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4화 (14/176)

펜싱의 꽃은 반격기

사냥터에는 이미 사용인들이 고급스러운 나무식탁을 옮겨다둔 터였다.

으리으리하게 차려입은 공작과 공작부인이 탁자에 둘러앉은 가운데, 저쪽 구석에선 하인과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

‘말이 야유회이지, 영지 안에 자리한 사냥터에서 식사하는 게 전부로군.’

인기척을 알아차린 공작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세자르.”

중후한 외모에 위엄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

레핀 공작은 공작부인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오랜만에 각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 사이 많이 컸구나.”

고개를 숙였다가 든 순간, 공작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와는 달리 나의 요모조모를 탐색하듯 훑어보는 눈초리.

“총관에게 들었다. 그간 검술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하던데.”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내가 듣기에는 다분히 의례적인 칭찬으로 들렸으나, 그마저도 공작부인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공작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인상을 팍 구기더니,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저 역시 세자르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공작부인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서 검술 실력을 선보일 수 있나요, 세자르?”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세자르와 집사장의 ‘진검’ 대련이 성사되는 것이.

내가 대답을 구하듯 공작을 바라보자, 공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세자르가 달라졌다면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거겠지.

나는 공작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각하께서 바라신다면야 얼마든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우며 대답하자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답 한 번 시원하군 그래. 그럼···.”

공작의 눈이 몇 걸음 떨어져 호위하듯 서 있던 바야르 경에게 머물렀다.

“저기 있는 저자가 바야르 경이라 했던가? 세자르의 검술 스승인?”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바야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며 바르르 떠는 그를 보더니 공작부인은 당황하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맞습니다만, 저자는 최근 독한 감기에 걸렸다가 간신히 회복하고 일어난 터입니다.”

“하, 검술 스승이라는 자가 감기라.”

비웃음이 명백한 공작의 대꾸에 공작부인이 얼굴을 붉힌 순간.

그들 옆에 배경처럼 서 있던 집사장 카를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각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늙은이는 어떠십니까.”

“자네가?”

공작이 미간을 좁히자 집사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래봬도 젊을 적에는 제법 검을 다뤘습니다.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도련님께 한 수 배움을 청하고 싶군요.”

“흠.”

집사장 카를이 과거 호위기사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공작이 모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공작은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것도 재미있겠군. ···세자르, 괜찮겠나?”

미소를 지은 집사장의 눈동자가 ‘어떠냐, 겁 나지?’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 역시 씩 웃어 보였다.

“그거 재미있겠군요.”

내 대답에 주변 이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이들이라고는 대부분 하인과 하녀들.

내가 바야르를 묵사발 내는 것을 두 눈으로 본 병사들과는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이들이다.

‘세자르 도련님이 바야르 경을 이겼다던데?’

‘말도 안 돼, 그냥 봐준 것 아니고?’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소문은 소문이고···.’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내가 저희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나서니 놀라울 수밖에.

‘애초에 바야르 하나 이긴 걸로 평가가 뒤집어질 리가 없지.’

하지만 이 저택의 권력자이자 정식 호위기사 출신인 집사장을 이기는 건 또 다른 문제.

···나로서는 전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승부다.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지, 집사장.”

집사장 역시 의외라 생각했는지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공작 부부가 앉은 테이블 옆으로 대련 장소가 마련되었다.

너른 사냥터를 배경으로 펼치는 대련.

하인 하나가 검이 잔뜩 든 자루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가져왔습니다요!”

그쯕으로 다가가 검을 고르는데.

집사장 카를이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도련님.”

“···.”

내가 말 없이 얼굴만 빤히 쳐다보자 노인네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래도 이 노인네는 하인이 ‘실수’로 들고 온 진검을 골라버릴 것 같으니 말이지요.”

카를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서 몸을 뗐다.

-집사장 카를의 진검에 찔릴 뻔했나요?

과연. 도전과제가 이렇게 실현되는 거로군.

그거야 그렇다 치고, 어째서 자신이 ‘진검’으로 싸우겠다는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것일까.

나는 옆에 선 하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저기, 다 고르셨습니까요?”

자루 안에 검이 여러 개 있는 것을 보자 감이 왔다.

‘아무래도 진검에 미리 표시를 해둔 것 같군.’

내가 이 흐름을 끊고 공작에게 돌아가 ‘카를이 진검을 쓰겠다 합니다!’라고 일러바친다면.

표시가 없는 연습용 검을 골라서 나를 거짓말쟁이에 겁쟁이로 몰아갈 테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련에 임한다면.’

···진검을 든 상대와 대련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내게 안길 생각이다.

노친네가 잔머리를 깨나 굴렸군.

나는 ‘이제 어쩔 거냐, 애송아’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중인 집사장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재밌겠군.”

“겁나시겠지만··· 예?”

“벌써 가는 귀가 먹었나?”

여기서 포인트는 이거다.

정말 재미있어 미치겠다는 얼굴로 말해야 한다는 것.

“재미있겠다고 말했는데.”

“···.”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이 좋게 피를 보는 거 어때?”

나는 아무 검을 하나 골라 시험 삼아 붕붕 휘둘러보았다.

그저 휘두르는 것뿐인데도 집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내가 진검을 쓰겠다는 말은 아니야.”

“···.”

“그대는 나를 찔러 피를 내고, 나는 감히 공작의 아들에게 피를 보게 한 그대를 능지처참하는 거지.”

“···노, 농담이···.”

“농담 아닌데?”

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저기 머나먼 이국에서는 이런 걸 가리켜 ‘이판사판’이란 표현을 쓰더군.”

“이판··· 사판?”

“너 죽고 나 죽자, 이 말이지.”

자못 미친놈처럼 말하자 집사장의 주름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그리고.”

나는 그의 왼발을 가리켰다.

“아직도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나?”

“···.”

“조심하라고, 조심.”

여유롭게 대련 위치로 가 서자, 집사장 또한 맞은편에 섰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군.’

지면 잃을 것이 많은 노인네와는 달리, 내 입장에선 딱히 잃을 것이 없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처음과는 다르다.’

이 세계의 검이 제법 손에 익었으며.

세자르의 육체적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저 노인네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더욱이 집사장은 지금 나를 얕보고 있다.

자신을 얕잡아 보는 상대와의 싸움보다 더 용이한 게 있을까.

그야말로 내게는 모든 게 최상의 조건이다.

“제가 심판을 맡지요.”

주변이 온통 소란스러운 가운데, 검을 가져온 하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곧 펼쳐진 대련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주 선 집사장의 등 뒤로 펜싱 피스트가 펼쳐지는 듯하다.

‘앙가르드(준비).’

다른 풍경은 모조리 지워진다.

오로지 적과 나만이, 아니.

‘두 개의 검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렇게 물아일체에 가까워진 순간.

“대련을 시작하십시오!”

하인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알레(시작)!’

챙강! 두 개의 검이 맞붙었다.

두 개의 검날이 마찰할 때마다 그 사이에서 불꽃이 튀긴다.

챙강!

두 번째 합에서 맞붙었을 때,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뒤로 밀릴 뻔했다.

‘손목이 얼얼할 정도군.’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의 힘을 지녔을 줄은···.

사뭇 긴장된 얼굴로 눈을 마주치자, 집사장이 싱글거리며 나를 도발했다.

“어떠십니까 도련님, 이쯤에서 기권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노인네는 초심자가 섣부르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적당히 봐드리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곤란하니까요.”

그 말대로 이자는 상당한 실력자다.

바야르와는 비교가 되지 않거니와.

‘일단 체격부터가 다르니.’

디터에 버금갈 정도로 큰 키에 얼룩이만큼 건장한 체격.

비록 과거에 부상을 입었다지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듯 단단한 몸이다.

피지컬로만 따지자면 세자르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대상이겠지만···.

‘누군가 그런 말을 했지.’

펜싱이야말로 피스트 위에서 펼쳐지는 체스나 다름 없다고.

상대의 강약을 파악하여 한 수, 한 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전황이 실시간으로 달라지며.

지금의 나처럼,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 제격인 기술 또한 있다고 말이다.

‘리포스트(반격)’.

저보다 강한 상대의 검을 받아내 그 힘을 본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기술.

나는 신중하게 검을 놀리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흐흐, 여흥이 너무 길어지면 각하께서도 지루하실 테니···.”

대련을 얼른 끝내지요, 라고 말하며 카를의 검이 섣부르게 들어왔을 때-

‘지금이다!’

챙강! 챙!

리포스트 쉬르 르 페르(검신을 이용한 반격).

그의 검신 위로 내 검을 미끄러뜨리며 되받아 쳐내자!

“커억.”

본인의 힘을 고스란히 되돌려받은 카를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에 그의 균형이 흔들린 순간-

‘이 틈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날카로운 검신으로 그의 왼쪽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왼쪽, 왼쪽, 왼쪽!

“이, 이런···.”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호하는 법이다. 특히 누군가가 그 부분을 사정없이 공격하려 든다면-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나가고 만다.

카를이 왼쪽을 감싸고자 뒷걸음질친 순간,

그 견고한 성의 균형이 흔들린 순간!

내 검이 결정타를 날렸다.

“크윽!”

푹!

검 끝에 옆구리를 찔린 카를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 한 번의 투슈(접촉)로도 충분했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다.’

카를은 내 검을 막아내는 데 급급하며 뒤로 물러났고.

나는 앞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피웅! 챙!

검이 갈라놓은 시야 너머로 당황한 노인네의 얼굴이 보였지만.

‘검을, 검을 쫓아야 한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야에 아로새겨지는 금속의 궤적.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탓일까.

1초, 2초, 3초··· 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1초의 순간이 0.01초씩 나뉘어 흘러가는 듯하다.

그 기이한 감각의 한가운데에서.

“가, 가만두지 않겠다!”

분개한 카를이 감정을 잔뜩 담은 검으로 공격해왔고.

그 0.01초와 0.02초 사이의 간극을,

내 검만이 재빠르게 헤쳐나간다.

느리게 뻗어오는 검날을 여유롭게 피하고.

슈웅!

굉음을 일으키며 왼쪽을 찌르고 들어간다!

“헉!”

내 검 끝을 피하고자 무심코 그의 몸이 기울어진 순간-

콱!

발목을 노린 한 방이, 제대로 들어갔다.

“크아악!”

카를의 입에서 고통을 참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다!’

훤히 드러난 빈틈들을 나는 사정없이 노렸다.

옆구리, 겨드랑이···.

인간의 신체에서 살이 가장 부드러운 부위들을 찌를 때마다 노인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대련을 지켜보던 하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쩌지, 대련 끝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공작님의 명이 아직···.”

“저러다 기절이라도 하시면···.”

이제는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카를의 몸을, 나는 사정없이 난타했다.

검 끝이 뭉뚝하다고는 하나, 몸무게를 잔뜩 실어 뻗어나간 검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럼 마지막으로···.’

검 끝이 카를의 명치를 직격한 순간.

“컥.”

밭은 신음과 함께 집사장의 거구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챙강, 하며 그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

‘거대한 성을 무너뜨린 기분이군.’

알 수 없는 쾌감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동시에,

기묘한 고양감이 전신에서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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