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6화 (16/176)

보상이··· 오지는데?

공작부인이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몸은 좀 어떻소?”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공작의 모습에 부인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하군요.”

“그렇다니 다행이고··· 헌데 말이지.”

공작의 표정을 본 공작부인은, 그가 본론을 꺼내고 있음을 직감했다.

“사냥터에 뱀이 나오다니,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러게요.”

“보아 하니 그냥 뱀도 아니고 독사 같던데.”

공작의 말에 공작부인은 뜨끔한 모양이었지만 평정을 가장했다.

“독사라고요?”

“그렇소. 이렇게 대가리가 세모꼴로 생긴 놈들은 보통 독을 지니고 있지. 사람도 황천길로 보낼 수 있는 맹독을 말이오.”

공작은 공작부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소?”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요?”

“선친께 물려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뱀이 나온 적이 없는 이 숲에서, 갑작스레 독사가 나타났다는 게.”

“···.”

“그것도 내가 돌아와 처음 참석하는 가족행사에서 말이오.”

공작부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짚이는 거라도 있소, 부인?”

“글쎄요. 지금으로선 전혀···.”

공작부인은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있소만.”

그 다음에 이어진 말에 그녀의 평정심은 순식간에 박살 났으니까.

“아까 그 바야르라는 사내가 몹시 의심스럽더군.”

“그, 그게 무슨!”

“식사하는 내내 나를 흘긋거리던데.”

“바야르 경은 어디까지나 경호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그렇다면 언제든 뱀을 풀어놓을 기회를 노릴 수 있었겠지, 안 그렇소?”

공작부인이 뭐라고 변호의 말을 뱉어냈지만, 공작은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그자를 따로 불러내 탐문하겠소. 그의 방 또한 수색할 것이니.”

공작부인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 것을 본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집무실로 이동하며 곁의 하인에게 지시했다.

“세자르를 내 집무실로 오라고 하거라.”

* * *

공작의 집무실은 공작부인의 집무실보다 훨씬 컸지만 훨씬 검소했다.

화려한 태피스트리 대신, 벽에 덜렁 매달린 검과 방패가 장식품의 전부.

“왔느냐, 세자르.”

신이 나서 내게 말을 걸던 어제와는 달리, 공작은 상당히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말씀하시지요, 각하.”

“내가 왜 예정보다 서둘러 도착했는지 넌 알고 있겠지.”

공작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내가 손수 적어 디터를 통해 보낸, 바로 그 쪽지였다.

“여기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가?”

단지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질문임에도, 알 수 없는 압박이 느껴지는 중후한 위압감.

‘과연 정계 중심부에 있던 인물답군.’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원래의 세자르라면 벌벌 떨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거기에 살짝 양념까지 쳤다.

“첨언하자면, 최근 저는 알 수 없는 중독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중독 증세?”

“사흘간 배탈과 설사, 고열이 계속되었고 무엇을 먹든 족족 토해내야 했지요.”

내가 말하는 ‘중독 증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공작은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새였다.

“누군가 네 음식에 독이라도 탔다, 이건가?”

“전문가가 아니니 확언은 어렵습니다.”

나는 단정짓지 않았다. ···단정짓는 것은 내가 아닌, 공작의 역할이니.

생각에 잠겨 있는 공작에게 나는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헌데 각하. 제 진짜 어미는 누구입니까?”

공작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미간을 좁히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 어미는 ‘그곳에서’ 십 년 전에 죽지 않았더냐.”

사창가, 라는 말을 돌려 하는 공작.

“설마 내 아내가 네게 ‘진짜 어미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해서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출생에 정말로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각하.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뭐?”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제가 모를 줄 아셨냐는 얘기입니다.”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진 공작을 보며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모른다 대답했다 하지 않았나!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랬지요, 다만.”

“···.”

“공작부인의 앞에서 연기를 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이지요.

내가 미소를 짓는 것과는 정반대로 공작의 얼굴은 어두워지다 못해 납빛에 가까워졌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냐!”

아무래도 내 연기에 껌벅 넘어간 모양인데.

“글쎄요. 알 만큼은 안 달까요?”

사실은 좆도 모른다. 아는 거라고 해봤자 세자르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는 게 있다는 것 정도?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게 세자르뿐 아니라 팰러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 말이지.’

그놈의 비밀이 대체 무언지 모른다는 게 제일 큰 문제이지만.

하필이면 작가 놈이 제일 중요한 떡밥도 회수 안 하고 끝낼 줄 누가 알았겠나.

“세자르, 설마 지금 네가 날··· 협박하는 거냐?”

나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저처럼 힘없는 어린애가 무얼 믿고서 이 나라의 제1공작인 각하를 위협하겠습니까? 다만 제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

“···네 판단이 잘못되다니?”

나는 몸을 돌려 검과 방패가 장식된 벽으로 다가갔다. 레핀 가문의 가보로 추정되는 두 가지가 내 시선을 잡아끈다.

“저는 그리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척, 의지가 없는 척하면 덜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걸 각하도 아시잖습니까.”

내 말에 동조하듯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눈에 띄는 존재가 낫지 않을까?”

벽에 걸린 검과 방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시시각각 모두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그 편이 오히려 제 몸을 지키는 데에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입술만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공작을 보며 나는 어제 확인했던 그의 호감도 창 내용을 떠올렸다.

‘거래매니아에 실리주의자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한 번 도박을 걸어볼 만하지.

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수를 던졌다.

“이를 위해··· 저는 각하께 한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그리고 저 또한 각하께 아주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공작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네 말은 지금··· 나와 거래를 하자 이건가?”

그로부터 꽤 오랜 대화가 이어진 후, 공작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좋아. 거래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 * *

공작과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 벌써 점심 때가 되었다.

제이콥이 가져다준 식사를 먹으며 나는 방근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공작과의 거래는 완벽하게 성사되었다.’

공작부인이라는 배를 침몰시킬 단초를 제공하는 대신, 내가 그에게 제안한 것은 두 가지.

첫째, 아카데미를 보내달라.

둘째, 내가 5명 이상의 이능자들을 가신으로 거두면 레핀 공작가의 적자로 인정해달라.

첫 번째 제안을 공작은 흔쾌히 수락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장에게 전갈을 보내 추천서를 받는다면, 한 달 뒤엔 입학할 수 있을 테니.’

평민들은 현대판 고시에 가까운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하지만, 귀족 자제들은 추천서만 있으면 언제든 입학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둘째안에 관해서는···.

‘다섯 명 이상의 이능자를 가신으로 거두겠다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공작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얘기를 듣기라도 한 얼굴이었지만.

미래의 이능자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는 내게는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공작은 자신에게도 해가 될 일은 아니라며 생각보다 쿨하게 수락했다.

‘그다음에 그가 꺼낸 이야기는 나로서도 예상밖이긴 했지만.’

이야기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가려는데 잠깐만 기다리라 하는 것이 아닌가.

공작은 책상 뒤편에 자리한 금고 안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보였다.

‘이건?’

로켓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와 수십여 통의 편지.

‘이 목걸이는 네 진짜 어미가 남긴 단 하나의 증표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쪽은 너의 후견인이 보내온 편지.’

그 불행하고 외로운 세자르에게 후견인이 있었다니! 금시초문이다.

공작은 5년간 매달 한 통씩 왔지만 내게 전해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네가 이곳에 적응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막은 거니 오해하지 말거라.’

방해는 개뿔, 관심도 하나 없었으면서.

뭐가 됐든 자신의 핏줄이라니 재능이 있을까 싶어 데려왔다가 별 싹수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방치해뒀겠지.

그러다 이제 세자르가 달리 보이니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 아닌가.

“그래도 목걸이와 편지까지 내어줄 줄은 몰랐지만.”

이건 확실히 기대 외의 성과다.

나는 4차원 주머니에 담아온 물건들을 두근거리며 꺼내보았다.

일단은 목걸이를 살펴볼까.

조약돌만 한 크기의 동그란 로켓을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좀 실망인 걸.’

생모의 사진이라든가 이런 게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긴 원작의 최대 떡밥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는 없지.

로켓 뚜껑에 그림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전혀 모르겠다.

‘어머니의 가문을 상징하는 그림일까.’

이건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이번엔 후견인이 보내왔다는 편지를 살펴볼 차례.

단 한 번도 답장을 못 받는데도 꾸준히 매달 편지를 보낸 것 보면, 성실한 데다 세자르에 대한 애정이 상당한 것 같다.

대체 누가 보낸 걸까. 기대감에 가득 찬 채 가장 최근 날짜의 편지를 뜯어보았다.

『사랑하는 세자르에게

안녕, 세자르. 잘 지내고 있니.

비록 답장은 없지만, 관대하신 공작각하께서 너를 잘 돌봐주시리라 믿는다.

나는 지금 유레키아 대륙을 건너고 있어. 세상은 넓고 아름다우며··· (중략)

그럼 또 편지할게. 짧은 시일 안에 얼굴을 보자꾸나.

- 너를 진심으로 아끼는 후견인이』

나는 튀어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이 새끼가 진짜.”

학교 다닐 때 편지쓰기도 안 배워먹었나.

자기가 누군지 밝히는 것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냐.

그리고 뭐, 공작이 잘 돌봐줄 거라 믿는다고?

세상이 넓고 아름다워?

“한심하기가 짝이 없군.”

세자르가 그 넓은 저택에서 매일처럼 학대당하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걸 안다면 이 태평한 후견인은 어떤 얼굴을 할까.

지금으로선 누군지 전혀 짐작가지 않지만, 언젠가 찾아낸다면 꼭 빅엿을 먹여주리라 결심하던 때.

[히든캐릭터에 대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역시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호감도 목록을 띄우자 맨 위 항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로만 나와 있던 것이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흑의 기사’ ????(???점, 형태 ‘죄책감’)

그렇담 설마···.

카를을 절름발이로 만든 ‘흑의 기사’가 이 편지를 쓴 장본인이자 세자르의 후견인이라는 얘기인가?

‘이건 원작에도 전혀 나오지 않았던 떡밥인데.’

어쨌거나 이건 큰 수확이다.

내가 세자르의 몸에 들어와 원작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얻게 된 수확.

‘게임으로 치자면 히든피스를 얻은 셈이지.’

이 편지들에서 단서를 찾아 후견인을 찾아내는 것.

거기서부터 많은 게 달라질 거다.

주먹을 꽉 쥐며 다시금 마음먹는데, 갑작스럽게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파충류도 자꾸보면 귀여워’ 달성! - 독사에게 물릴 뻔했습니다.]

[도전과제 ‘미래의 연기 꿈나무’ 달성! - 레핀 공작을 연기로 속여넘겼습니다.]

[도전과제 ‘미래의 계략 꿈나무’ 달성! - 바야르 놈에게 빅엿을 먹였습니다.]

어라 이번엔··· 세 개가 한꺼번에 뜨네?

[특수과제 ‘일타삼피’ 달성!!! - 특수보상이 해금됩니다.]

일타삼피··· 세 개를 한꺼번에 달성했다는 얘기인가?

특수보상이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박각이다, 이거.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운데 그다음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대던전 ‘숲의 수호자’의 초대장을 수령했습니다.]

고대던전의 초대장, 이라는 문구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유레키아 대륙 전체에 단 열 개만 존재한다는 고대 던전.

선택받은 자에게만 ‘초대장’을 보내 그 안에 들여보내준다는 이야기는 원작의 후반부에나 나왔던 건데···.

‘그 초대장을··· 지금 이렇게 준다고?’

눈앞의 메시지를 보고도 한동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