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새끼라도 사자는 사자인 법
공작부인 리아나가 공작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로건! 로건! 이럴 리가 없어요!”
책상 뒤에 앉아 있던 로건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들어오기 전엔 노크를 해야 한다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줄은 몰랐소만.”
“로건, 말 돌리지 말아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얼굴의 리아나가 표독스럽게 대꾸했다.
“바야르는, 바야르는 무고해요! 그가 노바스 가문과 내통했다니 말도 안 되는-”
“증거가 나왔잖소.”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차분하게 응수했다.
“노바스 가문의 인장이 찍힌 밀서.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
“그대 역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소?”
공작부인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 바야르의 짐에서 밀서가 나온 것도, 그 밀서에 노바스 가의 인장이 찍힌 것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도 딱딱 들어맞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누군가가 이 모든 음모를 꾸몄으며 자신과 바야르는 거기에 희생된 장기말이 아닐까 싶은···.
그 순간, 실마리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이 모든 일이··· 세자르를 내보낸 것과 관련이 있나요?”
“···그게 무슨 소리요?”
“나와 상의도 없이 그 아이의 입학을 결정하지 않았나요. 혹시 이번 일이 세자르와 무언가 연관이 있다면-”
“그만.”
공작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일을 그대와 상의해야 하는 이유는 조금도 없었소. 그러니 말꼬리를 잡는 건 그쯤 하도록.”
그 정도 해두라는 무언의 압박.
공작부인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한 채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나간 뒤 닫힌 문을 바라보며 로건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리아나 드 레핀.
그녀와 잠깐이라도 대면하고 나면 늘 이렇게 기운이 빠진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랍에 넣어뒀던 편지를 다시 꺼내보았다.
『친애하는 공작각하께.
공작부인이 ‘제 출생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듯합니다. 제게 ‘진짜 어미’가 누구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미 그녀의 암살 시도를 한 차례 피해낸 참이고, 그 수하인 바야르 경이 제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한시바삐 이곳으로 돌아오시길 간청합니다.
존경심을 담아, 세자르 드림.』
그 편지를 받은 당시, 그는 제 눈을 의심했었다.
일단은 세자르, 그 존재감 없고 심약한 아이가 자신에게 다른 방법도 아닌 전서구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며.
‘제 출생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단 몇 명만 알고 있는 그 중차대한 비밀을, 세자르 본인 또한 알고 있다는 뉘앙스라는 것에 놀랐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며칠간 쉴새없이 말을 달려 돌아왔고.
그러길 잘했다는 판단을 내린 터였다.
‘세자르가 그 몇 달간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을 줄이야.’
아카데미 정도야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은신처일지 모르겠지만,
이능자들을 가신으로 데려오겠다는 포부를 밝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왕족들이나 고위 귀족들조차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러한 이능자들의 정보다.
대륙을 관통하는 정보망을 갖춘 길드의 수장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정보를, 하물며 서자 출신의 세자르가 쉬이 얻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은.
‘쉽진 않겠죠.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단언하던 세자르의 모습을 공작은 다시금 떠올렸다.
곱상하고 귀티 나는 얼굴에, 유난히 새카만 머리색이 눈에 띄는 귀족적 인상의 소년.
어딘가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푸른 눈동자까지···.
“그 남자를 꼭 빼닮았더군.”
아무리 어려도 사자는 사자인 법.
이제 새끼사자가 다른 사람이 된 걸로도 모자라 일국의 공작을 쥐고 흔들려하는 참이었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미끼까지 던져가면서.
‘바야르의 방을 수색하실 때 나무함 안을 살펴봐주십시오. 제가 각하께 드리는 선물이 있을 겁니다.’
그 선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왕국의 제2공작가라 불리는 노바스 가문.
레핀 가와는 정치 노선부터 시작해 사사건건 대립하는 그곳과 내통한다는 증거가 담긴 밀서가 바야르 경의 소지품에서 발견되었으니.
“그리고 그 바야르 경은 아내의 사람이고 말이지.”
이를 빌미로 그는 아내 리아나의 입김을 상당히 약화한 터였다.
비록 리아나 자신은 위조된 밀서라고 수없이 주장했지만, 가문의 인장이 떡하니 찍힌 마당에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레핀 공작은 이 새끼사자가 쳐둔 덫에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걸려들었음을, 아주 기분 좋게 깨달았다.
“이런 덫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
‘대체 누가 세자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걸까.’
가짜 밀서를 만들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더욱이 노바스 가처럼 위세를 떨치는 가문의 인장들은 철저한 보안 하에 관리가 되기 마련.
레핀 공작은 자신보다 훨씬 힘 있는 자, 혹은 강력한 뒷배경을 지닌 누군가가 세자르의 배후라고 확신했다.
* * *
아카데미가 자리한 수도 위베른 시까지는 말을 타고 일주일이 꼬박 걸린다.
그러나 얼룩이와 디터는 자신만만하기 그지없었으니.
‘닳고 닳은 용병 출신이라 일주일 야영하는 건 장난이지요.’
‘말을 타고 사냥터를 워낙 자주 쏘다녀서요. 게다가··· 아시겠지만 길거리 생활에는 이골이 난 터라.’
이 두 사람은 말을 타는 게 처음인 나를 몹시 걱정했던 터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말 타는 걸 대수롭잖게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마구간지기 말로는 도련님이 말과 좀 친해지셨다고 했는데···.’
말은 어떻게 좀, 탈 수 있으신가요?
라고는 차마 묻지 못하며 말 끝을 흐리던 두 사람은.
“···도련님?”
“주군!”
날 때부터 말을 타고 태어난 듯 자연스럽게 말을 모는 내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승마하는 거 첨 봐?”
이래 봬도 나 근대5종 선수였다고.
그것도 장애물 경주를 밥 먹듯이 연습했지. 말을 랜덤으로 배정받는 만큼, 그 어떤 말도 탈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게 기본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힘들어하실 줄 알았는데.”
제가 도련님을 과소평가했나 보군요, 하며 클클거리는 얼룩이.
“역시, 역시 우리 주군은···.”
-라는 말로 포문을 열어 온갖 찬양을 쏟아내기 시작한 디터.
그에 질세라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맞장구를 치는 얼룩이.
두 사람은 ‘역시 우리 도련님이 최고’라는 주제로 신나게 떠들어댔고.
‘아, 좀 제발···.’
어쩐지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덧 점심 때가 다가왔다.
“배도 슬슬 고프고 하니, 이쯤에서 잠시 쉬며 끼니를 해결해볼까요.”
얼룩이의 말에 우리는 근처 나무에 말을 묶고는 자리를 잡았다.
얼룩이는 조리장 벤이 이것저것 싸줬다며 점심 식사를 차렸다.
내가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디터가 숲 뒤편을 뒤돌아본다.
“어, 토끼가 있네.”
그 말대로 잿빛 털의 토끼 한 마리가 이쪽을 보며 귀를 쫑긋거린다.
많이 해본 듯한 솜씨로 디터가 작게 휘파람을 불자, 토끼가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호오.’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라 들었는데, 토끼가 제 발로 다가오는 건 처음 본다.
“안녕, 토끼야.”
디터가 생긋 웃더니 토끼에게 손을 뻗었다.
토끼는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그의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동물들이 디터를 잘 따르는구나.’
털이 보송보송한 게 아주 귀엽네.
디터도 동물을 좋아해서인지 토끼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나 역시 덩치 큰 사내와 자그마한 토끼의 부조화를 아빠 미소를 짓고 바라보는데.
“그럼 잠시 실례.”
디터는 선량하게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뚜욱, 소리를 내며···.
“···어?”
토끼의 멱을 따버렸다.
충격 받은 내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는데.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하시죠, 주군.”
“···.”
야, 내가 고기를 좋아하긴 한다만 이건 좀···.
디터는 순수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맛나게 구워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멀어지는 디터를, 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어, 그게 뭐야?”
“방금 잡았어요.”
디터의 손에 들린 축 늘어진 토끼를 본 얼룩이가 반갑게 외쳤다.
“이야, 신선한 고기를 먹겠는걸.”
두 사람은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특히 얼룩이는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전문 도축업자 같은 손놀림을 선보였으니.
“이걸 이렇게 해주고··· 저렇게 하면.”
“얼룩이 아저씨 되게 잘하시네요.”
“용병으로 십 몇 년을 구르다보면 이 정도는 누구나 하거든. 자, 봐라. 이렇게 하면··· 쫙 벗겨지지.”
“와.”
“참 쉽지?”
-라고 말하는 얼룩이를 보니, 현생의 유명인 하나가 떠올랐지만···.
‘아아, 역시 21세기의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구나.’
나는 여전히 섬뜩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불을 피워볼까.”
얼룩이의 말에 나는 오늘 새벽, ‘도전과제 보상’으로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도전과제 ‘이런 게 바로 깨소금이지’ 달성! - 공작부인 리아나에게 말로 한 방 먹여주었습니다.]
[보상 ‘확대경’을 수령했습니다.]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쓸 법한 돋보기와 비슷하나,
금세공이 되어 있어 화려한 고급품으로 보이는 확대경.
어디에 쓰라는 건지 내심 의문이었는데···.
‘여기에 쓰라는 건가?’
주변의 낙엽을 대충 그러모은 뒤, 4차원 주머니에서 꺼낸 확대경에 햇빛을 열심히 모았다.
‘해가 좀 더 쨍쨍하면 좋으련만.’
만화에선 순식간에 불이 피어오르던데, 현실에선 불이 붙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도 들고 있어 팔이 아플 지경인데, 얼룩이가 이쪽을 슥 돌아보며 묻는다.
“뭐 하십니까, 도련님?”
“아, 그게··· 불을 좀 붙여보려고.”
“그 유리알 같은 걸로요?”
얼룩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금속으로 된 뭔가를 꺼낸다.
“제가 붙일 테니 도련님은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이놈의 부싯깃으로···.”
저게 부싯깃이구나.
얼룩이는 한두 번의 동작으로 단번에 불을 붙였고, 모아둔 낙엽에 금세 불이 확 피어올랐다.
“···.”
어쩐지 민망해져 확대경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는 나를 보며, 얼룩이가 껄껄 웃었다.
“도련님도 허당 같은 모습을 보이실 때가 있군요.”
야, 굳이 지적하지 마.
어쨌거나 얼룩이가 야영의 달인이라는 말은 진짜인 것 같다.
노릇노릇한 고기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주군.”
“도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펼쳐진 광경이 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우와···.”
오리고기와 야채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에 갓 구워 포실포실한 빵과 신선한 과일.
그중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갓 잡은 고기.
야생고기라 누린내가 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냠.”
먹기 좋은 크기로 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순간,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리 맛있어?”
절로 터져나오는 감탄사에 디터에 조심스레 물었다.
“주군, 어떠신가요? 입맛엔 맞으신지···.”
“뭘 물어봐, 아주 맛있다니까.”
나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토끼 고기를 먹으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잠깐이라도 섬뜩하게 생각해서 미안하구나, 디터.’
뭔 놈의 고기가 이렇게 맛있지.
아니지, 고기는 원래 다 맛있긴 한 건데 이건 좀 더 특별하다.
입천장에 축복을 내리는 듯한 육즙은 말할 것도 없고. 향신료를 썼는지 알싸한 바질 향 덕분에 먹어도 먹어도 질리질 않는다.
살짝 짭조름하게 가미된 간까지 모든 게 완벽해···!
“허허, 도련님이 잘 드시니 기분이 좋군요.”
“주군이 드시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는 것 같아요.”
약골 도련님이 잘 먹는 모습에 저희가 더 뿌듯해하는 얼룩이와 디터.
그러나 저러나, 나는 간만에 맛본 ‘진짜 고기’의 맛에 환장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발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다.
“헌데 도련님, 이쪽이 아니고 저쪽 길로 가야 가까울 텐데요. 직선 거리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가야 오늘 안에 인가에 닿을 수 있다는 얼룩이의 말에, 나는 미리 그려둔 지도를 꺼냈다.
“그 전에 여길 들러야 하거든.”
“···?”
깊은 숲 속 한가운데에 X자로 표시해놓은 것을 보며, 얼룩이와 디터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둘 다 나 믿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띠우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부자로 만들어주지.”
고대 던전 ‘숲의 수호자’.
그 던전을 공략하는 일은 이 두 사람 없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