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알던 내가 아냐
호텔을 나서자 선선한 공기가 뺨을 간질였다.
저 멀리 종탑이 달린 신전이 보이는 가운데, 양옆으로 식료품점, 빵집, 선술집 등 각종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사람이 꽤 많은데요.”
발닉의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한 듯, 디터가 상기된 얼굴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간다.
‘나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니까.’
상점가를 빠져나와 탁 트인 광장에 이르자, 가슴의 두근거림은 한층 커졌다.
“와.”
좁은 거리를 빠져나와 탁 트인 광장에 이르자, 더 많은 인파가 눈에 띈다.
가판대를 놓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한 푼이라도 깎아보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손님들.
과일, 유리, 포목, 건초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신선한 달걀 사세요! 달걀 사세요!”
“고래향유로 만든 기름입니다! 비린내가 나지 않아 향긋하고···.”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악마에게 영혼을 넘기게 될 것이니···.”
“호외요, 호외! 국왕전하께서 노바스 공작을···.”
호객꾼들과 전도하는 이들이 판을 치는 건 이 동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척 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내 모습에 발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 역시 상당히 큰 시장이지만, 아카데미 근처로 가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그래?”
“위베른 시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각종 교역로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아카데미와 왕궁 근처에서는 하루가 머다 하고 화려한 연회가 벌어진다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기대가 되는걸.
“발닉, 풍근환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금고 안에 그런 게 들어 있던데.”
발닉의 눈이 커졌다.
“풍근환이라니, 이거 엄청나군요!”
“그게 뭔데요?”
“약골도 강골로 바꿔준다는 신비의 영약이지.”
어리둥절한 디터에게 발닉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귀하기도 귀하지만, 아무데서나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 더더욱 전설이 됐거든.”
“아무데서나 구할 수 없다고요?”
“이대륙의 행상인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이대륙의 행상인!
‘원작의 숨은 떡밥 중 하나인 행상인 이야기가 이렇게 나오다니.’
들어는 봤지만 아주 특별한 아이템을 판다는 것 외엔 아는 게 없다.
짐짓 고개를 젓자 발닉이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단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용병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다른 대륙 출신 사람이라고요?”
“그렇지. 신묘한 기능을 지닌 물건들을 잔뜩 판다고 하는데, 듣기로는 보름달이 뜨는 밤에 나타난다고 하더군.”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
일단 기억해둬야겠다.
“그럼 도련님, 그 풍근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괜찮으심 한 번만 보여주심이···.”
“먹었는데.”
“···네?”
이미 홀랑 먹어서 배 속으로 들어갔다 이 말이다.
“허, 아깝군요. 그걸 파셨으면 몇 만 크로네는 족히 받으셨을 텐데.”
“25만 크로네라던데?”
“헐, 대박.”
“진짜요?”
그 정도면 고급마차 한 대 가격이라고 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야 넘칠 정도로 많잖아?”
그 말에 발닉이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내 몸을 측은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하긴 도련님은 돈보다도···.”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이 역시 최고라는 거지요.”
능글맞게 웃으며 금세 비위를 맞추는 발닉을 보며 혀를 찼다.
우리는 거리 안쪽에 자리한 의류점부터 방문했다.
“지금 당장 입을 게 있으면 좋겠는데.”
주인장은 우리의 옷차림을 가만히 훑어보더니 적당히 깔끔한 옷을 가져왔다.
“가성비가 괜찮은 편입지요. 소재도 좋고-”
“가성비는 됐고.”
“···?”
나는 가게 한가운데 자리한 나무 마네킹 앞으로 걸어갔다.
다소 흉물스럽게 생기긴 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부시게 화려한 것이···.
‘최고급품을 전시해놓았나 보군.’
영문을 몰라하는 주인에게 마네킹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마네킹이 걸친 것,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사겠다.”
“하, 하지만 그건 몇천 크로네씩 하는 물건들인데···.”
“장사하기 싫은가 보지?”
나는 미간을 구기며 신분패를 꺼내들었다.
라크로 은행의 VVIP 고객임을 입증하는 물건의 등장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닙니다! 이거 제가 귀한 손님들을 몰라뵀군요.”
그러저러한 과정 끝에,
우리는 놀라운 비포 앤 애프터를 자랑하는 모습으로 거듭났다.
특히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최고급 비단으로 몸을 휘감았으며,
가슴께에는 커다란 보석이 박힌 브로치까지 달았으니.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과하다뇨, 조금도 과하지 않습니다!”
들어보니 요즘 수도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핫아이템이란다.
그래 봤자 내 눈엔 대부호 룩을 완성하는 랩퍼들의 황금목걸이처럼 보이지만···.
거울 앞에 서자, 상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주군, 너무 멋지십니다!”
“역시 우리 도련님 잘생기신 건 알아드려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진짜 잘생겼다.
아니 어차피 세자르 얼굴이니까 상관없으려나?
원래도 미소년이긴 했지만 깡말랐던 과거에 비해, 키도 커지고 어깨도 넓어졌으며 뭣보다 근육이 적당히 붙었다.
거기에 옷빨이 더해지니 먼 나라의 왕자님 같은 느낌인걸.
“와, 발닉 아저씨도 멋지세요!”
“흐흐 고맙다, 디터 너도 인물이 확 사는데?”
디터와 발닉도 ‘왕자의 최측근 호위기사’ 같은 느낌으로 다시 태어났다.
···저 두 사람을 보니 영화 <프리티 우먼>이 생각나는걸.
연신 싱글벙글하는 두 사람을 데리고 곧장 다음 장소로 향했다.
* * *
광장 외곽.
그곳에는 말과 마차를 파는 상인들이 한데 몰려 있었으니.
‘공작이 준 말도 나쁘진 않지만.’
발닉의 설명을 들어보니 준중형급 아반X 느낌이랄까.
물론 이제 갓 집을 벗어난 귀족 사생아한테는 분에 넘칠 정도이지만···.
“어이쿠, 어서 오시지요!”
귀티 나는 옷차림 덕분인지 주인이 달려와 맞이했다.
“말 한 마리와 마차 한 대가 필요한데.”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최고급으로.”
나는 ‘레핀 가문의 세자르’라는 이름이 적힌 신분패를 내보인 뒤,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현금으로 지불하겠다.”
‘현금’이란 단어에, 주머니 속에서 나는 짤랑짤랑 소리에 주인의 눈이 뒤집어졌다.
“제일 좋은 놈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주인은 마굿간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검은말, 붉은말, 갈색말 등 온갖 종류의 말을 지나쳐 마침내 멈춰 선 곳에는.
‘···척 봐도 보통이 아니네.’
다른 말의 1.5배는 돼 보이는 덩치.
새빨간 갈기가 불꽃처럼 너울거리고 전신에서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승마를 오래 해온 덕에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보는 눈은 있다.
‘이건 명마 중의 명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말 주인이 뿌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트레비산의 혈통을 자랑하는 희대의 명마입니다.”
“···트레비산?”
그러고 보니 원작에도 그런 언급이 있었다.
좋은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팰러스가 즐겨 타던 말이 바로 트레비산 명마였다고.
“역시 아시는군요. 저희 집 최고의 명마인만큼 아무한테나 보여드리지 않는 놈입니다.”
“확실히 훌륭하군.”
“저는 신뢰하는 손님들께만 이런 물건을 보여드린답니다.”
나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내 옷차림과 라크로 은행의 신분패를 신뢰하는 거겠지만.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핀 가문의 세자르 님?”
‘세자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마굿간 뒤편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주인장이 놀란 것도 잠시.
발닉이 얼른 나가 동태를 살피고 돌아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어느 쥐새끼가 도련님을 염탐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쫓아가볼까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놔둬. 쥐새끼 하나 돌아다니는 것 따위야 상관없다.”
···그 쥐새끼가 팰러스가 심은 쥐새끼라면 더할 나위 없다.
내 일거리를 줄여줄 테니까.
“주인장, 이 말과 같이 마차도 보여줄 수 있나?”
내 말에 주인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금세 ‘왕후장상만이 탄다는 최고급 마차’를 꺼내왔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그것을 본 디터와 발닉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으어어어···.”
“저, 저런 게 있다니···.”
저런 반응을 보니 이미지를 쇄신하기엔 충분할 것 같은데?
“그,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심드렁하게 되묻자 주인장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런 건 왕족들이나 타시는 물건인데··· 거의 저택 한 채 가격이다 보니 말입지요.”
“그런 걸 자네가 왜 신경쓰나?”
가격이나 불러보라고 하자 주인은 마차에 대해서만 200만 크로네를 요구했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2억 정도인가?’
이에 내가 부른 값은.
“2만 크로네.”
“···네?”
백 분의 일을 부르자 주인장의 동공이 커졌다.
이 무슨 미친 놈, 이라고 눈으로 말하는 그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한 번 타고 돌려줄게.”
“···네에?”
그런 걸 우리 현대사회에서는 이른바 ‘렌트’라고 부르지.
황망해하던 주인장은 내 설명을 듣고서 흡족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 신박한 생각이로군요.”
제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종국에는 다른 고객들에게도 이 ‘렌트 서비스’를 확대해보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그럼 다음에 보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디터와 발닉은 ‘마차 1회 탑승권’에 무려 2만 크로네를 쓴다는 것에 기함했지만.
“혹시 초두효과라는 말 들어봤나?”
“···?”
심리학에 왜 그런 개념이 있지 않은가.
3초 만에 결정되는 ‘첫인상’이 생각 외로 많은 것을 좌우한다고.
그러니 나는,
처음부터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등장할 생각이다.
“공작가의 수치라는 사생아가 일국의 왕족이 탄다는 최고급 마차를 타고 나타난다면?”
“···!”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는 아니더라도,
마차 정도는 최고급으로 타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드디어 아카데미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잘하고 오세요, 주군.”
“기선 제압이 중요합니다, 도련님. 다 발라버리고 오시지요!”
[옹옹, 앙!]
디터와 발닉, 그리고 디터의 품에 안긴 농농이의 배웅을 받으며 세자르는 최고급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주인장이 감사의 뜻으로 마부까지 무료로 붙여준 덕분에,
아카데미로 가는 길은 더없이 편안했다.
그가 탄 마차가 지날 때마다 행인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저 마차 좀 봐!”
“도대체 누가 타고 있는거지?”
뼈대에서부터 바퀴에 이르기까지 금장을 박아넣고.
차체 겉면은 고급스러운 붉은색 소가죽으로 감쌌으며.
순금과 형형색색의 보석이 문 주변을 호화찬란하게 장식했다.
“와, 마부가 입은 옷도 최고급이구먼.”
“돈이 썩어나나, 어쩜 저렇게···.”
“그래도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런 차를 타봤으면···.”
“엄두도 내지 말라고! 저거 한 번 탈 돈이면 우리 1년치 생활비야.”
그렇게 모두의 관심 속에서 마차는 그대로 아카데미까지 도착했고.
정문을 통과한 다음에도 한참을 안으로 더 들어갔다.
“헉, 저 마차 좀 봐!”
이 전대미문의 호화로운 마차를 발견한 아카데미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대체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편입생 중 한 명인가? 초반부터 기선을 팍팍 제압하는걸.”
선망과 질시의 시선, 수군거림 속에서 마차는 마침내 유서 깊은 대학 건물 앞에 멈춰섰다.
드디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오오, 열린다!”
웅성거리던 사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문에 집중되었다.
이윽고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귀티가 좔좔 흐르는 미소년.
소년이 머리를 쓸어넘기자,
윤기 흐르는 생머리가 햇살 아래서 반짝이며 떨어져내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슬로모션으로 진행되는 CF의 한 장면 같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니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뿐.
“···저게 누구야?”
뒤늦게 튀어나온 질문에, 누군가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혹시··· 세, 세자르?”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기엔 충분했다.
“누구라고?”
“세자르, 세자르 레핀!”
또 다른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레핀 가문의 수치, 공작가의 사생아 말이야!”
“···!”
감탄하며 소년을 바라보던 이들이 이내 경악했다.
온몸에서 기품이 흐르는 저 소년이 정말로···.
천한 창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생아, 세자르 레핀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경악한 시선을 한껏 받으며 걸어가던 세자르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니가 알던 내가 아냐’ 달성! - 세자르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바꿨습니다.]
[보상으로 ‘···’을 받았습니다.]
세자르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기대감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