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4화 (4/176)

현대의 펜싱이 여기서도 통할까

대체 어떤 보상이 나올까 기대하는데.

[보상 ‘고양이 요정의 4차원 주머니’를 수령했습니다.]

어, 음··· 뭐라고?

감을 잡을 수 없는 설명에 잠시 멍해졌다.

파앗- 눈앞에 환한 빛이 일더니 무언가가 투욱, 하고 떨어졌다.

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난 뒤 눈앞에 나타난 물체는.

“···.”

허리에 매는··· 주머니?

보아하니 벨트에 매달아 쓰는 것 같은데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

“여기에 넣어봐자 얼마나 들어간다고···.”

혀를 차며 혼잣말을 한 순간, 메시지가 떴다.

『‘고양이 요정의 4차원 주머니’(가격 : ????)

- 설명 :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어떤 물건이든 넣을 수 있음.

- 비고 : 평소에 잘 정리하지 않으면 꺼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림.』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아공간 주머니라는 얘기지?

“엄청난걸.”

작가가 작정하고 퍼주려나 보네. 나는 입가의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며 주머니를 허리춤에 단단히 맸다.

겉보기엔 낡아빠진 가죽주머니에 불과하니, 누군가에게 노려질 염려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럼 이번엔 본격적으로 세자르의 몸을 살펴볼 차례.

귀족 자제가 입기에는 살짝 허름하다 싶은 셔츠를 벗고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음···.’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로 깡마른 몸이다. 근육뿐 아니라 지방도 표준 이하라더니, 군살이 너무 없어 갈비뼈가 살짝 드러날 정도.

“어? 뭐야, 이거.”

그보다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끔찍한 흉터들.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채찍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어릴 때 당한 학대의 흔적인가 싶지만, 잘 살펴보면 아문 지 얼마 안 된 상처들이다. 저택의 누군가가 세자르를 괴롭혀온 게 분명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베푼 대로 되갚아주마.’

···그러기 위해서는, 세자르의 신체 능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겉보기에는 완전히 약골 같지만, 암살자로 활약했다는 소설 내용을 보면 보기보다는 튼튼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앞구르기와 뒷구르기부터.’

무리없이 잘되는 걸 확인한 뒤, 30초간 발바꿔뛰기를 해봤다. 선수 시절 지겹게 했던 스텝 훈련의 일종이다.

세자르의 신체는 내 명령을 한 치 오차도 없이 수행했다.

두 발은 지시에 맞춰 정확하고도 빠르게 교차했으며, 속도를 높이면 그에 곧바로 적응했다.

“와···.”

나는 잠깐 멈춰서 이 기분을 한껏 음미했다.

지시대로 움직이는 두 발이라니, 어쩐지 감격스럽다.

‘너무 기쁜걸.’

좋아, 다음엔 높이 뛰기를 해볼까.

정자세로 선 채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점프를 하자!

상당히 높게 뛰어오르는 것 아닌가.

‘훌륭한데?’

비록 체격도 작고, 근력과 완력은 부족해 보이지만.

지난 몇 년간 나를 괴롭히던 발목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근육은 천천히 키우면 되니까.’

단백질도 챙겨먹고 근력 운동도 꾸준히 하고.

체격이 작다면 필요한 만큼 벌크업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원작에서 ‘암살자’로 활약하는 걸 보면 유연성과 민첩성이 훌륭한 몸 같다.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사지 멀쩡하고 고장난 데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렇게 다시 옷을 입고 ‘호감도 창’을 살펴보려던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바야르 경이 급히 찾으십니다.”

제이콥이었다. 보아하니 바야르 경이 뚜껑이 열린 모양인데.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느긋하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연무장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검술을 연습하는 초보 기사부터, 챙챙거리며 꽤 그럴싸한 대련을 진행 중인 이들까지.

병사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된 순간, ‘바야르 경’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도련님, 지금껏 어디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설마 벌 받는 게 두려워 훈련장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으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

“자꾸 이러시면 마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바야르는 ‘공작부인’의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띠링! 하며 [호감도 창]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검술스승 바야르 경(호감도 -10점)

- 특성 : ‘상습학대자’, 비열, 허세, 강약약강, 겁쟁이

- 비고 : 공작가에 고용된 후로 단 한 번도 대련에 참가한 적이 없음.』

이건 뭐야? 상습 학대자?

‘바야르 경’의 특성을 보고 눈이 커졌다.

‘이놈이구나.’

세자르를 여태 학대해 트라우마까지 생기게 만든 범인.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세자르는 10살에 이 저택에 들어온 후 완전히 방치당하며 컸다.

사교행사 같은 데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함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주변인들과 교류하는 것도 금지당했다. 가족 식사에도 참석할 수 없어 매일 방에서 혼자 식사해야 했으니까.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나 다름없었지.’

그 정도로 아이를 몰아붙이던 공작부인이, 갑자기 세자르를 위한 검술스승을 고용했다?

그 속내에는 역시 검은 꿍꿍이가 있던 거였다.

그리고 그 꿍꿍이란 바로,

‘세자르에게 육체적인 학대를 가하는 것.’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기껏해야 열 살을 겨우 넘긴,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불쌍한 어린애를 상대로.

그리고 내 눈 앞에 있는 바야르란 놈은, 그런 공작부인의 명을 아주 충실히 수행하는 인간 말종이고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절로 이가 바득 갈린다. 이런 놈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손을 봐줘도 모자른 법.

‘이 자식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비고의 내용에 따르면 대련을 한 번도 안 했다고 하는데,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가능성 1.

이곳에 있는 자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거나.

가능성 2.

형편없는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바야르 놈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유난히 왜소한 체구나 부실하기 그지없는 하체.

검을 잡는 손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굳은살 하나 배기지 않은 손을 보니-

‘가능성 2가 훨씬 설득력이 있는걸.’

그런 내 속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바야르가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한쪽 벽에 걸린 채찍을 집어들었다.

“수련에 늦었으니 벌을 받으실 각오는 돼 있겠지요?”

당황할 만한 상황에도 나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몰래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이런다는 것만 봐도, 세자르가 평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만하니까.

‘레핀 공작에게 거두어지긴 했지만, 가문의 성조차 받지 못한 사생아.’

어릴 때 당했던 학대로 인해 트라우마까지 있는 겁쟁이 사생아라니, 이보다 더 장난감으로 삼기 좋은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잘 안 들린다는 듯 한쪽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뭐라고?”

“수련에 늦으셨으니 벌을-”

“그대가 내게 벌을 준다고?”

바야르는 이게 무슨 까마귀 고기를 먹었냐는 눈빛으로 두 눈을 껌벅거렸다.

“이 바야르는 엄연히 공작부인의 명을 받아 도련님의 스승으로 임명된-”

“스승이고 제자이기에 앞서.”

나는 일부러 한 박자 뜸을 들였다.

“일개 기사인 네가, 감히 공작가의 피를 이은 내게 벌을 주겠다는 말인가?”

고인물 아닌 썩은물 독자로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을 들먹이는 것만큼 효과적인 협박은 없다는 거다.

“···.”

잠시 당황한 듯 보이던 바야르의 한쪽 입꼬리가 실그러졌다.

“하, 이거 신선한데. 오늘 뭐 ‘용기의 물약’ 같은 거라도 드셨습니까 도련님? 아니, 귀신이라도 씌이셨나?”

그 말에 주변의 기사들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저러나, 나는 주변 벽에 걸린 검들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판타지소설에 흔히 나오는 롱소드가 아닌, 찌르기용의 스몰소드다.

‘양손검이 아니라 한손검인 게 다행이네.’

한손으로 들어보니 대략 1킬로에 못 미칠 것 같다. 폼멜과 가드도 붙어 있고, 전에 쓰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생각해보니 천만다행인걸.’

내가 보유한 펜싱 기술이 통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레이피어 같은 세검을 사용한다는 전제하에서다.

양손검을 주로 쓰는 일반적인 중세풍 판타지소설에 빙의했다면 이것이 대단한 메리트가 될 수 없겠지만···.

‘<왕도의 대가>는 중세물이 아니라 17세기풍의 궁정물이니까.’

전쟁에서는 머스킷 등의 총기류가 본격 등장하는 시대이다 보니, 검 또한 호신용 혹은 결투용이라는 용도에 걸맞게 가벼운 세검이 주류라는 설정이다.

‘과연 현대의 에페Épée가 여기서도 통할까?’

연습용 검으로 죽을 일은 없을 테니 해볼만 하겠는걸.

개중 손에 쏙 들어오는 검을 꺼내들어 가볍게 휘둘러본 뒤, 킬킬거리는 바야르를 향해 말했다.

“바야르 경, 내 그대에게 제안 하나 하지.”

“흠, 설마 벌 받는 게 무서우니 부디 용서해달라는 제안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주변 병사들이 더 크게 웃어댔고, 바야르 역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지금은 그렇게 웃어두라고 바야르 경. 뼛속부터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해줄 테니.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와 검술 대련을 하지 않겠나?”

“···?”

바야르는 이놈이 미쳤나, 하는 눈빛이었다.

“그대가 이기면 지난번 받은 벌을 두 배로 받도록 하지.”

“나쁘지 않군요. 도련님이 이기신다면?”

“그때는.”

내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나는 실력이 들통나는 게 두려워 대련도 못 하는 겁쟁이입니다, 를 외치며 연무장을 열 바퀴 돌도록.”

바야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함께 웃어대던 병사들도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았다.

···어째서 바야르 경이 한 번도 대련에 참가하지 않는지 저희들 나름대로 의문이 들었을 테니까.

잠시 당황했던 바야르는 이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하. 근래 들어본 말 중에 제일 우스운 말이군요. 어디 광대 학교에서 수업이라도 듣고 오셨습니까?”

“내가 그대를 즐겁게 했다니 보람이 있군.”

나 역시 입가를 구기며 말을 이었다.

“···건방 떠는 건 그 정도로 하고.”

옆에 걸려 있던 검 하나를 붙잡아 바야르의 발밑에 집어던졌다.

“검을 들라고, 겁쟁이 새끼야.”

“···!”

바야르의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다.

이쯤에서 참고삼아 말하는데 현생의 나는,

펜싱, 사격, 수영, 승마, 육상의 다섯 개 종목을 겨루는 근대5종 선수였으며.

근대5종으로 전향하기 전에는 펜싱 국가대표였던 만큼, 에페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펜싱이란 의외로 전술이 중요한 종목.’

상황에 따른 전술을 사전에 확립하고, 이를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적응해야 한다.

그러니 비록 이렇게 비리비리한 세자르의 육체라 해도,

나의 센스와 전술이 더해진다면-

“대련 한 번도 안 해본 네 놈 따위, 묵사발로 만들어줄 테니.”

단 한 번 정도는 이길 수 있다는,

예감이 아닌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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