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
병사들이 나와 바야르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다들 흥미진진해서 죽으려는 표정이다.
‘저 겁쟁이 사생아 새끼가 먼저 대련을 신청했다고?’
‘근데 또 모르지, 바야르 경의 실력도 입증된 적이 없잖아?’
그런 유의 대화가 작은 소리로 오가는 가운데, 나는 여유롭게 자세를 잡았다.
‘앙가르드(준비).’
두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린다. 무릎은 살짝 구부리고 칼 끝은 상대의 가슴으로 향한다.
“하, 기본 자세도 모르는 주제에···.”
코웃음치는 바야르와 누군가가 겹쳐 보인다.
‘뭐? 발목 부상? 그게 왜 내 탓이냐 새끼야? 내가 언제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김현우, 너 이미 협회에 밉보인 거 알지? 가진 건 좆 같은 자존심밖에 없는 너 같은 새끼 하나 나가리돼봤자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한 마디만 더 나불거려 봐, 업계에 아예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줄 테니.’
내 부상에 원인을 제공하고도 사과하긴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았으며, 내가 일을 크게 만들 것이 두려워 겁박과 협박을 일삼던 수석코치.
그 빌어먹을 새끼와 바야르의 얼굴이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군.’
타인의 인생을 끝장내도 되는 권한을 지녔다고 믿는 권력자들과,
그런 권력자들에게 빌붙어서 온갖 더러운 일도 서슴지 않는 쓰레기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나는 이 불쌍한 아이가 처한 상황에,
나의 억울했던 지난 시간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어느샌가 이런 다짐을 하고 있었으니까.
‘두 번 다시 제 다리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묵사발을 내주마.’
심판을 맡은 병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부터 세자르 도련님 대 바야르 경의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병사들의 함성 소리 속에서-
‘알레(시작)!’
부웅!
두 개의 검이 공중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시작한, 수도 없이 반복해온 풋워크. 리듬에 맞춰 춤을 추듯 앞뒤로 가볍게 스텝을 밟는다.
“춤추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야?”
“무슨 발놀림이 저렇게 현란하대.”
바야르 역시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싶은 얼굴.
금세 정신을 차린 그가 얼른 검을 움직였지만-
‘보인다, 보여.’
느릴 뿐 아니라 엉성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수를 상대에게 모두 보여주는 허술한 자세.
부웅! 챙!
나의 검이 순식간에 바야르의 검을 막아냈다.
“···!”
바야르의 눈이 커졌지만, 이내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다.
“호, 웬일로 첫 합은 버텨내셨군요 하지만···.”
그 이상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실력 파악을 마친 만큼 더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내가-
흡사 복싱선수처럼 스텝을 밟다가 지면을 세차게 박차며,
‘플레시(점프하듯 찌르기)!’
번개처럼 허점을 노렸으니까.
그의 옆구리에 생긴 빈틈을, 가느다란 검 끝이 찌르고 들어갔다.
“크윽!”
주변의 술렁거림이 한층 커졌다.
“저, 저런 건 처음 봐!”
“언제 막내공자가 저런 움직임을···.”
“저런 검술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이 당시 애들이 보기엔 편법에 가까울 터다.
그냥 몇 십 년 뒤의 기술도 아니고, 정점을 찍은 2020년대 스포츠과학이 집대성된 것이 바로 대한민국 펜싱의 현주소이니까.
‘팡트(찌르기), 팡트, 팡트!’
나는 스텝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발놀림과 검이 빨라질수록 바야르는 계속해서 빈틈을 노출했고.
‘이건 수를 읽을 필요도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수준이로군.’
그때마다 나의 검 끝이 그의 신체 부위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으악!”
제 아무리 훈련용 검이라 한들, 고통이 없을 리는 없다. 무엇보다 힘이 상당히 실린 터였으니까.
바야르의 자세는 거의 다 무너져 있었다. 마침내 그의 손에서 힘이 풀린 순간.
‘바떼(검을 쳐내기)!’
챙그랑!
두 검이 맞부딪친 순간, 바야르의 손에서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제 손에서 멀어져가는 검을 바야르가 허망하게 올려다보는 순간.
“여기까지다.”
내 검이, 그의 목젖을 누르고 들어갔다.
고통에 눈이 반쯤 풀린 바야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나 보지?”
귀신을 보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목에, 다시 한 번 검 끝을 가져다 댔다.
“대련에 졌으니 공약을 이행해야지?”
“크, 크윽···.”
검에 좀 더 힘을 줘보았지만, 바야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와 바야르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야유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
“바야르 경, 비겁하십니다!”
“그렇지, 사내라면 제 입으로 뱉은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외쳐라! 외쳐라!”
“겁쟁이임을 인정하라!”
병사들 사이에서 조롱과 비난의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가, 감히 어디 스승에게 그런!”
목젖을 누르는 검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진 바야르는 마지막까지 철판을 깔기로 작정한 듯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한숨을 쉬는데, 그는 눈에 독기를 담은 채 내게 속삭이듯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세자르! 네가 감히 마님의 오른팔인 날 이리 능멸하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바야르의 손 끝이 벽에 걸린 채찍을 가리켰다.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되게 당할 줄 알 거라!”
···본인은 나름대로 ‘세자르의 몸에 각인된 공포를 일깨우기’를 최후 수단으로 택한 모양인데.
나쁜 전략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왜냐.
“···.”
모두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검을 떨어뜨렸다.
흙빛이 된 바야르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아왔다.
“역시 그렇지! 네가 이 스승을-”
퍼억!
내 발에 복부를 직격당한 바야르가 컥, 하고 신음을 토했다.
“이, 이게 무슨··· 컥, 흐윽···.”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내 발이 다시 한 번 그의 배를 갈겼다.
“난, 네가 아는 세자르가 아니야.”
매일 같이 위액을 토할 정도의 고강도 훈련을 십여 년간 계속해오고.
어쩌다가 경기에서 지기라도 한 날에는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근성과 호승심으로 똘똘 뭉친 김현우이니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을 쉴새없이 두들겨팼다. 바야르의 입에선 비명과 신음만이 이어졌다.
“야,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놔둬. 본인이 자초한 건데 뭐.”
“저러다 죽겠는데.”
“그러게 시킬 때 재깍재깍하지 괜히 고집부려서···.”
마지막 한 방은 세자르를 대신해서 날려준 순간.
바야르가 피가 철철 흐르는 입술로 황급히 외쳤다.
“하, 항복! 항복!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후의 광경은 깨나 희극적이었다.
“나는··· 실력이 들통나는 게 두려워 대련도 못 하는 겁쟁이입니다!”
“더 크게! 안 들린다!”
온몸에 피멍이 든 바야르가 연무장 안을 돌았고.
“나는 실력이 들통나는 게 두려워 대련도 못 하는 겁쟁이입니다!”
그 모습을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바라보았다.
나 또한 연무장 구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그 광경을 감상했다.
‘이런 맛이 있구만.’
엉망진창이 된 바야르가 바보 같은 구호를 외치며 끈덕지게 연무장을 도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진짜로 시원하게 웃고 나니, 깨달음이 밀려온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경기를 치를 때도 그랬다.
상대방이 공격해오길 기다리느니, 단점을 노출하는 한이 있어도 선방에 나서는 성격.
숨어서 벌벌 떠느니 밖으로 나가 승부수를 던지는 인간이 바로 나다.
선배가 날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새끼야, 너 같은 놈들이 꼭 내기 도박에 빠져서 패가 망신한다니까.’
하지만 어쩌겠나.
난 이미 승부에, 반전에,
전쟁의 짜릿함에 길들여졌는걸.
<왕도의 대가>에 빠져들었던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모두가 발암 핵고구마라며 줄기차게 욕하지만, 욕하면서도 볼 수밖에 없는 MSG 가득한 전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매순간 뒤집어지는 전황과 쉼없이 이어지는 반전의 반전.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야말로, 내가 평생을 살아온 세계였으니까.
한 번의 ‘투셰’로 싸움의 승패가 갈리는 세계.
매순간이 단 한 번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투쟁이자 진검 승부인 곳.
남들은 스낵컬쳐라 부르는 웹소설 속에서, 나는 오히려 ‘진짜 인생’의 향수를 느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그래서였을까.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고? 그것도 몇 년 후에 살해당하는 엑스트라의 몸에?’
그 황당하고도 끔찍한 현실에 통탄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평생 진검 승부를 하며 살던 내게, 또 한 번 승부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이다.
“하하하.”
미친 듯이 웃는 나를 병사 몇몇이 섬뜩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저 즐거울 뿐이다.
바야르 경을 묵살낸 이 날이야말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