 사던데요?”

“···뭐?”

그 한마디에 팰러스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제가 어제 광장에 들렀는데 귀티가 좔좔 흐르는 말을 고르고 있더군요. 오늘 타고 온 마차와 함께 말이죠.”

“···.”

“나중에 혹시나 해서 주인장에게 다시 찾아갔더니, 무려 금화로 지불했다던데요?”

“트레비산이면 아무리 흥정을 잘해도 50만 크로네는 줘야 할 텐데 그걸 현찰로 샀다고? 허풍이지 허풍.”

“아냐, 진짜라니까? 내가 그집 주인이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 순간.

툭, 하고 팰러스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추종자들이 당황한 채 돌아보자, 팰러스는 어느새 미소를 되찾은 얼굴로 책을 주워들었다.

“···기왕 편입시켜주시는 거, 기죽지 말라고 아버지께서 용돈을 꽤 후하게 주신 듯하구나.”

그 말에 추종자들은 역시 마음이 바다처럼 넓다며 그의 관대함을 찬양했다.

···팰러스의 입가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정말로 아버지가 그 큰 돈을 줬다고?’

팰러스가 자금의 출처를 고민하던 그 순간.

또 다른 추종자 무리가 뛰어들어왔다.

“보리스가 기절했답니다!”

보리스.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덩치’라고 불리는 엄청난 맷집의 소유자.

“뭔 소리야, 걔가 왜 기절해?”

“그래, 맹수랑 붙여놔도 상대를 기절시켰음 시켰지 지가 기절할 리는-”

“진짜라니까!”

그것을 우스갯소리로 여기던 추종자들은,

이윽고 들것으로 실려온 보리스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게···.”

보리스를 싣고 온 소년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 팰러스 님의 배다른 동생분이 주먹으로···.”

“주먹으로? 쇠몽둥이 같은 걸로 후려친 건 아니고?”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냥 주먹으로 한 대 쳤을 뿐인데···.”

“저도 봤어요. 엄청나던데요? 그냥 한 방 퍽 치니까 바로 기절하던-”

“그만.”

팰러스가 미간을 좁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보리스를 데리고 의무실로 가보도록.”

추종자들이 눈치를 보며 팰러스의 명을 따르러 나간 사이.

마지막까지 발을 떼지 못하던 리암의 어깨에 팰러스가 손을 얹었다.

“망나니 동생이란 참 어려운 법이지. 혈육이니 내칠 수는 없지만···.”

손을 떼며 한숨을 내쉰 팰러스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내 동생에게 예의란 게 무언지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리암.”

“···팰러스 님.”

“집안의 작은 일조차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나의 지위가 원망스럽구나.”

그 슬픈 미소에 리암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리암이, 이 리암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섣불리 나섰다가 네가 피해를 보면 안 되지.”

“팰러스 님···.”

“하지만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나는 말리지 않겠다.”

그 가늘어진 눈매 사이에서 아름다운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나는 것을,

리암은 알지 못했다.

* * *

몇 시간 뒤,

나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 고급 홍차를 홀짝거리는 중이었다.

내 가운데손가락에 낀 투박한 링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그 ‘덩치’를 한 방에 기절시키게 해준 효자템이다.

오늘 오전,

‘니가 알던 내가 아냐’ 도전과제를 달성한 덕분에 이런 걸 받았거든.

『‘원펀링’(가격 : ????, 잔여 사용횟수 2회)

- 설명 : 체구가 작은 고대종족들이 호신용으로 쓰는 물건. 장착한 상태로 펀치를 날리면 어떤 상대든 안전하게 기절시킬 수 있다.

- 비고 : 사용 가능한 횟수는 총 3회이며, 다음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발동한다.

1. 근육량이 ‘평균’ 이상일 때

2. 혼자서 다수를 상대로 할 때

3. 상대가 나를 모욕할 때』

누구든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다니 대박이 아닌가.

물론 세 번밖에 못 쓰는 물건을 이런 상황에 쓰는 게 좀 아깝기도 하지만.

‘지금 안 쓰면 또 언제 쓰겠어?’

남은 두 번은 잘 뒀다가 호신용으로 써야겠다.

굳이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세자르의 이미지를 단번에 약골에서 개또라이로 반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 같다.

“···자르 군.”

“네?”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나?”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중년 사내가 보였다.

왕립 아카데미의 학장이다.

···어쩌다 보니 편입 첫날부터 학장실에 불려온 희대의 망나니가 된 것 같다.

“잘 들리는데요.”

“편입 첫날부터 어째서 이런 문제를 일으킨 건가? 우리 유서 깊은 왕립아카데미에서 그런-”

“상대가 제 부모를 모욕했습니다.”

‘부모 모욕’이란 말에 학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제 어머니를 창부로 취급하고, 제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제1공작 로건 드 레핀 공을 그런 창부와 놀아난 놈팽이로 취급했습니다.”

“···.”

그러니까,

이제 당신이 탈룰라를 시전할 차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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