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도박
디터는 전쟁고아로 떠돌다가 공작가에 잡일꾼으로 들어온 케이스다.
열 살 때부터 온갖 잡일을 도맡아했으며, 애가 빠릿빠릿한 데다 사냥도 제법 잘하고 무엇보다.
‘힘이 어마어마하잖아?’
덕분에 재능을 인정받아 아직 열여덟에 불과한 나이에도 공작가의 사냥터지기가 된 거다, 이 말씀 되시겠다.
게다가 소설 후반부에서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방랑기사가 디터를 데리고 신전으로 향한다.
‘디터, 네 힘은 신이 내려주신 재능이다.’
신관들은 디터의 힘이 ‘이능’임을 확인하고는 그에게 이능자의 자격을 내려주며, 디터의 능력을 제대로 개화시켜준다.
‘나중에는 팰러스가 이끄는 호위대에 선발되던가.’
디터는 그렇게 승승장구를 거듭해 훗날에는 백작위를 받기에 이른다.
뭐가 됐든 간에 앞날이 매우 기대되는 인재라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 미리 침발라둬야지.’
그렇게 다짐하는데, 디터가 다른 손에 들고 온 의자 하나를 내 뒤에 놔주더니 저 역시 내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와서 미안.”
나는 이 시기에 세자르가 디터와 얼마나 교류하고 지냈는지 정확히 모른다. 소설에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일단은 디터의 입에서 대략의 정보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도련님. 저야 와주시면 언제나 기쁠 따름이죠.”
“음, 우리가 지난번에 본 게···.”
대뜸 던져본 말에 디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몇 달 전에 뵙고 계속 못 뵈어서 걱정했습니다.”
“···그래?”
“도련님이 바야르 경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고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찌나 걱정되던지.”
디터는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입을 다물었다. 바야르가 세자르를 채찍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도련님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면전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 보면, 깨나 상대를 배려하는 스타일인 듯하다.
“도련님, 그간 실력이 엄청 느셨다면서요!”
“어, 응?”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디터의 환해진 얼굴이 보였다.
“오늘 대련에서 바야르 경을 무릎꿇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식이 빠르네.
“바야르 경이 도련님을 가리켜 시대를 앞서나가는 검성이 될 거라고 하셨다면서요.”
“어··· 어?”
검성이··· 그렇게 아무한테나 붙일 수 있는 말이었어?
“병사들 얘기도 들었습니다. 도련님의 발놀림이 거의 신들린 수준이었다고.”
“아니, 그 정도는···.”
당황해 말을 얼버무리는데, 디터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괜히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이능을 발현하신 건가요? 검성의 재능을?”
“아닌데.”
딱 잘라 말하자 디터가 아쉽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 후로도 디터는 나의 공적을 한참이나 열심히 치하했다. 그 정도가 제이콥보다 한 수 위라, 나는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을 추스러야 했다.
“공작 각하께서도 이 소식을 아시면 좋을 텐데···.”
디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쉰다. 보아하니 공작은 오랫동안 출타 중인 것 같은데.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디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젠 아예 리히터 성을 본거지로 삼으실 생각이신지···.”
‘리히터’라는 지명은 작중에서 레핀 공작의 지방 영지로 등장했던 곳이다. 디터의 말을 보면 공작은 지방 영지에 머무른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공작과 공작부인의 사이가 안 좋은가?’
그렇담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재빨리 작전을 변경했다.
“그래서 말인데, 디터.”
“네?”
···일단은 수를 던져보기로.
“공작 각하께 내 소식을 전할 방법이 있을까?”
“글쎄요. 각하께 보내는 서신은 집사장님이 관리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집사장이라.”
오며가며 듣기로 집사장은 공작부인의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세자르의 서신을 전해줄 리가 없지.
“집사장님은···.”
“응?”
디터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결연하게 말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도련님의 서신을 제대로 전달해드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 봐라. 선량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이거지.
“마님의 사람이니까?
“···네.”
“흠.”
어차피 집사장에게 편지를 들고 갈 생각도 없긴 했다. 애초에 내겐 깃펜도, 종이도 없으니까.
그런 것들은 이 세계에선 귀중품이기도 하거니와 세자르에게는 애초에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을 던지며,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그렇다면 누가 각하의 사람인데?”
“지금 공작가 내부의 세력 구도는 이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택 내부의 일을 책임 지휘하는 집사장은 마님의 사람.
사냥터와 마구간을 비롯해 외부 건물을 관리하는 총관은 공작의 사람이라고.
“집사장님은 귀족 출신인 만큼 좀 더 권위가 있지만, 총관님은 평민 출신인 대신 저택에서 이십 년 넘게 근무하셨으니까요.”
요는 이거였다.
공작과 공작부인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으며, 호적만 부부 상태이지 실질적으로는 별거에 가까운 생활을 몇 년째 이어오는 중이라고.
그에 따라 이 둘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총관과 집사장의 갈등 역시 첨예해진 상태라는 것.
내가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디터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음, 이건 비상시에만 쓰는 거긴 한데···.”
“뭔데?”
디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 사실은 도련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나올 것 같은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관리하는 건 사냥터뿐이 아닙니다. 사냥에 쓰는 사냥개들을 비롯해···.”
디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각하께 급보를 보낼 때 쓰는, 전서구傳書鳩.”
전서구란 편지를 보내기 위해 훈련시킨 비둘기를 말한다.
‘빙고!’
디터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나의 도박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도련님, 아무리 도련님을 위해서라도 제 마음대로 전서구를 내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너무 죄스럽다는 듯 디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나 때문에 괜히 네가 피해를 입으면 안 되지.”
“혹시 모르니 총관님께 한 번 부탁드려볼까요?”
아니 아니지. 괜히 그랬다가 긁어 부스럼이 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여기 있는 디터를 통해 접촉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과연 그가 나를 위해 힘을 써줄지가 의문이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괜히 일이 커질 수도 있으니.”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한 듯 고개를 조아리는 디터를 보며 나는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재차 말했지만, 내심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듣기라도 한 듯, 띠링 하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호감도 창이 이렇게 반가울 데가 있나.
『사냥터지기 디터(호감도 +50점)
- 이능 ‘괴력’(1단계 개방)의 소유자
- 특성 : 선량함, 스윗가이, 부지런함, 동물을 잘 다룸
- 비고 : 전쟁통에 목숨을 잃은 동생에게 늘 죄책감이 있다. 세자르에게서 죽은 동생의 모습을 엿본다.』
스윗가이 뭔데.
어이없는 특성명에 잠시 눈길을 빼앗겼지만, 진짜 힌트는 ‘비고’에 있었다.
“디터.”
한참 만에 입을 열자 디터가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에 그렇게 말해놓고··· 번복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딱 한 번만 전서구를 쓰게 해주면 안 될까?”
디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 역시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 될 거다. ···알잖나. 내가 이 저택에선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거.”
살아남기 위해선 지푸라기든 뭐든 다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
“그런 공작가에서 넌 내게 형 같은 존재였다.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는.”
‘형’이라는 단어의 등장에 디터의 눈이 커졌다.
“팰러스 형님이 계시긴 하지만, 그분과 내 관계가 어떨지는 네가 더 잘 알 테고···.”
디터의 말이 없어졌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짐에 따라 내 마음은 몹시 불편해졌지만.
“그냥··· 단 한 번만이라도 각하의 기대를 충족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거든.”
그렇게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데, 디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서구를 쓰시지요, 도련님.”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정말? 그래도 돼?”
“한 번 정도는 들키지 않을 겁니다.”
디터가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내 손에 쥐여준다.
펼쳐보니 전서구용으로 쓰일 법한 기다란 종이다.
“여기에 내용을 적어서 가져오십시오.”
디터는 침대보 아래 숨겨뒀던 무언가를 꺼내 건네었다.
“이걸로 쓰시면 될 겁니다.”
무언가 하고 봤더니 흑연덩어리를 나무 막대 안에 박아넣은···.
“연필?”
이 시대에도 연필이 있단 말이야?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디터가 고개를 갸웃한다.
“도련님도 연필을 아시는군요. 아주 귀한 물건이라 들었는데.”
“음, 그게.”
“저는 원래 전서구를 관리하는 게 업무의 전부이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가지고 있으라며 총관님이 주신 겁니다.”
“잘 쓰고 돌려줄게.”
보아하니 연필의 초기 모델인 듯한데.
4차원 주머니에 연필을 집어넣은 뒤, 디터와 눈을 마주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디터, 정말 고맙다.”
모처럼의 진심이 담긴 말에, 디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디터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하더니, 살짝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야르 경 이야기를 듣고도 도련님을 도와드리지 못했으니까요.”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도··· 얼굴을 뵙고 기운이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제이콥 님이 늘 옆에 계셔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제이콥? 제이콥이 왜?”
여기서 제이콥이 왜 나와? 라는 표정으로 디터를 마주 보자.
“모르셨습니까?”
디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제이콥 님은 공작마님이 도련님께 붙여둔 감시자니까요.”
“···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사실이었다.
* * *
디터와 대화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제이콥이 감시자라고?’
우연히 알게 된 뜻밖의 사실에 머리가 몹시 복잡해지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의외의 소득을 올렸다는 점이 아니겠나.
나는 디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책상 앞에 앉았다.
‘제가 총관님 밑에서 전서구를 관리한다는 사실은 도련님만 알고 계십시오.’
전서구로 보낼 편지를 써서 얼른 디터에게 전달해야 한다.
나는 4차원 주머니에서 편지지와 연필을 꺼냈다.
“그럼 어디.”
가볍게 ‘공작 각하께’라고 쓰자, 이 세계의 언어인 듯한 꼬부랑 글씨가 펼쳐졌다.
역시, 언어패치는 책빙의물의 법칙 중 하나지.
그리고는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써야 할까.’
일단 이것만큼은 밝혀둬야겠다.
나는 공작이 세자르를 도와주거나 보호해줄 거라 생각해서 편지를 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그랬듯, 본인의 아내가 아이를 반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좌시했던 인물이니까.’
하지만 공작은 세자르를 저택으로 데려온 장본인.
핏줄에 대한 애착이나 세자르 개인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아이에게 뭔가 효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데려온 것이 아닐까 싶다.
세자르가 ‘죽을 뻔’한 것은 그냥 놔두었지만, 막상 죽음에 이르게 두지 않았던 걸 보면···.
‘목숨만 붙어 있는 걸로도 세자르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
그 ‘효용 가치’란 것이, 세자르의 출생의 비밀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줄기차게 떡밥으로 등장하던 비밀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 공작가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나아가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미끼를 던져야 한다.’
공작만이 알고 있을 그 비밀을 쥐고 흔들 필요가 있다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