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1화 (11/176)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 들이밀기

꼬르륵-.

한밤중의 오두막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거참, 타이밍 하고는.’

모처럼 분위기가 좋았는데 이놈의 육체가 날 도와주질 않는구나.

당황한 디터를 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게. 내가 저녁에 아무것도 못 먹어서 말이지.”

“아무것도 못 드시다니요?”

“음, 그게.”

지금이야말로 진짜 도박을 할 타이밍이다.

“오늘 아침에 누군가 내 수프에 독을 탔거든.”

“···!”

디터의 눈이 커졌다. 충격받은 그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떻게 지속적인 위협과 괴롭힘에 시달려왔는지···.

사실에 과장을 살짝 섞은 이야기에 디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런···.”

“뭐, 그렇게 된 거야.”

이런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디터를 나의 완전한 아군- 아니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어째서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디터를 공범으로 만들어야 하냐고?

‘디터는 이곳에서 세자르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니까.’

세자르와 달리 나 김현우는 원래 사람을 잘 믿지 않지만,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디터라는 인물을 신뢰한다기보다는 상태창의 호감도 수치를 믿고 던진 수였다.

그리고 그 도박은 아무래도 성공인 것 같으니···.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

디터가 눈꼬리의 눈물을 닦아내며 주섬주섬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육포였다.

‘유레카!’

세자르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맡아보는 고기 냄새에 나는 환호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난번 사냥에서 잡고 남은 사슴 고기로 만든 육포입니다. 조금씩 씹어드시면 배고픔이 한결 가실 거예요.”

“···고마워.”

이번엔 진짜, 엄청나게, 눈물 나게 고맙다.

나는 200퍼센트의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를 하며 육포를 받아들었다.

상당량의 육포를 4차원 주머니에 집어넣자, 디터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도련님이 힘든 상황이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뭐, 바깥에서 어떻게 알겠어.”

“제 불찰입니다.”

그게 왜 니 불찰인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아, 혹시 너.”

“네?”

“조각 좀 할 줄 아나?”

디터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밝아진 얼굴로 무언가를 들고 왔다.

자신이 직접 조각했다는 자그마한 나무 동물인형이었다.

“손재주가 좋은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냥터지기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할걸요.”

“흠, 그렇구나.”

“그런데 조각은 왜···?”

고개를 갸웃하는 디터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아, 나중에 부탁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나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확인한 터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열쇠를 복사해봤나요? (미달성)

열쇠 복사, 라는 본격 범죄의 초입을 알리는 과제가 적혀 있었으니.

이후로 디터와 나는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었다. 정확히 말하면 디터 입장에서야 담소이고, 내 입장에선 다양한 과거 정보를 얻는 기회였으니.

“도련님과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니 어쩐지 꿈만 같네요.”

응 그럼.

소설 속 등장인물과 밤샘토크라니 나야말로 진짜 꿈만 같은걸.

아니 그냥 진짜 꿈이면 좋겠다···.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한참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창 밖이 조금씩 밝아진다. 대충 새벽 서너 시쯤 되었으려나.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아니···.”

디터가 배시시 웃는다.

“주군.”

그는 내가 맡긴 전갈을 전서구로 보내겠다며 오두막을 나섰고, 나 역시 뒷길을 통해 별관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문득 뒤를 돌아본 순간, 저멀리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후두둑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공작에게 보내는 세자르의 SOS가, 하늘로 날아갔다.

* * *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방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그날 밤, 모처럼 꿀잠을 잤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최강의 아군을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육포가 잔뜩 든 4차원 주머니.’

그 두 가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하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비소 중독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므로 (이따금 식사를 가져다주는) 제이콥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으니.

“이대로 침대에만 누워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지금 내게는 허투루 낭비할 시간이 없다.

제이콥이 가져다준 음식 중 독을 타기 어려운 빵이나 과일 따위만 먹어치우고, 수프는 4차원 주머니의 쓰레기통에 버린 뒤.

‘슬슬 작전에 착수해볼까.’

전날 밤, 디터에게서 빌려온 하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허름하고 누리끼리한 옷을 입고 거기에 두건까지 푹 눌러쓰니···.

나는 거울 속의 낯선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영락없는 꼬마 하인이네.”

문에 귀를 붙인 채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얼른 복도로 나왔다.

‘후우.’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나는 유유자적 1층으로 내려가 디터가 일러준 하인들의 별관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 너는 마님께 가보고.”

“호이터 너는 곧바로 조리실로 달려가봐!”

‘하녀장이 열쇠꾸러미를 관리한다고 했지.’

바로 옆에 있는 세탁실에서 대충 아무 침구류를 안아든 뒤, 하녀장 앞에 선 줄 맨 끝에 갔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바야르 경이 새 침구를 가져달라고 하셨는데요.”

하녀장은 나를 흘긋 돌아보더니 열쇠 하나를 내어주었다.

“2층 맨 왼쪽 방이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하고는 얼른 계단으로 향했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렸지만, 다행히 목소리에 티가 나지 않았나 보다.

2층의 맨 왼쪽 방.

‘여기가···.’

지금쯤 바야르는 연무장에 있겠지.

혹시나 싶어 문손잡이를 살짝 돌려보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출타 중엔 반드시 문을 잠가놓나 보군.’

의외로 조심성 있는 성격인가 본데.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군가 확인할 수도 있으니 침구를 새 것으로 갈아준 뒤.

주머니에 넣어온 붉은색 밀랍덩어리를 꺼냈다.

···‘편지 쓰기 6종 키트’에 들어 있던 물건이다.

‘밀랍의 효용은 인장뿐이 아니지.’

과거에는 열쇠를 복사하는 데 주로 쓰인 게 바로 이 밀랍이다.

밀랍으로 조심스레 열쇠본을 떠놓은 뒤, 열쇠에 남은 밀랍의 흔적을 깨끗이 닦아냈다.

그렇게 본 뜨기를 마친 나는 열쇠를 제자리에 돌려다놓은 뒤 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내 방에 돌아오고 나니 그제야 호흡이 가빠진다. 흥분한 심장 또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근거렸으니.

‘역시, 옷을 갈아입으니 다들 몰라 보는군.’

세자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낸 덕분에, 제이콥과 바야르 등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생아 도련님’의 얼굴을 잘 모른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보고 세자르임을 알아차리는 거지.

‘덕분에 한동안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겠어.’

내가 바야르의 방을 알아내고, 열쇠를 복사하려고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 계략을 써봤나요? (미달성)

-열쇠를 복사해봤나요? (미달성)

이 두 가지 도전과제를 동시에 달성하고도 남을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

일단 지금 나의 계획은 이렇다.

‘공작이 SOS 메시지를 받고 돌아오는 즉시, 나를 아카데미에 입학시켜달라고 하자.’

공작 부인은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할 여자가 아니다.

이번의 독살 시도는 비껴나갔을지언정, 앞으로 몇 번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죽이려 할 테니.

하지만 공작이 맨입으로 내 부탁을 들어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공작과 공작 부인의 사이가 안 좋다 했지.’

국왕 다음으로 권세가 높은 레핀 공작이 부인에게 함부로 못하는 것은, 공작 부인이 외국의 왕가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녀의 입지를 제한하고 싶어도, 마땅한 명분 없이는 어려운 상황.

‘그렇다면 내가 그 명분을 제공해주면 되지.’

생각을 다 정리한 나는 책상에 앉아 편지쓰기 키트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장문의 글을 적고는, 편지봉투에 넣었다.

“이다음이 문제인데···.”

밀랍 심지에 불을 붙이기 앞서, 다양한 가문의 인장들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짧은 고민 끝에 고른 것은.

‘노바스.’

왕국에 단 둘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이며.

덕분에 레핀 공작가와는 사사건건 부딪히며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곳이다.

‘공작 부인의 수하가 이 노바스 가문과 내통하고 있음이 공식적으로 드러난다면.’

레핀 공작과 공작 부인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곧 다가올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 * *

그날 밤.

나는 전처럼 몰래 나가서 디터의 오두막에 들렀다.

밀랍덩어리를 내밀며 이 모양에 맞는 열쇠를 조각해달라고 부탁하자.

디터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

이건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요? 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오른 듯했지만, 그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내일 안으로 완성해서 드릴게요.”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디터는 약속대로 열쇠를 만들어서 가져왔고.

어린 하인으로 변장한 나는 (디터가 만들어준 열쇠로) 바야르의 방에 잠입했으며.

‘노바스’ 가문의 인장을 찍은 편지를 바야르의 나무함 제일 안쪽에 숨겨놓은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그야말로 완전범죄를 마친 후에는 며칠간 방 안에만 죽치고 있었다.

괜히 돌아다녀봤자 언제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공작 부인의 눈에 띄어봤자 내 명을 재촉할 뿐이란 걸 잘 알았기 때문.

‘공작이 오려면 아직 나흘 정도 남았나.’

그렇게 존재감 없는 하루를 보내고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세자르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그 대사는 이제 좀 그만해.

두 눈을 비비며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이콥이 아닌 처음 보는 사내가 내 앞에 서 있다.

“집사장 카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풍채 좋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자가 공작 부인의 최측근이라는 집사장.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다른 사용인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죄송한 거 알면 됐고.”

“···?”

“용건이 뭐지?”

잠시 당황하던 집사장이 침착을 되찾았다.

“다름이 아니고, 마님께서 도련님을 모셔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공작 부인이··· 갑자기 왜?

두 눈이 번뜩 뜨일 정도로 긴장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어째서?”

“저 같은 한낱 사용인이 마님의 고매한 심중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나가 있도록. 잠옷 차림으로 부인을 뵐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집사장은 순순히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끌며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채로 공작 부인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러 가는 거잖아?’

하다못해 벌벌 떠는 모습만큼은 보여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말이지.

옷장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실내복을 골라입은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탐문하는 듯한 눈초리의 카를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 부인께 안내해.”

자신이 기대했던 태도가 아니었던 걸까.

집사장이 눈에 이채를 띠고 나를 돌아본 순간, 호감도 창이 떴다.

『집사장 카를(호감도 0점)

- 특성 : ‘새디스트’, 권위적, 계산적, 치밀함,

- 비고 : ‘공작 부인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세자르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도록 공작 부인을 부추겨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공작 부인의 비밀’.

작중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새로운 떡밥이네··· 라고 생각한 순간.

‘특성이 새디스트고, 세자르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였다고?’

하, 이건 또 뭐야.

그러니까 이 자식이 공작 부인을 뒤에서 조종해가며 세자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거지?

‘손봐줄 인간이 하나 더 늘었군.’

합법적으로 후두려패줄 기회가 오면 좋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 기회가 생각보다 금방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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