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나와 진검 승부
‘거울 속의 나라는 게 이런 의미였던가.’
살짝 길어 보이는 머리카락에 곱상하니 생긴 얼굴, 청년이라기보단 소년에 가까운 늘씬한 신체까지.
모든 것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또 다른 세자르’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어쩐지 오싹한걸.’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 있다.
저기 있는 저 세자르는-
‘내가 들어가기 전인가, 후인가.’
내가 들어가기 전의 세자르라면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내가 들어간 후의 세자르라면 험난한 지구전이 될 수도 있으니까.
“···.”
무심한 척 고개를 들어 상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무표정이었던 세자르의 얼굴이 뒤틀리며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거울 속에서 자주 보던, 내가 상대를 도발할 때 짓던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젠장.’
아무래도 지금의 나 같다.
그 사실에 바짝 긴장한 순간,
안내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련을 준비하십시오.]
그와 함께 나와 또 다른 세자르의 손에 검이 생겨났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검이 아닌, 펜싱시합용 검이.
“이건.”
새하얗기만 하던 지면에 돌연 기다란 피스트가 생겨났고.
놀라서 발을 움찔한 순간, 발바닥에 닿은 지면에서 빨갛게 불이 들어왔다.
‘펜싱 경기장?’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내 옷차림 또한 바뀌었다.
던전에 들어올 때 입고 있던 버프코트가 아니라, 펜싱용 방호구와 펜싱 마스크 차림으로.
맞은편 피스트에 선 또 다른 세자르 역시 복장이 변했다.
이제는 펜싱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진 그가 검을 꼬나들더니 앙가르드 동작을 취했다.
[상대의 급소를 먼저 찌르는 쪽이 이깁니다.]
나 역시 준비 동작을 취하던 중, 들려온 안내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실전 검술이라는 의미다.’
점수를 얼마나 내느냐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상대의 목숨을 빨리 취할 수 있느냐에 모든 것이 달린 승부.
‘마치 날 위해 만들어진 관문 같은걸.’
아직도 현대의 스포츠 펜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게 현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듯하지 않은가.
그 점을 되새기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저 데칼코마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지금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거다.
···제일 치명적인 급소를 한 번에 찔러, 승부에서 이기는 것.
안내하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에 부 프레(준비됐습니까)?]
입 안으로 ‘위(예)’라고 중얼거리며 칼을 들어올렸다.
그 끝을 또 다른 세자르의 눈동자로 향한 순간,
호각이 울림과 동시에.
[알레(시작)!]
부웅!
허공을 가른 두 개의 검이 맞부딪쳤다.
챙! 캉!
‘또 다른 세자르’와 첫 합을 겨루자마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스윽.
그것은 또 다른 세자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
“···.”
마치 거울 속의 나와 겨루는 듯한 착각은,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
상대의 빈틈을 기다리며 부드럽게 스텝을 밟기 시작하자.
···또 다른 세자르 역시 나와 똑같은 스텝을 밟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상대는 나와 똑같은 전법을 구사할 뿐 내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니까.’
자세를 낮춘 채 상대를 주시하며 끝없이 스텝을 밟는다.
한 쪽이 자연스레 들어가면.
‘마르슈 팡트(전진 공격)!’
다른 한 쪽이 자연스레 물러난다.
‘롱프르(후퇴)!’
물러났던 쪽이 들어가면, 이번엔 반대편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춤을 추듯 끊김 없이 이어지는 스텝.
리듬감이 느껴질 정도의 유려한 풋워크.
“···.”
그렇게 서로의 빈틈을 노리며 규칙적으로 발을 놀리던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여기다!’
상대의 가슴팍을 노리고 들어간 검이-
챙강!
곧바로 되받아쳐졌다.
‘강하다.’
스피드도 스피드지만, 받아치는 힘이 상당하다.
지잉 하고 검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에 손목이 시큰해질 정도.
‘세자르의 육체가 많이 강해졌군.’
결과적으론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리 달갑지가 않다.
또 다시 한 걸음 물러선 그와 내가 수 읽기에 돌입했다.
‘역시, 에페 선수다 이거로군.’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나는 사브르나, 엄청난 속도로 공방이 이뤄지는 플뢰레와 달리.
에페는 가장 느린 동시에, 가장 직관적으로 흘러가는 종목이다.
수 읽기와 견제.
즉 상대의 다음 수를 사전에 예측하고,
그에 걸맞은 반격의 수를 찾아 곧바로 실행하는 것이 핵심.
“···.”
하지만 빈틈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가짜 세자르 역시 마찬가지로, 쉽게 날 찌르고 들어오지 못했다.
‘체력이 고갈되고 있다.’
서로 견제만 하는 상태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두꺼운 방호구 아래서 땀이 비오듯 흘렀고, 호흡이 차츰 거칠어졌다.
잔뜩 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이 살짝 흐트러졌을 때.
부우웅!
가짜 세자르의 검이 번개 같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허억.’
뾰족한 검 끝이 시야를 가득 채우듯 거대해 보인다.
섬뜩하게 빛나는 금속이 나를 압도해오던 그 찰나의 순간,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
‘롱프르(후퇴).’
갑작스러운 위기로 사고 회로가 뒤엉킨 두뇌와는 달리,
토할 정도로 계속해온 수년 간의 반복 훈련에 익숙해진 몸은-
챙강!
뒤로 빠지는 동시에 상대의 검을 쳐냈다.
‘머리를 찔릴 뻔했군.’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자,
최고조에 다다랐던 긴장감이 극심한 피로로 몰려왔다.
“허억, 허억···.”
“후우, 후우···.”
나와 가짜 세자르 모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둘 다 여간해서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지독할 정도의 승부 근성도,
토하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부치는 것 역시 똑같았다.
‘원작의 팰러스가 고전했던 것도 이 때문이겠군.’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상대와 겨룬다는 것.
허점을 서로 다 아는 만큼 쉽사리 점수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만큼 답보 상태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에페 종목의 특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은 만큼···.
‘경기의 흐름을 뒤집어야 한다.’
이제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다스리며 눈앞의 상대를 주시했다.
나와 똑같은 발놀림, 비슷한 정도로 거칠어진 호흡을 보이는 펜싱마스크 속의 세자르를.
“후우, 후우.”
경기에 임할 때의 내가 떠올랐다.
단 한 점도 내어줄 수 없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머리를 굴리고,
가끔은 너무 굴린 탓에 패착에 이를 때도 있던 과거의 내가.
‘저 세자르는 과거의 나인가 지금의 나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곳에 와서 많이 변했다는 것.
···목숨을 건 진검 승부에선, 지나친 수 싸움보단 때로 과감한 수를 던질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으니까.
‘핵심은 점수가 아니라, 목숨을 노리는 것.’
인간의 신체 부위에서 가장 약하면서도 치명적인 곳이 어디일까.
상대를, 아니 ‘또 다른 나’를 죽일 수 있는 급소를 찾으며.
타닥, 타닥.
타닥, 타닥.
나는 규칙적인 스텝을 이어나갔다.
가짜 세자르의 발놀림이 아주 살짝 느려진 순간-
‘마르슈 팡트!’
나는 거침없이 검을 내질렀다.
···내 가슴팍을 상대에게 그대로 노출하며.
부우웅!
“흐앗!”
당황한 세자르가 신음하며 반격의 검을 뻗어왔지만.
나는 그의 검에 찔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사하며-
‘아따끄(공격)!’
푸와악!
그의 목을 찔렀다!
“···!”
펜싱 마스크 너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목을 찌르고 들어간 가느다란 검날이 팽팽하게 휘어졌다.
강력한 힘에 검 끝이 연약한 피부를 뚫고 들어가려던 순간-
[시합 종료. ‘방문객’ 세자르 승리!]
시합 결과를 발표하는 목소리와 함께, 가짜 세자르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이건 무슨.”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숙이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맨손이 보였다.
펜싱 마스크와 방호구 또한 사라진 후였으니.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는데, 안내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 외로 훌륭하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어투에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는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꽤 많이 성장했잖아? 인간은 어리석다고 들었는데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닌가 보지.]
“잠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느니.
그새 꽤 많이 성장했다느니.
내가 ‘소설 속 인물’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안내 목소리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세자르 레핀. 너는 세 번째 관문을 아주 훌륭하게 통과했다.]
[이곳에서 내보내주지.]
화아앗!
눈앞에서 빛이 일었고.
“도련님?”
“주군! 괜찮으신가요.”
···눈을 떠보니 관문 밖, 동굴 안이었다.
* * *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디터와 발닉이 나를 걱정 반, 기쁨 반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것이 보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그 말에 두 사람이 씩 웃었다.
“안에서 승부하시는 것 봤습니다, 도련님. 그새 검이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던데요.”
“역시 우리 주군은···.”
두 사람의 대화가 ‘세자르 도련님에 대한 칭송’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기 직전.
나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저 안에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글쎄요. 한 30분 정도?”
“앞선 두 관문 때와는 좀 달랐습니다, 주군.”
30분이면 내가 체감한 시간과 얼추 비슷하다.
이번 관문은 리얼타임으로 시간이 흐른 걸까.
‘그건 그거고.’
던전 ‘숲의 수호자’의 관문은 총 세 개.
마지막 관문까지 무사히 공략을 마무리했으니 던전 공략은 이것으로 종료다.
이제는 보상이 주어질 차례.
“디터, 발닉.”
강제로 ‘정산소’로 끌려가기 전, 나는 두 사람에게 얼른 중요한 정보를 설명했다.
“우린 관문 세 개를 전부 통과했다. 곧이어 ‘정산소’로 가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거야.”
“오, 드디어 부자가 되는 겁니까!”
“역시 주군 말만 따르면 두려울 게 아무것도···.”
“거기서 찾아봐야 할 게 있다.”
잔뜩 흥분한 두 사람은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도 할 게 남아 있는 겁니까?”
“뭐든 말씀하시죠, 주군.”
“그건···.”
나는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아기 요정이다.”
“···?”
‘아기 요정’이라는 단어에 얼떨떨해하는 디터와 발닉.
나는 그 둘을 번갈아보며 진득하니 웃었다.
“고대 종족 중에 ‘노움’이라는 요정이 있다는 거 들어봤나?”
“들어는 봤는데···.”
“노움이 진짜로 있단 말씀입니까?”
이런 반응이 보통이긴 하지.
이 세계관에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고대 종족은 역사서나 민간설화에나 등장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이 던전을 지키는 숲의 정령들은 태어난 지 백 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노움을 데려와 이곳 정산소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
“···강제노동이요?”
“그래. 백 살짜리 노움은 인간으로 치면 두어살 먹은 아기에 불과하지.”
“이런 못된 놈들!”
디터는 분통을 터뜨린 반면, 발닉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팀의 유일한 상식인다운 지적이었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원작에 노움이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까부터 이런 게 눈앞에 떠 있었거든.
『<왕도의 대가> 설정파일 - 41. 노움
설명 : 인간이 유레키아 대륙에 나타나기 전, 거대한 지하 문명을 구축한 난쟁이 요정. ‘대전쟁’에 패배해 멸족의 위기에 처했다.
보석과 금을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에, 살아남은 소수의 어린 노움들은 정령들에게 붙잡혀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다.
비고1 : 웃으면 몸에서 금화가 나온다.
비고2 : 일정 주기마다 ‘순간이동’ 능력을 쓸 수 있다.』
이 설명을 본 순간, 나는 원작의 팰러스 일행이 ‘정산소’에서 보상을 받던 장면을 떠올렸다.
정령들에게 극찬을 받고, 모든 관문을 통과한 대가로 무수한 금과 보석을 받는데.
‘그 금과 보석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여기 설정파일에 나와 있는 어린 노움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웃으면 몸에서 금화가 나오고, ‘순간이동’ 능력까지 쓸 수 있다라···.
비고에 나온 내용들을 곱씹어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보상은 언제나 좋다. 아니, 옳다.
하지만 거위가 낳는 황금알을 받길 기다리기보다는···
황금알을 낳는 그 존재를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든다면?
‘굳이 준다는 보상만 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