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빌어먹을 곳에서 탈출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주일을 보낸 뒤, 여느 때처럼 연무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디터의 오두막에 잠시 들렀다.
“디터, 나는 왕립 아카데미에 갈 거다.”
그 말에 디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나는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공작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물론 기밀로 유지해야 하는 사항은 쏙 빼놓고 말이지.
“역시 주군이십니다.”
···역시 주군이라니 대체 뭐가?
입만 열면 나를 칭송하려는 디터의 말을 자르고, 본격적인 용건을 전했다.
“그러니까 도련님 말씀은··· 아카데미로 가실 때 절 데려가시겠다, 이 말씀이신가요?”
“어, 응. 그게 맞긴 한데···.”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
부담스럽단 말이야.
“저, 저 같은 놈에게 그런 영광을···.”
“음, 디터. 영광이란 단어 선택은 좀 지나친 감이 있지 않은가 싶은데.”
“무식하게 힘센 것 빼고는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저란 놈을 이렇게···.”
감동에 젖어 훌쩍이기 시작한 디터를 보며, 나는 어금니를 꽉 문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울지 마. 울면 가만 안 둘 거야.’
다행히 디터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들소 같은 몸집의 사내가 터뜨린 울음소리에 연무장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네가 내 종자squire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디터.”
내가 뭐 정식 기사도 아니니 누군가를 종자로 들이기 그렇긴 하지만.
왕국법상에 그런 게 있다. 귀족의 종자로 몇 년 이상 활약한 평민은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고.
“비록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지만, 각하의 안배 덕분에 서자 자격으로 족보에 올라간 상태다. 반쪽짜리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얘기지. 즉···.”
디터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몹시 긴장한 눈치였다.
“난 네가 언젠가 기사가 되어 네가 지닌 능력을 십분 발휘했으면 좋겠다.”
“···!”
“각하의 사병이자 전문 용병 출신인 ‘얼룩이’가 우릴 호위할 거다. 너는 그의 보호를 받되, 틈나는 대로 그에게서 검술을 전수받는 걸 목표로 하도록.”
아카데미는 이곳 레핀 영지로부터 일주일 정도 말을 달려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 사이에 험지는 없지만, 숲이나 산을 지날 땐 종종 도적의 습격을 받을 수 있으니 숙련된 호위가 필요한 상황.
때문에 공작에게 병사 한 명을 빼달라고 요청해둔 터였다.
‘원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그 말에 나는 ‘얼룩이’의 이름을 댔고, 공작은 흔쾌히 승낙했다.
얼룩이 본인 또한 내 요청을 무척 달가워했으니.
‘도련님을 따라 아카데미로! 생각만 해도 흥이 나는군요. 간만에 야영을 간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근거립니다.’
다른 병사들 말로는 얼룩이야말로 야영과 생존의 전문가란다.
허허벌판 사막에 던져도 살아남을 사내라며.
‘이세계판 베어 그릴스다, 이 말이지.’
어쨌거나 디터에 관한 나의 큰 그림은 이렇다.
종자 자격을 걸어둔 채 얼룩이에게 검술의 기초를 배우고,
최종적으로는 왕립아카데미의 군사학부 전형에 응시하는 것.
‘군사학부는 대부분이 하급귀족 아니면 평민이라고 했지.’
거기야말로 실력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는 공정한 세계라고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침을 꼴깍 삼키며 내 말을 기다리는 디터에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왕립아카데미의 군사학부에 들어가, 나를 보좌할 고급 장교가 되어주면 좋겠다.”
“···.”
디터만 눈만 둥그렇게 뜬 채 아무 대답도 못했다.
“왜 대답이 없지? 자신이 없나?”
“그, 그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 디터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말을 잇는다.
“사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뭐라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답해도 좋아. 어쨌거나 네가 결정하는 거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난 디터는,
방금 전과는 무언가 사람이 달라진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아카데미도 아카데미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던전 공략을 준비해야 한다.’
지난 주.
도전과제 세 개를 연달아 달성한 뒤, ‘일타삼피’에 성공했다며 특수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그때 받았던 보상이 바로.
[고대던전 ‘숲의 수호자’의 초대장을 수령했습니다.]
인간이 있기 전에 존재했다는 최초의 지적 생명체, ‘고대종족’.
그들이 인간과의 전쟁에서 밀려 은신처로 택했다는 공간이 바로 이 고대 던전이다.
‘던전에 입장했다고 다가 아니지.’
그 안에서 각종 시험과 관문을 통과한 자에게만 어마어마한 보상을 준다는 것이 바로 이 고대던전에 숨겨진 이야기.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 동굴 같은 거랄까.’
원작에서는 팰러스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초대장을 간신히 손에 넣는다. 본인이 직접 구한 건 아니고, 부하들을 탈탈 털어서.
초대장에 그려진 지도상의 위치로 보건대, 팰러스가 공략했던 던전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대박이지, 대박.”
한 부대의 강자들을 이끌고 들어가도 빠져나온 것은 고작 한 줌의 병사가 전부일 정도로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소설에 묘사된 던전 공략법을 세세히 기억하는 터였다.
‘재주는 팰러스가 부리고 돈은 내가 버는 셈이 되나?’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겼다.
사흘 뒤 새벽에 출발하겠다고 디터와 얼룩이에게 얘기해뒀으니 그 둘도 알아서 잘 준비할 테고···.
“그다음엔 새로운 도전과제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
‘일타삼피’를 달성하면서 다섯 개가 전부 갱신된 도전과제 목록을 확인해보았다.
『도전과제 목록
-적에게 말로 한 방 먹여주었나요? (미달성)
-아기요정의 버튼을 눌러봤나요? (미달성)
-자객의 습격을 받아봤나요? (미달성)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나요? (미달성)
-친구의 비밀을 지켜줬나요? (미달성)』
“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자객의 습격’처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이 새로운 과제들 역시 내가 눈앞의 위기를 헤쳐나가는데 핵심적인 키워드가 될 거라는 것.
그리고 사흘 뒤.
나와 디터, 얼룩이는 드디어 아카데미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바깥 세계로 향하는 첫 걸음이라니 감개무량하군.’
물론 이곳을 벗어나 아카데미에 들어간다고 마냥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팰러스가 날 기다리고 있지.’
하지만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당하기 전에 피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나는 당하기 전에 먼저 치는 놈이다.
‘팰러스가 더 힘을 키우기 전에.’
아카데미에서부터 그놈의 싹과 잎을 잘라낼 생각이니까.
* * *
공작가를 출발하기 직전, 어둑어둑한 새벽.
내 방문을 두드린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세자르, 잠시 괜찮나요.”
문을 열고 들어선 공작부인 리아나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왜 갑자기.
“들어오십시오, 부인.”
“어머니라고 부르라니까요, 세자르.”
“···.”
“여전히 내가 불편한가 보군요. 설마 인사도 하지 않고 가려던 것은 아니겠지요.”
내 목숨을 끝장내지 못해 안달내던 상대가 어디 그냥 불편하기만 할까.
하지만 굳이 인사를 받아내고 말겠다는 태세이기에, 나는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나의 ‘인사’에 공작부인은 잠시 당황했지만, 평소의 스탠스를 잃지 않았다.
“떠나고 나면 한동안은 얼굴도 보지 못할 테니 이 어미가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가까워졌다.
뭐지, 이 여자?
‘혹시 비수를 숨겼다든가···.’
훅 풍겨오는 향기에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비수 대신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너, 왜 날 죽게 두지 않았지?”
의외의 질문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굳이 독사를 잡아 죽였냐는 거다.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독사가 나를 물었다면···.”
공작부인의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너로선 일이 더 편해졌을 텐데.”
···뭐야, 겨우 그걸 물으러 온 거였어?
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도 호감도 창은 뜨지 않는군.’
그럼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듯한데,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지금 나로서는 이 여자와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는 게 최선이니.
“글쎄요, 당신 하나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
“그래봤자 딱히 변하는 건 없으니 구했을 뿐.”
사실은 공작부인이 죽으면 나로선 일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캐릭터가 죽어나가는 <왕도의 대가>이지만, 주인공의 친어머니라는 설정상 공작부인은 꽤 오랫동안 활약한다.
핵심 조연인 그녀가 죽으면 원작이 너무 틀어지기도 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팰러스의 유일한 약점이지.’
원작의 후반부에서 팰러스의 적 또한 그 사실을 알고서는 공작부인을 암살한다.
팰러스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친어머니의 죽음’에 팰러스는 외려 각성하여 완성형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게 되니.
그런 중요한 수단을 여기서 이렇게 쉽게 죽게 둘 수는 없다, 이 말이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내 말을 좀 다르게 받아들인 듯,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부인은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소리죽여 던진 말에 부인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다니, 뭘···.”
“예를 들면, 당신이 어째서 날 죽이려고 하는지.”
공작부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거, 거짓말.”
“또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저 문 뒤에 서 있는 집사장 카를이야말로, ‘당신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
이번엔 정말로 놀랐는지 리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걸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
“열네 살 소년이 혼자 힘으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리아나의 눈이 충격받은 듯 커졌다.
멍하니 벌어져 있던 새빨간 입술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머리 회전이 빠른 여자니 여러 정보를 조합해 순식간에 이런 결론을 내렸을 터다.
‘세자르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아주 유력한 조력자가 내 배후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겠지.
뭐가 됐든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나는 그녀의 착각을 부추길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자중하십시오. 자꾸 나서서 뭔가를 하려 할수록 당신의 명을 재촉하는 일이 될 터이니.”
공작부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내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충고입니다. ···어머니.”
돌처럼 얼어 붙어 있는 공작부인을, 나는 피식 웃으며 지나쳤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반가운 메시지가 떴다.
[도전과제 ‘이런 게 바로 깨소금이지’ 달성! - 공작부인 리아나에게 말로 한 방 먹여주었습니다.]
“하하.”
이런 걸로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줄 몰랐네.
이번엔 뭘 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