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20화 (20/176)

얼룩이의 새로운 이름

주군이 말한 대로만 하면 된다.

나무 아래 깔린 생명체를 구해주라고 적혀 있었으니, 뱀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나무를 들고 있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다.

‘설령 내가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마음먹은 디터는 나무를 들어올린 두 손을 굳건히 유지했다.

이제 뱀은 쉿쉿거리며 그의 뺨 근처로 온 터였지만, 디터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앗.”

한 번 더 기합을 넣으며 버티던 디터의 뺨을-

날름, 하고 핥은 뱀이 스르륵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

디터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뱀이 제게서 멀어지니 식은땀이 잔뜩 나 있던 것을 깨달았다.

[1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 * *

거대한 나무도, 뱀도, 찌는 듯한 태양과 사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벽도··· 사라지는데요?”

얼룩이의 말마따나 투명 벽이 사라지며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느샌가 동굴의 모습으로 돌아온 풍경 한가운데에 디터는 멍하니 서 있었다.

“디터!”

“성공이다, 성공! 네가 해냈어!”

한순간 휘청대는 디터를, 얼룩이가 무사히 붙잡았다.

“이 녀석 많이 긴장했나 본데. 이마에 식은땀이 다 나고 말이야.”

“고생했다, 디터.”

내 말에 디터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성공한 거··· 맞나요?”

“그럼.”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씩 웃어 보였다.

“완전 대성공이야.”

“후우···.”

그렇게 디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른 것도 잠시.

곧바로 다음 관문이 나타났다.

[두 번째 시험 ‘사냥의 명수’

셋 중 거친 곳에서 가장 잘 버티는 사람을 보내시오.]

‘사냥의 명수’라는 제목을 보더니 디터는 자기가 한 번 더 가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이번 관문에는 얼룩이가 나서기로 했다.

“이봐, 디터. 내가 네놈보다 훨씬 뛰어난 사냥꾼이란 걸 보여주지.”

자신만만하게 껄껄 웃는 얼룩이에게 나는 미리 챙겨둔 것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도련님?”

“혹시 몰라서 말이야.”

육포와 마른빵 등, 며칠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든 주머니였다.

이번 시험은 지구전이 될 가능성이 크니까.

내 우려 섞인 눈빛에 얼룩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래 봬도 제가 온갖 험한 곳을 구르던 몸입니다.”

“그래도 한순간도 경계를 늦춰선 안 돼. 온갖 맹수가 나올 수 있어.”

“흐흐, 저도 어디 가면 맹수처럼 생겼단 얘기를 들을 정도인데요.”

···그건 부정할 수 없네.

웃지 않을 땐 불곰, 웃으면 살찐 고양이처럼 보이는 얼룩이가 씩 웃으며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등 뒤로 닫힌 나무 문은 아까 전처럼 투명한 거울처럼 변했고.

“얼룩이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군요.”

나와 디터는 말없이 얼룩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문 너머로 나간 얼룩이의 눈앞에 초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정글이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흑표범을 사냥해 그 고기를 구우시오.]

그 목소리는 투명 거울 너머에 있는 우리에게도 들린 만큼, 디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흑표범이라고요? 그런 맹수를 어떻게 얼룩이 아저씨 혼자 잡습니까.”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원작에서도 똑같은 미션이 나왔던 만큼, 쉽지 않을 일이 되리라고는 예상했었으니까.

“맹수도 보통 맹수가 아니에요. 귀도 밝고 경계심이 엄청 강한 동물인데···.”

하지만 우리가 초조해하는 것과는 달리, 투명 거울 너머의 얼룩이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니, 도리어 그 말을 듣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엄청 바쁘게 움직이시네요.”

긴 싸움이 될 거라 예상했는지 자신이 거처로 삼을 만한 곳을 정리하고.

정글의 맹수들로부터 몸을 숨기는 동시에 그들을 지켜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고.

“구덩이를 파는 건가요?”

“함정을 만드려나 본데. 저건··· 덫인가?”

‘이세계의 베어 그릴스’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들었다.

그런 한편 내가 준 주머니 속의 음식을 콩알만큼 잘라먹고, 물도 한두 모금씩만 마셨다.

‘저게 저 사내의 생존법인가.’

그 모든 행동은 거울 이쪽에 있는 우리에게는 아주 빠르게 느껴졌으나···.

“실제로는 몇 시간에 걸쳐서 하는 중일 거야.”

내 말에 디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과 저쪽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더군요.”

그리고 이쪽에서 약 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며칠이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을 때-

“···잡았어요.”

“뭐?”

디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얼룩이 아저씨가 흑표범을 잡았다고요!”

그 말대로였다.

얼룩이가 놓은 덫에 흑표범은 걸려버렸고.

다리를 다쳐 끙끙대는 놈에게 다가간 얼룩이는,

푸욱!

“헐.”

“···맙소사.”

단 한 방의 칼질로,

맹수의 경동맥을 끊어버렸다.

“···저보다 훨씬 잘하시네요.”

일전에 보여준 도축업자 같은 손놀림으로 흑표범의 가죽을 벗긴 것은 물론이요.

부싯깃으로 능숙하게 불을 피우더니 언제 챙겨갔는지 알 수 없는 향신료까지 뿌려가며 표범 고기를 구웠다.

‘베어 그릴스보다 더 능숙한 것 같은데···?’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보자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는 기분이다.

“자, 정령님들 드시지요.”

얼룩이가 구운 고기들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사라졌다.

[너무 맛있어! 시험은 통과야! 완전 통과!]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감탄성을 내뱉은 순간.

눈앞의 투명 거울이 나무문으로 되돌아왔다.

무척이나 어려울 줄 알았던 시험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렸다.

“···.”

“···.”

나와 디터가 아무 말도 못한 채 서로의 눈만 바라보는 사이.

저 안쪽에서 얼룩이가 유유히 걸어나왔다.

“고기를 조금이라도 챙겨나오려고 했는데, 굽는 족족 사라지더군요.”

근데 그 모습이, 되게 낯설다.

“···도련님? 왜 그렇게 보십니까?”

“얼룩이 아저씨, 그 안에서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디터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던 얼룩이가 대답했다.

“글쎄, 한 2주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사이 먹은 거라곤 육포 몇 쪽과 빵 몇 덩이가 전부였으니 살이 쪽 빠지는 것도 당연지사.

덕분에 이제는 외모도 베어 그릴스 뺨치는 느낌이다.

자기 얼굴을 더듬거리던 얼룩이도 깜짝 놀랐다.

“오, 이거 얼굴이 반쪽이 됐는걸요.”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얼룩이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

‘2주가 뭐야,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비상식량이 잔뜩 든 주머니를 준 것도 그 때문이다.

나 역시 흑표범이 상대하기 얼마나 까다로운 맹수인지 알 뿐더러···.

‘정글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지 잘 아니까.’

그 점은 원작에 아주 자세히 묘사되었다.

식량과 물을 구하기 어려울 뿐더러, 독사와 악어 등 온갖 위험한 맹수가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말이지.

그래서 팰러스의 가신이 택한 공략 방법은 이것.

‘최단시간에 돌파한다.’

불, 물, 바람, 흙이라는 4대 원소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이능자였던 만큼,

흑표범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파이어볼!’

화염마법으로 맹수를 통으로 구워버렸고.

정령들은 새카맣게 타버려 고기가 너무 맛없다며 툴툴거렸다.

‘그런데 이걸 평범한 인간이 2주 만에 해냈다고?’

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얼룩이를 지그시 바라보자, 얼룩이가 씨익 웃는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웃으니까 좀 무서운걸.

“살이 빠지니 이 얼룩이도 꽤 봐줄 만하지 않습니까, 허허.”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는 겁니까?”

“응?”

디터 역시 그런 의문을 느꼈는지, 내가 던지고 싶던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베테랑 용병이라 해도 저런 데서 살아남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얼룩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내가 유목민 출신이거든.”

그 말에 디터가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왕도의 대가>에서 유목민은 이런 설정이었지.’

유레키아 대륙을 정처없이 떠도는 유목민들.

특정 국가의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은,

사막이나 정글, 고산지대 등 사람이 살기 힘든 험지에서 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일부는 왕국에 들어와 섞여 살기도 하는데.

‘유목민 출신임이 밝혀지면 차별과 질타의 대상이 된다고 했던가.’

어색한 침묵이 잡으려던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난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얼룩이, 라는 별명 외에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얼룩이는 내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제 이름을 대부분 제대로 발음하질 못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다들 ‘얼룩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래도 알고 싶은데.”

내 말에 얼룩이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씩 웃어 보였다.

“굳이 바라신다면야. ···제 진짜 이름은, 자다니자하 발니크 리바입니다.”

“자다니··· 뭐?”

얼룩이가 클클거렸다.

“그러게 어렵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렵긴 어렵네.”

“우리 말로 풀이하자면 ‘사자의 탐욕스러운 파수꾼’이란 의미지요.”

사자의 탐욕스러운 파수꾼, 이라는 표현이 몹시 귀에 익는다.

원작에 나왔던 내용인가?

하지만 얼룩이는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엑스트라인데.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그러면.”

나는 얼룩이를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발닉, 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일종의 애칭처럼 말이지.”

“···.”

잠시 멍해 있던 얼룩이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 발닉, 그거 좋군요!”

얼룩이, 아니 ‘발닉’은 내가 지어준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가 유목민 출신이라는 얘기에 움찔했던 디터가 웃으며 말했다.

“발닉 아저씨,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도 잘 부탁한다, 디터. 이거 왠지 새출발하는 기분인걸?”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 덕분에 사기가 진작되었을 즈음.

굳건히 버티고 있는 다음 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관문이었다.

[세 번째 시험 ‘검술 시합’

초대장을 받은 장본인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의사항 :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음.]

경고문을 본 디터와 발닉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혹시-”

“내가 들어가야 하는 거 맞아.”

발닉의 말을 자르며 선수를 쳤다.

“하지만 주군, 검술 시합이라는 표현을 보면···.”

발닉이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냐, 는 뒷말을 삼킨 디터에게 나는 재차 말했다.

“초대장을 받은 장본인만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기 적혀 있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아니, 아닙니다!”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그럼에도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피식 나온다.

‘아무리 내 실력을 입증해보여도 이 두 사람 눈엔 아직 애송이라 이건가.’

이 몸의 알맹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20대 후반이라는 걸 알 리는 없고.

저 둘에게는 아직도 챙겨줘야 할 것이 많은 도련님으로 보일 테니.

한편, 원작의 팰러스는 ‘발군의 검술 실력자’답게 자신만만했지만,

주의사항의 내용을 간과했던 탓에 호되게 당했다.

···라고만 적혀 있다.

앞선 두 개의 관문과는 달리, 시험내용이 상세히 묘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번 관문만큼은 내 힘으로 해내야 한다.’

그 사실에 긴장은 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 진짜라면-

나만큼이나 본인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도 드물 테니까.

“다녀올게.”

나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세 번째 관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새하얀 공간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이게 무슨···.”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벽이고 바닥이고 천장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순백의 공간.

눈이 부신 나머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왔던 아공간의 느낌이군.’

바닥의 재질이 대체 무엇인지 내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앞선 두 관문 역시 문을 넘어선 순간 완전히 다른 공간이 나타났었지만.

‘그래도 거기는 평범한 자연 풍경이었잖아?’

이렇게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너무도 낯선 공간 탓인지 안으로 걸어들어갈수록 긴장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빨라지는 호흡을 진정하고자 발걸음을 멈춘 순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속의 나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시오.]

승리를 쟁취하라는 건 알겠는데 ‘거울 속의 나’와 싸우다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해하는데, 돌연 눈앞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너는···.”

이십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문제의 인영人影과 마주선 순간.

나는 신음했다.

···그것은 내 모습, 아니 세자르의 모습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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