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22화 (22/176)

걸어다니는 ATM을 잡아라

그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보상을 받을 시간입니다.]

[세 사람 모두 ‘정산소’로 이동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몸이 어딘가로 옮겨졌다.

“으아아.”

“헉.”

기이한 감각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최종 통과자들이여, 환영한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는···.’

앞서 지나왔던 곳과 마찬가지로 동굴 내부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디를 돌아봐도 온 사방이 황금빛 금화뿐이다. 나무덩굴로 이뤄진 천장 아래 금화가 수없이 쌓여 있었다.

“오오오.”

나나 디터마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이니, 발닉의 눈이 돌아갈 수밖에.

[앞으로 나오도록.]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나간 순간.

공간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금화의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언덕 꼭대기에는···.

“괴, 괴물이다! 아, 악마야, 저리 가라···.”

“오오, 신이시여.”

‘저들이 숲의 정령인가.’

2미터에 달할 법한 키에 전신이 나뭇가지로 뒤덮인 모습이 꼭 그루트처럼 생겼다.

아이 엠 그루트, 라고 외칠 것 같은 숲의 정령들의 발치에는.

‘···아기?’

젖먹이 갓난아이서부터 서너 살짜리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기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까륵, 까륵, 까르륵!”

즐겁게 깔깔거리는 아기들을 돌봐주는 것은 다름 아닌 숲의 정령들.

발치에 앉은 아기들을 나뭇잎으로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끼니 때가 된 아이에게는 뭔가를 먹여주기도 한다.

‘···신종 어린이집인가.’

왜 아기들이 여기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한 순간.

아기들이 까르륵 하며 일제히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땡그랑! 때그르르릉! 땡그랑!

경쾌한 금속음을 내며 수백 개의 금화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맙소사.”

그리고 깨달았다.

저 깔깔거리며 금화를 만들어내는 아이들이야말로, 내가 찾던 노움이란 것을.

귀 끝이 뾰족하다는 것 외에는 인간의 아기와 별 차이점이 없지만.

땅속의 보석을 지킨다는 난쟁이 요정의 일종이며, <왕도의 대가>의 설정에 따르면 ‘고대의 지하문명을 구축한 이종족’의 후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며 나는 나머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어이, 디터, 발닉. 저것 좀 봐봐.”

연신 신의 이름을 부르는 디터,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묻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는 발닉.

···저렇게 겁내는 것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마나도, 오러도, 마물도 없는 세계관이라는 설정상, 이들에게는 요정이나 정령 또한 환상의 존재에 불과할 테니까.

나는 그 둘을 억지로 일으켰다.

“악마가 아니라 정령이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저, 저기··· 아기들이 있는데요?”

“어. 근데 아기가 아니라 노움이야. 내가 아까 말했던 아기 요정 기억나지?”

“귀, 귀여워···!”

디터는 요정이니 노움이니 하는 것들은 귓전에 들리지 않는 듯, 귀여워만 열 번을 연발했고.

“아기들이 웃을 때마다 금화가 쏟아진다니! 금화, 금화로구나! 허허허, 번쩍번쩍···.”

···발닉도 미쳐가는 중인 듯했다.

어쨌거나 저 아기 노움들의 모습을 보니 내 짐작이 틀렸던 것 같다.

‘강제 노동을 시킨다더니···.’

설정 파일에 적힌 내용과는 달리, 척 보아도 아이들을 혹사하거나 착취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눈코입이 없으니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정령들이 아기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래도 헛짚은 모양인데, 생각한 순간.

[그대들의 공적을 치하하고자 보상을 지급하겠다.]

정령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몸이 아닌, 천장에서 울려왔다.

“아, 악마가 말을 한다···!”

“악마가 아니라 정령이래요, 발닉 아저씨.”

···저 둘의 촌극은 무시해야겠다.

보상이라니, 언제 들어도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이 아닌가.

‘원작에선 금화 자루가 나왔지.’

눈앞에 나타날 보상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내 발치에 뭔가가 챙그랑, 하고 떨어졌다.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가벼운데.

“주군, 이것 좀 보시죠.”

디터가 주워서 내민 것은 열쇠 꾸러미였다.

관문 하나에 열쇠 하나인지, 전부 다해 열쇠 3개가 달려 있는 꾸러미.

“···.”

황금으로 만든 열쇠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열쇠다.

당황스러운걸.

“여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발닉의 그 말대로 열쇠 옆면에 ‘라크로 은행 수도지점’이라고 적혀 있다.

‘라크로 은행!’

그 이름을 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원작의 팰러스가 아카데미에서 외출을 나와서 꼭 들르는 은행이 바로 이 라크로 은행이라는 것.

번호가 적혀 있는 걸 보니 라크로 은행의 금고 열쇠인 듯하다.

[금고 안에 5천만 크로네를 넣어뒀으니 직접 찾아가도록.]

5천만 크로네라니.

많은 돈인 것 같긴 한데, 이곳의 화폐 가치를 잘 모르다 보니 감이 잘 안 온다.

그런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기라도 하듯 발닉이 입에 거품을 물고 외쳤다.

“5, 5천만 크로네라니! 수도에서 제일 으리으리한 저택 한 채를 살 돈이 아닙니까.”

···엄청난걸.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정도 돈이면 굳이 노움을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되겠는데.’

일단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기이니 설득을 할 수도 없지만.

소설 속 텍스트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로 보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아기 때 자주 돌봐줬던 조카 녀석 생각도 나고.

여기서 행복하게 지내는 애들을 굳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데려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이 말이지.

그렇게 마음을 접으며 열쇠 꾸러미를 4차원 주머니에 갈무리해서 넣는데, 정령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이 끝이지만.]

[앞선 관문들을 기대 이상으로 성공해낸 그대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종의 추가 관문인 셈이지.]

디터, 발닉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원작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는데?

‘말하자면 히든 스테이지인 셈이군.’

무엇이 등장할지도 모르고, 공략법 또한 전혀 알 수 없는.

하지만 차려준 밥상도 못 먹는 병신이 될 수는 없지.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부탁이 뭡니까?”

기다렸다는 듯 숲의 정령 하나가 일어서더니 아기 노움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이 아이를 웃게 하는 거다.]

···신나게 웃는 다른 아기들과는 달리, 혼자 시무룩한 아기를.

[이 아이는 자네들보다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간 아이로 따지자면 두 살 정도라고 볼 수 있지.]

내 무릎께에 간신히 닿을 정도의 아기 노움이 날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카락에 축 처진 동그란 눈. 포동포동한 볼살에 턱이 토실토실한 것이 어딜 봐도 귀여운 아기이지만···.

표정이 근엄하고 진지하다 못해 어두워 보인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이 아이는 통 웃는 일이 없다네.]

[더는 웃지 않게 된 이 어린 노움을 웃게 해줬으면 좋겠네.]

정령들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왔다. 이들과 아기들 사이에 꽤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듯하다.

[성공한다면 이 아이가 만들어낸 금화를 전부 그대들에게 주지.]

금화도 금화이지만, 저 얼굴을 보니 꼭 웃게 해주고 싶은걸.

어떻게 해야 어린 노움이 웃을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데.

“제가 먼저 해보지요!”

발닉은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자신 있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자, 요정님 이것 보시지요!”

언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돌멩이를 가지고 저글링을 시작했다.

돌멩이 세 개를 연달아 던져대며 등 뒤로도 받고, 앞으로도 받고 했지만···.

[···.]

아기 노움을 비롯한 모두의 반응이 싸했다.

열심히 저글링을 하던 발닉은 머쓱한 얼굴로 손을 멈췄다.

“하하, 안 웃긴가?”

어색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발닉이 한 발 물러나자, 이번엔 디터가 나섰다.

“아기들이 절 잘 따르거든요.”

“···그래?”

“자, 수수께끼를 내볼 테니 맞춰보렴.”

노움이 무표정한 얼굴로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울다가 울음이 그친 사람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뭐가 되게?”

노움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디터는 그럴 줄 알았지, 라는 표정으로 답을 말했다.

“아까운사람.”

그러더니 이내 제 배를 잡고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 아닌가.

나와 발닉은 서로를 돌아보며 쟤 미쳤나, 하는 시선을 공유했다.

[···.]

노움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숲의 정령들이 디터를 죽일 듯 노려보는 것 같다···.

“하나 더 내볼게. 땅이 어떻게 울게?”

디터가 씩 웃더니 말했다.

“흙흙.”

[···.]

이번에는 깔깔거리던 다른 아기 노움들조차 이를 빠득 가며 디터를 노려보았다.

‘디터, 제발 그만···!’

얼른 다가가 디터를 뒤로 붙잡아 끌자,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이 자식은 괴력을 얻은 대가로 센스를 희생당했나 보다.

숲의 정령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시간 낭비였던가···.]

이 좋지 않은 분위기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잊고 있던 도전과제 하나가 번뜩 생각났다.

‘아기요정의 버튼을 눌러봤나요?’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뭘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항목이었지만, 지금 보니 저 아기 노움에 대한 힌트 같다.

헌데 버튼은 대체 뭘 가리키는 걸까.

나는 탁자 옆에 서 있는 어린 노움을 가만히 보았다.

‘조카 녀석 어릴 때랑 닮았네.’

이제는 다 컸지만, 아기 때는 내가 자주 놀아줬다. 비행기도 태워주고 안아서 돌려주기도 하고 그냥 단순하게는···.

‘간지럼만 태워도 좋아했지.’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아기요정의 버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탁자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가 어린 노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안한데, 네 몸에 손을 대도 괜찮을까?”

어린 노움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순간.

···녀석의 배꼽을 눌렀다.

“주군?”

“도련님?”

[무, 무슨···!]

날 제외한 모두, 심지어 숲의 정령들까지 당황한 그 순간.

까르륵!

-하고 아기 노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열심히 노움의 몸을 간지럽혔다.

노움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채 신나게 깔깔거렸고.

[까륵 까륵 까르륵.]

“너,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기 노움의 귀여움에 디터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쨍그랑 쨍그랑.

“그, 금화다!”

발닉의 말처럼, 노움의 몸 주변에서 금화가 퐁퐁 튀어올랐다.

경쾌한 금속음을 내며 금화가 비오듯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일종의 장관이었다.

“···.”

디터와 발닉이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것을 바라만 보는데,

나는 이때다 싶어 준비해온 주머니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뭐해? 얼른 주워담아!”

“어, 네, 넵!”

“역시 도련님의 준비성이란···.”

온 사방에 떨어지는 금화를 디터와 발닉이 부지런히 주워담는 동안.

나는 어린 조카와 놀아주듯 노움과 놀아줬다.

“까꿍.”

[까륵 까륵!]

까꿍놀이는 물론이요, 번쩍 안아들어 빙글 돌려주기도 하고.

공중에서 붕 돌 때마다 노움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 귀엽네.’

보상을 받으려고 시작한 거긴 하지만, 죽 쑨 얼굴만 하고 있던 아기가 웃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좀 좋아진다.

정령들 또한 기뻐하는 것은 마찬가지.

[오오, 드디어 웃었구나!]

[이렇게 감격스러울 데가···.]

[아이가 저자를 잘 따르는군.]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놀아줬다.

같이 뒹굴거리며 놀기도 하고,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빠와 아기 사이로 착각할 만큼 끈끈하게 놀아주고 나니.

[이제 그 정도면 되었다.]

어느덧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기 노움은 벌써 끝이라고? 라고 묻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거 더 있다간 정들겠는걸.

정령들은 디터와 발닉이 모은 금화 외에도 금화 자루 두 개를 더 주었다.

[진심으로 고맙네, 방문객들이여. 이제 그만 가보도록.]

나는 품속의 아기를 어색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 있어라, 꼬마야.”

그렇게 등을 돌리고 가려는데, 다리 아래쪽에서 자그맣고 꼬물꼬물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까 그 아기가 내 바짓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눈을 크게 뜨자, 아기가 나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빠!]

방금··· 아빠라고 한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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