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10화 (10/176)

본격 범죄 조장 소설?

내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다름 아닌-

‘4차원 주머니가 있었잖아!’

심지어 그 안의 파티션도 정리했으며, 쓰레기통 대용으로 쓸 만한 구역까지 배정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스스로의 아둔함에 혀를 차며 나는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작가님, 사려 깊은 안배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 인간이 날 이런 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으며 말이다.

4차원 주머니를 펼쳐 ‘쓰레기통’ 구역에 독이 든 수프를 싹싹 긁어서 버린 후.

포실포실한 빵과 (독이 들어 있지 않음을 확인한) 우유를 깨끗이 먹어치웠고.

‘은수저는 잊어버리지 말고 주머니 안에 넣어놓자.’

과일까지 아삭거리며 빛의 속도로 먹은 후, 문가를 향해 외쳤다.

“들어와.”

조심스레 들어온 하인은, 싹싹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왜, 뭐 문제 있나?”

내가 여유롭게 배를 두드리자, 하인은 애써 동요를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디··· 속이 안 좋거나 하진 않으신지요?”

“흠, 글쎄.”

내가 수프를 진짜 먹었다고 믿게 하려면 그럴싸한 말을 던져놓는 게 좋겠지.

나는 잠시 모른척 시치미를 떼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줬다.

“속이 좀 부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호오.”

“그렇게 말하니 살짝 구역질이 날 것 같기도 한데.”

“흠, 그렇군요.”

미심쩍어 하던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그릇을 내어갔다.

문이 닫혔다.

하인의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가는데, 띠링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도전과제 ‘독살계의 스테디셀러 체험’ 달성! - 대량의 비소를 먹을 뻔했습니다.]

‘이번엔 뭘 주려나.’

안 그래도 보상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여태껏 너무나 필요한 것들을 받은 만큼, 이번에도 굉장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단 말이지.

[보상 ‘중세식 편지쓰기 6종 키트’를 수령했습니다.]

음···? 그런 걸 왜 주는데?

잠시 당황한 순간, 눈부신 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이건···.”

눈앞에 놓인 것은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나무함.

그 안에는 말 그대로 ‘편지쓰기’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꽤 많은 양의 편지지와 편지봉투.

깃펜 여러 개와 잉크 몇 통.

여기까지는 얼마든 추측할 수 있는 평범한 물건들이었지만.

‘이게 뭐지?’

처음 보는 물건 역시 끼어 있었으니.

나는 기다란 붉은색 막대를 집어들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양초···인가?”

끝에 심지가 달려 있는 걸 보니 양초 같은데 이게 왜 편지쓰기 키트에 들어 있지?

어두울 때 불을 밝히라고 준 건가 싶었지만, 내 책상 위에는 멀쩡한 램프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도장은 왜?’

편지 쓸 때 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나··· 하며 도장의 아랫면을 살펴보자 무언가 감이 왔다.

붉은색 양초··· 아니 이건.

“밀랍이구나.”

중세 서양에는 ‘왁스씰(wax seal)’이란 게 있었다. 왁스씰이란 녹여서 떨어뜨린 밀랍에 인장을 찍어서 편지를 봉인하는 것.

봉해놓은 편지를 아무도 뜯어보지 않았음을 확인해줄 뿐 아니라, 발신자의 신원을 (가문 인장을 통해) 수신자에게 한눈에 보여주는 수단.

한마디로 아주 중요한 거란 얘기다.

‘그런데 인장이 왜 이렇게 많지?’

인장의 옆면을 살펴보자 자그맣게 인각된 글씨가 보인다.

‘레핀’

‘노바스’

‘헬리오’

‘윈저’···.

이건 <왕도의 대가>에 나오는 가문들 이름인데?

심지어 유난히 크고 화려한 이 인장에 적힌 이름, ‘해로드’는 왕가의 이름이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대박···.”

처음만 해도 대체 이런 걸 어디에 쓰라고! 하며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말하자면 일종의-

‘편지 사칭’을 가능케 해주는 물건이란 걸 말이지.

* * *

그날 오전과 오후 내내, 나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유일하게 찾아온 것은 제이콥이었는데, 나는 꾀병을 부리며 환자 행세를 했다.

얼굴에 물을 묻혀놓고는 ‘자꾸만 식은땀이 난다’고 한다거나.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으며, 괜히 토할 것 같다고 말이지.

“도련님, 많이 안 좋으십니까? 대체 언제부터···.”

“아침 먹고 나서부터 속이 이상하네.”

“···.”

“뭔가 상한 걸 먹은 걸까.”

그 후로 설사와 구토를 반복했다는 내 말에 제이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 보게, 뭔가 짚이는 게 있나 본데.

“근데 왜 아침에는 네가 안 왔지?”

“···네?”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며 한 박자 늦게 되묻는다.

“아니, 처음 보는 애가 식사를 가져와서 말이야.”

“음, 그게···.”

제이콥은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 신경쓰지 마.”

“아, 네.”

“오늘 저녁은 안 먹을 거니까 가져오지 말고.”

‘비소가 안 통했다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한 걸 가져오면 안 되니.’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는 한이 있더라도, 이따 저녁은 점심 때 꿍쳐놓은 빵으로 버텨야 할 것 같다.

‘전서구로 편지가 가는 데 3일이 걸린다 했지.’

공작이 그걸 보고 곧바로 출발한다 하더라도, 리히터 영지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사나흘 정도 걸린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매일 빵 하나로 일주일을 버텼다간 몸이 버텨내지 못할 거다.

‘단백질, 단백질이 필요해.’

제이콥에게 한 번 더 도움을 요청해볼까도 싶었지만···.

‘제이콥 님은 도련님께 붙여둔 감시자니까요.’

그 말이 맞다면 어째서 호감도 창에는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처음에는 제이콥 역시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자르에게 동정심을 갖게 된 거 아닐까?

‘제이콥의 특성이 상냥함, 다정함이니까.’

설령 이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완전히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떻게 공작 부인에게 내 정보가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니.

나는 호감도 창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제이콥과 디터의 호감도가 올랐네?’

제이콥은 호감도 45점에서 55점으로. 디터는 50점에서 60점으로. 그 외에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그들의 감정 형태가 모두 ‘존경’으로 바뀌었다.

‘디터가 사냥터 관리 담당이었지.’

그렇다면 고기를 얻을 방도가 있지 않을까?

나는 결단을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게는 무엇보다도 ‘아군’이 필요함을 절감하며.

* *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으아악!”

디터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다.

“또 그 꿈···.”

괜찮다 싶을 만하면 꼭 그때의 악몽을 꾼다.

···죽은 동생이 나오는 꿈을.

디터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놔둔 물병을 집어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가뭄기의 땅처럼 바짝 말랐던 목 안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언제가 돼야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지긋지긋한 악몽의 원인이 동생을 향한 죄책감임을, 디터는 모르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전쟁통에 잃었다고 대충 둘러뒀지만, 사실 동생은 자신 때문에 죽은 거나 매한가지였으니까.

디터와 그의 동생이 거리를 떠돌다가 질 나쁜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형, 형 혼자라도 도망가. 나까지 데리고 있다간 둘 다 잡혀.’

그 말에 열 살의 디터는 정말로 동생을 두고 도망쳐버렸다. 노예상들에게 동생이 붙잡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 마! 도망쳐 형!’

디터는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서.

그렇게 몇날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레핀 공작가에서 운 좋게 잡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디터는 ‘세자르 도련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생아···라고요?’

‘쉿, 목소리가 너무 크다.’

말이 도련님이지 그 누구의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이 공작가에서 없는 사람 취급 당하는 존재.

우연히 보게 된 그 도련님의 얼굴이, 죽은 동생과 너무 닮았음에 놀라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일 거야.’

그 후로 세자르를 쫓아다니며 뭐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했던 것은.

다른 하인들은 디터를 보며 정이 많은 아이라고 했지만, 그건 다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단지··· 죄책감 때문이었으니까.’

동생을 닮은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그렇지만 막상 세자르가 바야르에게 채찍질당할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을 도련님은 혼자 힘으로 이겨내셨다.’

디터는 오늘 오두막에 찾아왔던 도련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 며칠 사이에 훌쩍 커버린 것인지 눈빛조차 어른스럽던 모습을.

반면 자신은···.

‘주변에선 괴력의 소유자니 천하장사니 하지만.’

실상은 아직도 그때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천하의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선 순간.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열쇠구멍으로 내다보인 것은 세자르의 얼굴.

디터는 깜짝 놀라며 문을 열었다.

“나야.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나?”

“···도련님?”

세자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문을 닫은 디터에게, 품에 고이 넣어온 것을 꺼내서 건넸다.

“이건 각하께 쓴 전갈.”

“맡겨만 주십시오, 도련님.”

설마 이걸 주시려고 이 시간에 오신 건가? 그런 의문이 디터의 눈동자에 드러난 것인지, 세자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말고도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할 얘기라 하심은?”

“디터,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 앉은 세자르는 디터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넌··· 누구의 사람이지?”

디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의 사람이라니요?”

“각하의 사람인가, 공작 부인의 사람인가?”

디터는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태껏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으니까.

물론 자신은 총관의 아래에서 일하는 만큼 공작 부인의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공작 각하의 사람인가, 라고 묻는다면 이 역시 대답은 아니오였다.

오히려 굳이 따진다면···.

‘나는 도련님의 사람에 제일 가깝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세자르의 말이 이어졌다.

“디터. 네가 아직 누군가의 진영에 속해 있지 않다면, 내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나?”

“···네?”

여유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가신’이 되어달라 말하는 세자르의 얼굴은, 예전의 겁쟁이 도련님이 아니었다.

“나는 네게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디터는 말을 잃었다.

아직도 과거의 과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쟁이일 뿐인 자신에게 어찌 그런 달콤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난 그런 너를, 내 가신으로 맞이하고 싶다.”

“···.”

“언젠가 나는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될 생각이거든.”

디터의 눈이 커졌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작은 이 어린 소년이 거대한 위인처럼 보였다.

“그런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네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광입니다, 도련님.”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엄과 강대한 아우라에, 디터는 홀린 듯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어서 앉는 자세를 취하며.

“아니, 주군.”

세자르는 기사 서임을 내리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디터는 그 손길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그를 향해 내려온 ‘주군’의 손을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붙잡으려던 순간.

꼬르륵-.

“···.”

“···.”

주군의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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