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제가 변경되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집무실 안.
그 한가운데에 놓인 화려한 티테이블 뒤편에 앉은 채, 공작 부인 ‘리아나’는 직접 내린 홍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기대되는걸.”
리아나 공작 부인은 체스 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 자신이 계획을 세우길 좋아하고, 그것이 착착 맞아들어가는 데서 보람과 쾌감을 느끼는 타입이니까.
체스야말로 ‘계획’, 아니 전술이 중요한 게임이 아닌가.
한 개의 말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변만화하고,
경우의 수를 이용해 수천 가지의 전술을 펼치는 것이 가능한.
그중에서도 공작 부인이 제일 좋아하는 수는 약해빠진 졸卒인 ‘폰pawn’으로 킹을 잡는 것.
상대편의 진영 끝에 도달한 폰은 ‘퀸’으로 변모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나야말로···.’
공작 부인은 자신이야말로 ‘퀸으로 변모한 폰’이라고 믿었다.
맨 아래층에서 시작해 꼭대기에 도달한 여인.
스스로 한 땀 한 땀 수놓아서 완성한 자수판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가지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똑똑.
“들어오게.”
노크소리에 이어 문을 열고 나타난 검은 머리의 소년.
세자르야말로 그 유일한 방해물이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꾸벅 인사한 세자르는 집무실을 낯선 눈으로 둘러보았다.
집사장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공작 부인은 소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간 잘 지냈나요, 세자르. ···최근 며칠간 많이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비소를 치사량으로 썼는데도 어떻게 안 죽고 살아 있냐’라는 의미.
그녀의 말에 세자르의 눈빛이 돌변했지만 이는 잠깐에 불과했다.
“며칠간 배탈과 설사로 몸져 누워 있었습니다. 부인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서 송구스럽군요.”
소년은 공손하고도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눈동자 저편에서 격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춘 채로.
공작 부인은 제 얼굴의 가면을 한 겹 덧씌우며 말을 받았다.
“어머나, 어찌 그런 일이···. 음식이 상하기라도 했던 걸까요?”
“···.”
“ 혼자 얼마나 고생했나요, 세자르. 이 어미에게 진작 얘기하지 그러셨습니까.”
‘어미’라는 표현에 세자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년의 가면에 생긴 균열을 만족스러워하며 부인은 세자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비록 그대는 내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로건 공께서 데려왔을 때 나는 신께 맹세했어요. ···기필코 그대를 헌신하며 키우겠다고.”
자신의 연기가 애절해질수록 세자르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가.
공작 부인은 비뚤어진 만족감을 느끼며 눈가를 살짝 닦아냈다.
“미안합니다, 세자르. 이 어미가 몰랐어요.”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세자르가 이를 바득 갈며 대꾸하는 모습에, 부인은 내심 미소를 지었지만.
“그래요. 따로 필요한 거라든가-”
“아닙니다.”
소년은 금세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잘라 말했다.
“필요한 것도,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니까요.”
자신 앞에 홀로 서고도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빛.
그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그래요, 그렇다면···.”
잠시 고민하던 공작 부인은,
준비한 수를 던졌다.
“일주일 뒤, 다같이 야유회를 갈 예정입니다.”
“···.”
“그리고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그대 세자르가 이 어미를 비호해줬으면 좋겠군요.”
그러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세자르는 자신의 이 말이, 단순한 부탁이 아닌 ‘명령’임을 곧바로 이해한 듯했다.
···입술을 깨물며 짓씹듯 대답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소년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공작 부인의 표정은 급변했다.
꿀처럼 달콤하던 미소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진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공작 부인은 문을 닫고 들어온 집사장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세자르의 키가 훌쩍 컸군.”
“이 시기의 아이들은 하루 아침에도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그보다도··· 눈빛이 아예 다른 사람 같던데.”
“제게도 오늘 따라 갑자기 하대하시더군요.”
집사장이 놀랐던 지점은 그것이었다.
‘그대는 잠시 나가 있도록.’
‘공작 부인께 안내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듯 너무도 당연하게 하대하는 말투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태도.
이전의 세자르가 그를 꼬박꼬박 ‘집사장님’이라 부르며 존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네에게 하대했다고? 세자르가?”
그녀의 말에 집사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전에도 저런 보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세자르를 접한 사용인들이 하나 같이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증언했다고 말이다.
‘광기 가득한 눈빛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 흡사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 같았습니다.’
‘너 또한 바야르 경처럼 되고 싶냐며 으름장을 놓으시는데, 아예 딴사람이 되신 것 같더군요.’
그래. 아무리 새끼라도 사자는 사자인 법.
세자르가 이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 목숨을 끊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은 그녀의 아들 팰러스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게 이용가치가 있다며 자신을 만류했던 탓이니.
‘어머니는 모르시겠습니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그야말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장기말이나 다름 없는 존재입니다.’
장기말.
물론 과거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열네 살 생일을 맞이한 세자르는, 요 며칠간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 보렴, 팰러스. 너의 섣부른 판단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렇다면 오히려 더 확실하게, 놈의 목숨을 끊어놓을 필요가 있다.
“카를.”
“말씀하십시오, 마님.”
“로건이 돌아오는 게 언제지? 따로 기별을 받은 게 있나?”
로건 드 레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남편 레핀 공작은 석 달 전부터 계속 리히터 영지에 머물러온 터였다.
“각하께서는 성 니힐로 축일에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아직 한 달의 시간이 남았다는 거로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을 무대 위로 올리고, 그 한복판에서 주연배우를 단칼에 끝장내는 비극을 성사킬 시간이.
공작 부인의 아름다운 입술에 비정한 미소가 번졌다.
* * *
내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아후아.
한참을 심호흡하고 나니 미친 듯 펄떡거리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그 여자 앞에선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공작 부인과 처음으로 독대한 순간,
솔직히 말해서 살짝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존나 예쁘네.’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 가느다란 팔다리와 대조되는 풍만한 몸매.
딱히 연상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누님 뭐든 시켜만 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 했다.
‘미소 한 번으로 남자를 홀리는 요녀라더니 어마어마한걸.’
뱃사람들을 홀려 배를 침몰시킨다는 세이렌이 실재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하지만 그 미모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얼굴 뒤에 비수를 감추고 있음을.
게다가···.
‘야유회라고? 이 여자가 미쳤나.’
공작 부인이 직접 불러 안부를 묻는 것으로도 모자라 야유회에 세자르를 끼고 나가겠다고?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이건 원작에 없는 새로운 전개다. 그래서 더욱 겁날 수밖에.
‘근데 호감도 창은 왜 안 뜨지?’
집사장을 만났을 때처럼 호감도 창이 뜨길 기다렸는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호감도 창이 반드시 첫 만남에 뜨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제이콥은 몇 번이나 만난 후에야 비로소 호감도 창이 나타났으니까.
“공작 부인의 비밀이란 게 뭔지도 궁금한데 말이지.”
그밖에도 궁금한 게 또 있다.
‘공작 부인은 대체 왜 세자르를 죽이려 하는 걸까.’
레핀의 성조차 받지 못한 일개 사생아를 죽이려고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있을까?
설령 운 좋게 적자 자격을 인정받는다 해도, 차남이라 어차피 계승권에서 밀리는데 말이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어.’
그리고 그 뭔가란, 작중에서 슬쩍 언급된 ‘세자르의 출생 비밀’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그때, 처음 보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가 변경되었습니다.]
뭐?
[기존의 ‘목 졸려 죽을 뻔했나요?’가 삭제되고
‘독사에게 물릴 뻔했나요?’가 추가됩니다.]
“···씨발.”
이게 목적이었구나.
야유회라는 미명하에 나를 자연스럽게 죽일 셈이다.
‘숲에 독사를 풀어놓을 셈이군.’
어째서 전개가 바뀌었는지 생각해보자.
내가 세자르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원작과 다르게 행동한 게···.
“너무 많은데.”
게다가 모처럼 수프에 탄 비소조차 듣지 않았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거겠지.
애초 달라진 게 너무 많다 보니, 뭐가 결정적인 변수인지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어차피 이제 와 그걸 알아봤자 별 쓸모가 없을 거고, 지금 중요한 건.
‘야유회에서 독사에 물리지 않을 방법을 찾는 것.’
공작이 야유회 전에 도착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번엔 정말로, 목숨을 잃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든다.
* * *
그로부터 며칠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무장부터 몇 바퀴 돈 뒤,
얼룩이를 비롯해 내게 호감을 보이는 병사들과 근력 트레이닝을 한다.
“끄아아아! 죽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저도, 진짜로 숨이 끊어질 것 같다고요!”
“어제에도 무사히 살아났잖아? 안 죽으니까 걱정말고 끝까지 해봐.”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서로를 격려하며.
“우욱···.”
“이제 그만···.”
“꾸에엑···.”
···토하기 직전까지.
“이 정도는 해줘야 기분 좋지 않아? 몸을 움직인 보람도 나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넌 아무래도 고통을 즐기는 변태 새끼인 게 분명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병사들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나는 산뜻하게 무시했다.
요즘 들어 몸이 훨씬 가뿐한 게 전보다 조금이지만 근육이 붙은 것 같은데.
상태창을 확인해볼까.
‘역시나!’
『세자르 레핀 (14세, 남, 168cm, 52kg)』
체중 ■■■□□|□□□□□ (표준이하)
근육량 ■■■□□|□□□□□ (표준이하)
체지방 ■■□□□|□□□□□ (표준이하)
근육량이 한 칸 늘었다. 몸무게도 1kg 붙었고.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취가 있으니 기분이 좋구나.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니까.
“도련님!”
트레이닝을 마치고 연무장에서 나오는데, 디터가 다가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마님이 야유회에 가자고 하셨다고···.”
“아, 그래서 말인데.”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거든.
나는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디터를 마주 보며 말했다.
“혹시 뱀이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명색이 사냥터지기에 동물을 좋아한다 했으니 알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뚱딴지 같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디터는 대뜸 해답을 내놓았다.
“백반이죠.”
“···백반?”
“네. 이건 나무꾼들이 종종 쓰는 방법인데, 백반을 몸 여기저기에 바르면 그 냄새를 뱀이 피해서 달아난다 합니다.”
디터는 자신 역시 숲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바르고 간다며, 오두막에 구비해놓은 것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어디 숲에 갈 일이라도···?”
이런 걸 왜 필요로 하는지 궁금해하는 디터.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웃어만 보였다.
“아, 그리고 총관님이 귀뜸해주시길···.”
디터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더니, 내 귓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공작 각하가 저택에 사흘 뒤에 도착하신답니다.”
“···!”
대박.
나는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환호성을 간신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