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주제에 제법인걸
바야르가 헐떡거리며 연무장을 도는 동안, 병사들은 비난과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하, 어이없네. 검술스승이니 뭐니 유세를 떨더니···.”
“마님이 직접 데려온 인물이라길래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어이, 약골 선생! 한 바퀴 더 도시게!”
그때 ‘사생아 도련님’, 아니 세자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승리에 취해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눈빛을, 병사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허, 도련님. 보기보다 실력이 상당하십니다 그려? 그런 발놀림은 대체 어디서 배우셨답니까.”
“크크, 약해빠진 줄 알았더니 의외로 근성이 있으시네.”
병사들의 웃음에도 세자르는 웃지 않았다.
“···뭐가 그리 웃긴가?”
“네?”
“너희들은 뭐가 그리 웃겨서 그리 처웃냐는 말이다.”
“···!”
소년의 일갈에 연무장이 순식간에 싸해졌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두 눈을 꿈벅거리며 서로를 둘러보는 병사들.
“내가 저 약골 선생 따위에게 채찍질당하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너희들은 지금처럼 비웃고 있었잖나, 안 그래?”
“···.”
“강자에겐 빌빌대며 비위를 맞추는 주제에 약자에겐 가차없는 너희가 저 바야르 놈과 다른 게 대체 뭐지?”
병사들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들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아무 대꾸도 못하는데, 세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번에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서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병사들은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아주 작지만 강력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던 가운데.
구석에 앉아 있던 병사 하나가 혀를 찼다.
“···하,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그 말에 힘입어 다른 누군가도 맞장구를 친다.
“우리가 도련님, 도련님 해주니 진짜 귀족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응?”
“사창가에서 태어난 게···.”
“오냐오냐 해주니까 주제 모르고 건방지게···.”
세자르가 던진 돌에 잠시 흔들렸던 수면은 이내 평소의 부동 상태를 되찾았지만.
“호오···.”
닳을 대로 닳아버린 병사들 중에도 몇 명은 겁쟁이 소년의 반란에 깊은 인상을 받은 터였다.
이 레핀 공작가의 사병대 중 실력이 제일 뛰어날 뿐 아니라 전장에서 입은 영광의 상흔도 제일 많은 용병 ‘얼룩이’ 또한 그중 한 명이었으니.
“도련님 주제에 제법인걸.”
흉터가 가득한 투실투실한 얼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대련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니 제이콥이 식사를 가져온 참이었다.
“훈련은 잘하셨습니까?”
제이콥이 인상을 구기며 음식을 내밀었다.
나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갓 구운 빵과 수프, 사과 한 알과 우유 한 잔이 전부라니.’
현생에서 혼자 소 한 마리도 먹어치울 기세였던 내가 보기에는 개미 눈물만 한 양이랄까.
···물론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듯한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도 감지덕지이지만.
숟가락을 들고 수프그릇으로 손을 가져가다 이내 멈칫했다.
‘혹시라도 독이 들어 있다면?’
도전과제 목록 중 비소 중독이라는 게 있었지 않은가. 비소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사용돼온, 독살계의 스테디셀러 같은 존재다.
‘무색무취이니만큼 음식물에 섞어서 쓰기도 좋고, 부검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급성중독의 경우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숨이 끊어진다.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웹소설만이 아니라 추리소설 역시 독파한 장르소설계의 썩은물 독자이기 때문이라고 답해야겠지.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수프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어떻게 확인하느냐인데.
“···.”
내가 숟가락만 들고 머뭇거리자 제이콥이 미간을 확 찌푸린다.
“도련님, 뭐하십니까? 안 드시고.”
“···아, 이따가 먹을게.”
그 말에 제이콥은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제가 보는 앞에서 드십시오, 지금 당장.”
어, 저렇게 말하니 더욱 의심스러운데. ···혹시 여기에 뭘 타기라도 한 건가.
“이런 식으로 자꾸 남기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이 정도 양도 다 못드신다면-”
“한 입 먹어봐.”
“네?”
나는 숟가락을 제이콥에게 내밀었다.
“아니, 냄새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살짝 쉰내도 나고···.”
“그럴 리가 없는데요. 방금 막 끓여서 가져온 건데.”
“그러니까 네가 먼저 맛을 보라니까. 먹어보고 괜찮은지 말해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이콥의 눈치를 살폈다. 본인이 뭔가를 탔다면 한사코 먹기를 거부하겠지.
제이콥은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표정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숟가락만···.”
수프 한 숟가락을 떠서 침이 묻지 않도록 입 안에 조심스레 흘려넣더니, 고개를 젓는다.
“상하지 않았습니다. 드셔도 괜찮아요.”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스푼을 빼앗았다. 하인 놈이 멀쩡한 걸 보니 먹어도 괜찮겠지.
···배고파서 그런지 진짜 맛있네.
“···도련님?”
몇 년 굶은 걸인처럼 수프를 마셔대는 내 모습을 보고 제이콥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나는 빵을 뜯어 입안에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갓 구운 거라 그런지 포실포실한 속살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하다.
사과도 한 입 먹어볼까.
아삭아삭, 소리 몇 번에 사과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제이콥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유까지 원샷으로 해치우자.
“카아, 좋다!”
“···하, 이것참.”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는 나를 본 제이콥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아 왜, 먹으래서 먹으니까 또 왜 그러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띠링, 하며 [호감도 창]이 나타났다.
『하인 제이콥(호감도 +45점)
- 특성 : 상냥함, 다정함, 츤데레, 소시민
- 비고 : 험상궂은 얼굴과 정없는 말투 때문에 곧잘 오해를 받지만, 사실은 세자르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다.』
···뭐? 츤데레?
눈앞에 뜬 메시지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갑자기 제이콥이 흠흠 헛기침을 한다.
“잘 드시는 걸 보니 다행이군요.”
“···?”
“어제만 해도 자꾸만 먹기를 거부하셔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뭐, 뭐야.
내가 보는 앞에서 다 먹어치우라는 게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그나저나 도련님, 저 아래 하인들 사이에까지 소문이 다 났더군요.”
“소문···이라니?”
제이콥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아니 이제 보니 저건 저 사내 나름의 미소 짓는 표정인 듯하다.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오해했잖아.
“도련님이 바야르 경을 대련에서 묵사발로 만드셨다고요.”
“···.”
“바야르 경에겐 좀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제 속이 얼마나 다 시원한지 모르겠습니다.”
제이콥은 그 후로도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려가며 나의, 아니 세자르의 공적을 치하했다.
···내 검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고, 전의를 잃은 바야르 경은 무릎을 꿇고 나의 재능을 인정했으며, 그 광경을 보던 병사들은 감탄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고···?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저씨···.’
얼마나 과장이 심한지 내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보아하니 이 아저씨, 이렇게 무섭게 생겨가지고는 세자르의 진성 팬이었나 보다.
나는 이런 마음 착한 아저씨를 모르모트로 삼았던 것을 내심 반성했다.
‘미안하다, 제이콥.’
아무래도 앞으로는 독을 감별할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의 사건이 공작부인의 귀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나를 향한 살해위협 또한 한층 격해질 테니.
나는 이제 세자르의 영웅전기를 써나가고 있는 제이콥의 말을 잘랐다.
“저기, 제이콥. 혹시···.”
“네,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제이콥의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린다.
“식사량이 좀 적은 것 같은데.”
“···.”
“양 좀 늘려줄 수 있어? 끼니마다 빵도 두 개씩 주면 좋겠는데.”
제이콥은 어쩐지 말이 없었다. 애꿎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데.
“고기도 좀 주면 좋겠고. ···알잖아, 한창 성장기 소년에게는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이 시대 사람들이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생각한 순간.
제이콥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럼요, 조리장에게 얘기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다드릴 테니 걱정마십시오.”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험상궂게 일그러진 채였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가 살짝 충혈돼 있다.
아니, 그렇게까지 결의에 찰 일은 아닌데···.
“그래. 그럼 이만 나가봐.”
눈물을 참으려고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날 지경인 제이콥을 내보내고, 맘 편히 호감도 창을 띄워보았다.
『‘세자르 레핀’에 대한 호감도 목록(100점 만점)』
표현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세자르의’ 호감도가 아니라 ‘세자르에 대한’ 호감도 목록이다.
즉, 다른 인물들이 세자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대한 힌트가 된다는 의미.
『-??? ???(???점, 형태 ‘???’)
-사냥터지기 디터(+50점, 형태 ‘우애’)
-하인 제이콥(+45점, 형태 ‘동정’)
-조리장 벤(+38점, 형태 ‘동정’)
-형 팰러스(+20점, 형태 ‘호기심’)
(*호감도가 높은 순으로 최대 5명까지 정렬됩니다. 다음 페이지를 열람해주세요.)』
목록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맨 위의 물음표투성이 인물.
<왕도의 대가> 작가가 워낙에 떡밥을 던지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힌트를 줄 것이 분명하다.
‘이 떡밥은 차차 찾아내기로 하고.’
그래도 호감도 목록을 보니, 외딴 섬처럼 살던 세자르에게도 소수나마 호감을 지닌 인물들이 있다는 게 실감난다.
이 중에서도 ‘사냥터지기’라 적힌 디터는.
『저는 도련님이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이 같은 대표 대사에서도 드러나듯, 이 소설에선 보기 드문 올곧고 순수한 인물이다.
세자르는 자신을 유난히 살갑게 챙겨주는 디터를 하나뿐인 친구이자 형처럼 여겼지만···. 후일 팰러스의 계략에 넘어가 디터를 멀리하게 된다.
‘시간이 나는 대로 디터를 만나봐야겠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이제는 좀 다른 형태의 감정이 등장했다.
-아버지 레핀 공작(10점, 형태 ‘무관심’)
-검술스승 바야르 경(-30점, 형태 ‘증오’)
-계모 리아나 공작부인(-30점, 형태 ‘증오’)
아버지는 무관심, 새엄마는 증오라.
이러니 세자르가 팰러스에게 홀딱 넘어갈 수밖에 없지.
“···호감도 목록은 이게 끝이군.”
내용을 전부 살펴보고 나자, 작가가 마련해놓은 이 ‘호감도 목록’이 얼마나 큰 메리트가 될지 새삼 느낌이 온다.
세자르의 세계가 한정된 지금에야 별다른 효용이 없겠지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는 상황이 다르지.’
게다가 목록에 나온 인물들과 직접 마주할 때는 추가 메시지가 뜨지 않는가. 거기에 나온 ‘특성’과 ‘비고’의 내용은 내가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터.
<왕도의 대가>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무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핵심 요소는 정치력과 인맥, 그리고···.
‘정보력이지.’
그런 면에서 나는 이미 어마어마한 메리트를 지닌 셈이 아니겠는가. 바야르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정보의 힘 덕분이었다.
아무리 내가 에페 선수였다 한들, 처음 이 몸에 들어와 처음 쥔 검으로 상대를 이겼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우니까.
‘대련에 한 번도 나서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안 봐도 뻔하니 말이지.’
하지만 이런 요행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리는 없다.
그런 면에서 나의 목표는 분명하다.
일단은 세자르의 육체를 꾸준히 단련해 현생의 기술을 100% 시현 가능하게 만드는 한편.
‘팰러스가 이능자들을 가신으로 거둔 것처럼.’
이 세계의 다양한 강자들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을 키우는 것.
그렇게 목표를 정리하던 중, 반가운 메시지가 눈앞에 떴다.
[도전과제 ‘복수는 나의 취미’ 달성! -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엿먹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도전과제 중에 이런 게 있지 않았나.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엿먹여봤나요?]
바야르를 콕 집어 말하는 듯한 과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딱이란 말이지.
이번엔 대체 무슨 보상이 주어질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가운데 환한 빛이 시야를 물들었다.
[보상 ‘은수저’를 수령했습니다.]
그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땡그랑! 하고 은수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은수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