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서자로 살아가는 법-3화 (3/176)

과제와 보상

내가 책빙의를 했음을 확신하는 데는, 이 한 줄의 대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세자르 도련님, 제이콥입니다. 기침起枕하셨습니까?”

일단 ‘기침’과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빼도 박도 못하는 거다. 그걸로도 확신할 수 없다면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라.

기둥이 달린 으리으리한 침대.

대리석 기둥 같은 게 줄 지어 늘어선 중세풍의 저택.

창문 밖에는 초록빛 장원이 시야 끝까지 펼쳐지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씨발, 좆됐네.”

“···세자르 도련님?”

자신을 ‘제이콥’이라 밝힌 험상 궂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한다.

책빙의물에서 이런 대사를 하는 인물은 보통 집사 아니면 하녀인데.

‘세자르의 수발을 드는 하인인가 보군.’

하지만 ‘도련님’이라는 호칭과는 달리, 나를 대하는 제이콥의 태도는 그리 공손하지 않다.

‘나는 너를 공손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지만 어쨌거나 신분상 너는 귀족이고 나는 평민이니 도련님이라고 불러주기는 할게,’ 뭐 이런 느낌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적당한 사극톤으로 대꾸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연무장에서 바야르 경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시바삐 채비를 마치시고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인치곤 꽤 격조 있는 말투를 구사하긴 하는데, 어째 저 말이 나한텐 ‘쌔빠지게 준비하고 싸게싸게 움직여라, 엉?’ 같은 식으로 들리는지 모르겠다.

“알겠네.”

연무장, 바야르 경. 보아하니 세자르의 검술 스승인 것 같다.

연무장이 어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하녀나 하인을 붙잡아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가 이 몸에 내가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눈치채면 어떡하지?’

일반적인 책빙의물 주인공들은 보통 이런 걱정을 하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아무리 지랄 환장 파티를 펼쳐도 주변에선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건 책빙의물의 클리셰이자 일종의 법칙이라고 봐도 된다.

독자 입장에선 어이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봐라.

‘내가 모시던 도련님의 몸에 이세계의 영혼이 들어온 것 같아! 심지어 그 영혼은 이곳의 이야기를 소설로 읽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독자!’

-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도련님이 좀 맛이 갔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거지.

침대에서 일어나자, 한구석에 자리한 전신 거울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세자르의 실물은 어떨까.

나는 살짝 기대하며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와. 쩌는 미모.’

어깨 위쪽에서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푸른 눈, 중성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얼굴.

거울에 비치는 선량한 눈매의 미소년은, 소설 속에 묘사된 세자르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이는 열세 살, 아니 열네 살 정도인가?’

키는 160 후반 정도.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체격이다.

‘뭔가 신기한 기분이네.’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아니 심지어 이 몸이 내 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묘하다. 나도 모르게 거울에 손을 뻗은 순간, 눈앞에 메시지창 같은 것이 떴다.

[도전과제 ‘소설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달성! -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었습니다.]

[보상 ‘상태창’을 수령했습니다.]

이건 뭐야.

메시지창에, 상태창이라고? 도전과제와 보상? ···혹시 그건가.

‘일단은 좀 많이 퍼주세요.’

‘상태창은 어떠세요?’

작가 ‘역4서’와 쪽지로 나눴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내 조언 때문에 갑작스럽게 도전과제 시스템과 상태창을 넣은 걸까?

과거의 나, 정말 잘했어! ···아니, 아니지. 어찌 보면 그 쓸데없는 오지랖 때문에 지금 이런 지경이 된 건데···

‘그래도 상태창이 있으면 한결 살아남기 편하겠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을 거다. 가급적 많이 많이 퍼주면 좋겠는데.

기대감에 살짝 들뜬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상태창.”

정말로 ‘상태창’이 떴다.

···생각보다 너무 조촐한 상태창이.

『세자르(인간, 14세, 남, 168cm, 51kg)

특성 : 선량, 학대받음, 겁쟁이, 트라우마

보유 재산 : 無

체중 ■■■□□|□□□□□ (표준이하)

근육량 ■■□□□|□□□□□ (표준이하)

체지방 ■■□□□|□□□□□ (표준이하)

도전과제 목록 | new (*도전과제 목록, 이라는 명령어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소지품 목록 | 無 (*소지품 목록, 이라는 명령어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 목록 | new (*호감도 목록, 이라는 명령어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잠깐, 이게 다라고?”

근육량이랑 체지방량 뭔데. 지금 이게 BMI 결과지인 줄 아나.

상태창의 기본 중 기본, 체근민 모르냐고! 아니 하다 못해 스킬이라도···.

‘아, 여긴 마나 개념이 없는 세계관이었지.’

<왕도의 대가>의 특징 중 하나.

마나도, 오러도 없는 세계관이라는 것.

엄밀히 따지면 마법은 존재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손가락 끝에 불꽃을 일으킬 정도? 역사서에나 언급되는 개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니 스킬이 있을 리가 없지.

반면 신들의 가호를 받아 생긴다는 초능력의 일종인 ‘이능異能’이라는 개념은 존재한다. 다만 이 역시 좀처럼 보기 힘든 재능이라는 것.

‘원작에서 팰러스가 이능자들 몇 명을 가신으로 거두었지.’

어쨌거나 이 상태창을 보면 세자르는 그냥 평범한 인간인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작가 놈이 상태창을 써본 적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맨날 미연시만 처 했나 호감도는 대체 왜 나오는 건데?

‘소설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는 개뿔.’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지나칠 정도로 발랄한 네이밍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세자르라니. 죽어라 이용만 당하다가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형의 칼에 살해당하는···.

‘아니, 아니지.’

그래. 말 그대로 세자르가 살해당하는 건 스무 살 때의 일이 아닌가.

아까 상태창에 나온 걸로 보면 지금은 열네 살이니까···.

“6년의 여유가 있는 거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

나는 자꾸만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애써 달래며 도전과제를 확인했다.

『도전과제 목록

-상태창의 모든 메뉴를 열람해봤나요? (미달성)

-대량의 비소를 먹을 뻔했나요? (미달성)

-목 졸려 죽을 뻔했나요? (미달성)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망신시켜봤나요? (미달성)

-누군가를 연기로 속여넘겨 봤나요? (미달성)

(*도전과제 슬롯은 총 5개. 슬롯이 빌 때마다 자동으로 새로운 도전과제가 나타납니다.)』

“···.”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비소, 목 졸려 죽어···.

그러니까 나 지금, 독살과 교살을 ‘도전과제’랍시고 내놓는 소설 속 인물이 된 거 맞지?

‘작가 놈 어딨냐.’

한 줄기 희망은 울분과 분노로, 기대감은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작가에 대한 원망으로 두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후우.”

일단은 심호흡이라도 하며 진정하자.

책빙의물의 포인트가 무엇인지, 고인물 아니 썩은물 독자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빠른 상황 판단과 체념, 향후 계획 수립.’

특히나 지금처럼 개복치 같은 몸에 빙의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 가능하면 세자르의 적들도 처리해야 하니까.

“독살과 교살 사주라니, 누가 대체···.”

머릿속의 기억을 열심히 헤집어보자 뒤늦게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세자르가 공작부인의 다양한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적이 있다는 것을.

남편의 혼외자식을 좋아할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싶긴 하지만, 공작부인의 경우는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음식에 독을 타고 암살자를 보낼 정도였으니.’

세자르는 그런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기는 하지만, 오랜 트라우마와 독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준 팰러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나는 두 뺨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집중력을 되찾았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사는 법.”

최악의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무엇보다 내겐 ‘상태창’과 ‘도전과제 및 보상’이라는 동아줄이 있으니까.

도전과제 목록을 다시금 세세하게 살펴보자,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건 어쩌면··· 엄청난 힌트가 될지도.’

맨 윗줄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어보기’. 그다음은 ‘상태창 전 메뉴 열람하기’.

내가 방금 전에 했던 일이거나, 곧 할 일들이다.

그렇다면 이 아래 적힌 도전과제들은-

‘말이 과제이지, 결국은 내게 일어날 사건들을 사전에 예고해주는 것.’

이 가정이 맞다면 내가 이 저택에서 살아남는 데 큰 힌트가 되어줄 거다.

게다가 도전과제를 달성할 때마다 보상을 준다니 상당히 혜자스럽기도 하고 말이지.

특히나 ‘상태창의 모든 메뉴를 열람해봤나요?’.

이건 말 그대로 튜토리얼 보상이잖아. 처음부터 이렇게 퍼주는 걸 보면 나쁘지 않다.

그럼 어디, 마지막 메뉴를 확인해볼까.

“호감도 목록.”

명령어를 외친 순간.

나도 모르는 새에 튜토리얼을 마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전과제 ‘튜토리얼이라고 들어봤나’ 달성! - 상태창의 모든 메뉴를 열람했습니다.]

[도전과제 달성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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