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9화 (9/176)

독 수프에 대처하는 법

천장이 낮은 조리실 안은 매캐한 연기와 군침을 돌게 하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거기! 3번 화덕에서 호밀빵 꺼내고!”

“옙!”

“제이미 너는 생선 손질하고!”

“넵, 조리장님!”

조리장의 지시가 쉴새없이 이어진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리사들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언제 봐도 정신없는 곳이군.’

제이콥은 자신이 다가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조리장의 곁에 서서 헛기침을 했다.

“저, 조리장님.”

“어··· 어?”

조리장 벤은 뒤늦게 제이콥을 발견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이거 깜짝 놀랐잖아! 어이 제이콥, 발소리 좀 내고 다니라고! 원 이러다 심장이 떨어지겠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저 혼자 낄낄거린 조리장이 제이콥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이 어수선한 부엌엔 웬일로 온 거야?”

“음, 그게···.”

“어, 제이콥 아저씨 오셨네.”

제일 어린 조리사가 제이콥을 보더니 반가운 듯 이런 말을 던졌다.

“그거 진짜예요? 세자르 님이 바야르 경을 후두려팼다면서요.”

“넌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선배 조리사의 핀잔에 어린 조리사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솔직히 말마따나,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바야르 경한테 호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요?”

“그건 그렇지.”

“마님이 자기 뒤에 있다면서 얼마나 으스대던지···.”

제이콥은 그런 대화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세자르 도련님의 검술이 일취월장했다더군요.”

“호오.”

조리장 벤의 눈동자에 감탄이 깃든 순간, 벤만큼이나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조리사 한 명이 혀를 찼다.

“허, 그래봤자 사생아 주제에···.”

“자넨 대체 무슨 말을 그리 하는가!”

“아니, 조리장님. 제 말이 어디 틀린 말입니까?”

나이 든 조리사는 수플레 반죽을 쳐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공작 각하가 워낙 인품이 훌륭하셔서 그렇지, 누가 매음굴에서 낳은 아이 따위를 책임지실 생각을 하겠습니까.”

제이콥은 이제 이런 이야기 따위는 자연스럽게 흘려듣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인들이 세자르를 무시하던 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니까.

‘뭐가 됐든 다행이야.’

그는 세자르가 채찍에 맞아 혼자 끙끙대던 모습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혼자 눈물만 흘리던 소년의 뒷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으니.

“저, 조리장님. 혹시···.”

다른 조리사들이 세자르의 이야기로 정신이 없을 때, 제이콥은 벤의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세자르 도련님 몫의 식사를 좀 더 챙겨주실 수 있을까요?”

“···.”

“한창 자라실 때라 그런지 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빵만 두 개씩이라도···.”

벤은 곤란한 얼굴로 음, 하더니 제이콥에게 귀뜸하듯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네만 마님의 엄명이 있었어서···.”

“···.”

“고기나 귀한 음식은 어렵겠지만, 빵 한 개 정도는 어떻게든 더 넣어보겠네.”

벤의 약속에 제이콥은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그나저나 참 이상하단 말이지.”

조리장 벤은 무쇠 팬에 담긴 음식을 신들린 속도로 볶으며 말을 이었다.

“마님은 원래 그러신 분이 아니거든. 저택 재정에도 후하신 편이고, 그 누구도 그리 모질게 대하시지 않는데 유독 세자르 님 일에는 민감-”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갑작스레 조리실에 나타난 누군가의 목소리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집사장님.”

공작가의 전반을 관리하는 집사장을 향해 벤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평민 출신인 대부분의 사용인들과 달리 집사장은 남작가문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프라이드가 높았으며.

“제이콥, 나 좀 보지.”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공작 부인이 시집오며 데리고 온 사용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제이콥은 사형대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집사장을 따라갔다.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간 집사장은 본론을 꺼냈다.

“세자르 도련님이 바야르 경을 대련에서 이겼다던데.”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흠.”

집사장은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경질적인 얼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제이콥은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실 그는 세자르의 감시역이었으니까.

‘제이콥.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해라.’

‘외부 정보도 알려줘선 안 되고, 식사도 방에서만 하도록 해.’

‘공식적으론 이곳에 없는 존재라는 걸, 본인이 스스로 깨닫도록 말이지.’

사창가에서 태어난 주제에 운 좋게 공작가에 들어온 아이에겐 그 정도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제이콥 또한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색안경을 끼고 아이를 대했지만···.

‘제이콥, 늘 고마워.’

‘아냐, 이런 좋은 곳에서 배 곯지 않고 살고 있잖아.’

‘그것 자체가 신의 은총인걸.’

의심할 줄도, 비난할 줄도 모르는 아이는 순백의 천사 같았다. 바보 같을 정도의 선량함에 제이콥의 마음은 이미 세자르를 향한 동정과 애정으로 가득한 지 오래였으니.

‘그런데 어제의 도련님은 뭔가 다르셨어.’

이제 더는 아이나 소년이 아니었다.

단순히 사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 자체가 갑작스레 변해버린 기분이었다.

‘그것도 타고난 승부사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사실 그는, 세자르와 바야르 경의 대련을 몰래 숨어서 지켜봤던 터였다. 소년의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집사장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제이콥은 세자르가 전광석화 같은 검을 휘두르는 데도 놀랐지만.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난, 네가 아는 세자르가 아니야.’

조금의 온정도 느껴지지 않는, 몹시 냉막한 목소리.

바야르를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선 매일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워온 베테랑 전사 혹은···

‘한 마리의 맹수.’

그런 부류들만이 지닐 수 있는 기묘한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제이콥은.

“제이콥. ···그게 말이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집사장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대로 검을 쥐지도 못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달라져 제 스승을 이겼다라.”

“제가 검술에는 무지하지만···.”

제이콥은 조심스레 단어를 골랐다.

“사춘기가 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열넷이면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이기도 하고, 그 시기엔 워낙 아이들이 훌쩍 자라기도 하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논거에 살을 붙였다.

“그 누구냐, 저기 양조장지기네 페터도 최근에 훌쩍 컸고, 마굿간지기네 막내 발터도 그렇고-”

“자네답지 않게 말이 많군.”

말을 뚝 끊고 들어오는 집사장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

“제이콥, 자네의 본분이 뭔지 잊은 것은 아니겠지?”

“본분을 잊다니 무슨 말씀을, 걱정마십시오.”

제이콥이 긴장하며 내놓은 답변에 집사장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남편의 사생아를 미덥게 여길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싶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다.

몇 달 전, 세자르에게 검술스승을 붙여준다는 말에 자신이 고개를 갸웃하자 집사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망가뜨리는 데에 희망을 줬다가 뺏는 것처럼 효과적인 게 없거든. 뿐만 아니라···.’

바야르에게 매일처럼 훈련을 가장한 학대를 당하고.

연무장을 오가는 병사들에게 조롱 어린 무시의 시선을 매일처럼 받는 것.

그러면 아무리 고귀하고 순수한 영혼이어도 무너져내리기 마련이라며.

‘어째서 그 약한 아이에게 그렇게 모질게 구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저의 우려와는 달리, 세자르 도련님은 절망을 훌륭히 이겨냈다. 도리어 더 성장하기까지 하셨으니···.

그런 만족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제이콥이 표정을 관리하는데, 집사장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제이콥,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나.”

“···마음의 준비라 하심은?”

“공작마님의 마음이 바뀌셨네. 원래는 서서히 말라가게 할 생각이었지만···.”

제이콥이 두 눈만 껌벅이자 집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싹부터 단번에 끊어버리라는 지시를 내리셨으니까.”

“···!”

제이콥의 본능이, 도련님의 위험을 알려왔다.

* * *

편지 쓰기를 마치자 밤이 어두워진 후였다. 노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자마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자.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네.”

근육통으로 온몸이 쑤시긴 하지만, 꿀잠을 자서 그런지 머릿속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세자르 도련님.”

들어오라는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제이콥이 아닌, 처음 보는 사내였다.

“기침하셨습니까, 도련님.”

그의 손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식사가 들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질문부터 던졌다.

“제이콥은 어디 가고 네가 왔지?”

“모르겠습니다.”

정없는 얼굴의 하인은 그 말만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얼 물어봐도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두고 나가.”

짐짓 목소리를 깔아 위협하듯 말했지만, 하인은 탁자 위에 그릇들을 올려두고는 옆에 비켜섰다.

“다 드실 때까지 곁에서 시중을 들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 서 있을 테니 편히 드십시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담당하인이 갑작스레 바뀐 것도 몹시 수상한데, 시중을 들라고 했다고?

수상한 냄새가 진동하다 못해 코를 찌를 정도다.

‘말이 시중이지 제대로 먹는지 감시하라는 거로군.’

이런 상황에선 은수저를 써볼 수도 없는데, 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방에서 연습하려고 가져다둔 나무곤봉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그쪽으로 가서 곤봉을 집어들자, 하인이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하···. 지금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도련님···?”

손에 쥔 곤봉을 부드럽게 휘둘러 그 끝을 하인에게 향하자, 하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바야르 경 얘기는 들어봤겠지?”

꿀꺽,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네 이름이 뭔진 모르겠지만··· 바야르 경이 당한 꼴을 당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자, 잠시만요 이건 제 뜻이 아니라-”

“난 늘 화가 나 있거든. 그리고 그 분노를, 누구에게든 풀 준비가 되어 있지.”

아아. 손가락과 발가락 열 개가 동시에 오그라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안의 모든 흑염룡과 중2병의 기억을 끌어내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누구든 날 가로막는다면 다 베어버리겠다.”

이 세계에도 사춘기 청소년의 일탈적 행태가 널리 알려져 있는지, 다행히 하인은 움찔하며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

좋았어, 이런 반응이라면···.

그의 허리를 향해 곤봉을 부웅 휘두르자.

“히익!”

하인은 혼비백산하며 문가로 꼬리가 빠지게 달아났다.

“시, 식사는 전부 다 하셔야 합니다.”

“알았으니 내 앞에서 꺼져!”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곤봉을 던진 순간, 문이 닫혔고.

“다 드시면 불러주세요!”

쾅!

곤봉이 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문 건너편에서 하인이 신음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잖은 위협이 통해서 다행이구나.

“휴우.”

하지만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단은 독 감별을 하는 것이 급선무.

주머니에서 은수저를 꺼내 수프에 담가 보았다.

“이런 씨···.”

아니나 다를까. 담근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은수저는 까맣게 변색됐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담.

‘다 먹었는지 확인하려고 할 텐데.’

안 먹는다고 버티는 수도 있지만 그럼 일이 커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내게 독 감별 수단이 있다는 것을 저쪽에서 눈치챌 수도 있고.

‘그러면 최악이지.’

은수저로 감별할 수 있는 것은 황 성분이 들어간 독극물뿐이다. 독버섯이라든가 생물성 독을 사용할 경우 꼼짝없이 당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이걸 다 먹은 것처럼 보여야 하는데···.

‘수도 시설이 없으니 물에 흘려보낼 수도 없고.’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수프를 몰래 감춰놓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버릴까 싶었지만 창문은 바깥에서 잠긴 탓에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 도련님··· 다 드셨나요?”

“아직.”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걸 어쩌지. 어떻게 처리해야···.

“음,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라고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걸 진작 못 봤지?’

의외의 해결책에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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