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120화
‘할아버지 생신이라…….’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대현은 일전의 대화를 상기했다. 할아버지 생신 모임은 오프라인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생신인데 비대면으로 진행되면 곤란하지.’
PC모드는 자유도가 떨어진다. 안 그래도 세부적인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 잘된 일이었다.
‘물론, 할아버지나 친척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제일 문제긴 하지만…….’
한때 프로게이머를 한다고 했더니 표정이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다른 친척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못 뜨면 은퇴하고 나서 할 거 없지 않냐고 그랬었지.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어떻게 됐으려나.’
일단 같은 전 학교 친구들만 봐도 못 믿겠다는 반응이 대다수니까, 어떨지 예상이 가긴 했다.
고대현은 가상현실 헤드셋을 쓰기 전, 진아에게 바뀐 사항에 대해 질문했다. 사전 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삼촌이랑 고모 쪽에서 오신다고?”
“응. 그런데 그건 왜?”
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대현은 사촌들의 위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현수랑 서희 누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본래라면 부모님께 물어보는 게 빨랐겠지만, 의미 없는 소리만 길게 늘어질까 봐 진아한테 물어봤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수현이는 입시 준비라서 바쁜데, 이번에는 올 것 같아.”
“그렇군.”
현수라고 있다.
맨날 비싼 과외 하면서 학원 다니는 애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명절 사연에 나올 것 같은 애였지.’
친척들이 걱정하는 척 몇 마디 던지면서 은근히 무시할 때.
꼭 옆에 껴서 비호감으로 굴던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번에 온다니……, 왜인지 모르게 귀찮아질 것 같네.’
간다고 했으니 무를 수는 없었다. 그때, 진아도 대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그녀가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히려 잘 된 거지.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끝나는 일인데.”
“글쎄다. 정규전 티어가 쓰레기라서 논란은 생길 것 같네.”
“그럼 간단하게 1대1 하면 되는 일이지.”
현수와 1대1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맨 처음 진아와 듀오를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서희 언니는 음, 저번 길드 심사에서 낙방해서 다음 공채 준비 중이라고 알고 있어.”
“그래? 그건 의외네.”
“일반적인 길드로 가면 적당한데 자꾸 상향으로 넣어서 그런 걸 거야 아마.”
큰 성 10개가 있고.
그 아래로 다양한 길드가 존재한다.
보통 성의 순위대로 길드 순위가 연동되는 느낌이었지만, 규모와 스킬에 따라 세부 분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나타난 게 9대 산하 길드.
일명 ‘베스트 나인’이었다.
“서희 언니가 넣은 곳이 베스트 나인 중에서 제일 순위가 높은 레기온 산하 길드였거든. 거기가 워낙 경쟁률이 높아서 서희 언니라도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봐.”
현 사회는 본 대륙에 계정만 있다면, 최저 기본 소득과 더불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즉, 사회 초년생 때 좀 잉여처럼 살아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균 수명도 늘어났지.’
따라서 초년생은 특별하지 않은 이상, 경험이나 피지컬을 더 늘리라는 명목하에 떨어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레기온 쪽 길드면, 기사단이랑은 다른 건가?”
“응, 길드는 라그나로크 때를 제외하면 평범하게 사냥하고 지내고 있으니까.”
대현은 길드가 아닌 기사단 소속이었다. 일종의 공기업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상 성의 고위직들과 만나는 일이 많으니, 고위급 공무원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럼 적당하게 있다가 와야겠네. 괜히 자극하지 말고.”
현재 고대현은 기사단은 물론이고, 아무 길드에 가도 쉽게 들어갈 만한 상태였다.
“오빠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말 꺼낼 확률이 높은데 뭘.”
“그런가?”
어차피 상대방이 먼저 자극할 거라는 게 진아의 의견이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지.’
대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서 가상현실 헤드셋으로 본 대륙에 접속했다.
저번에 보고했던 도파민 다운로더 관련으로 확인할 게 있었다.
[링크 스타트]
접속 음과 함께.
내면의 공간 속 모니터에 레기온 성 내부의 모습이 나타난다.
대현은 곧장 정태룡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태룡은 고대현을 맨 처음 불렀던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응, 덕분에.”
정태룡은 레이나프라에 대한 수색부터 진행하는 중이라며 운을 띄웠다.
“일단 레이나프라를 중심으로 유착 길드들을 조사하는 중이야.”
다행히도 레이나프라 쪽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한다.
“지금 다크 테이머도 다 구속하고 그 위에 연관된 반한연합도 찾는 중이야. 보니까 그쪽이랑 연관이 있더라고.”
“반한연합?”
“한국이랑 동맹이 아닌 곳들이 모인 조직이야. 아무래도 내부에 있는 다크 테이머한테 접촉해서 퍼트리려고 한 것 같아.”
다크 테이머는 쉽게 말하자면 고의성 트롤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반한연합의 권유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라그나로크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변수가 생길 뻔했어.”
정태룡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뭐, 겨우 이런 거 가지고……. 그런데 야나 이바노프는 어떻게 됐어?”
“아, 그건 말이지…….”
그때였다.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뒤에서 레기온 성주가 나타난 것은.
“아, 오셨어요?”
정태룡이 짧게 묵례를 한다. 대현은 레기온 성주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살짝 당황했다.
“잠시 둘 만이서 할 말이 있다.”
레기온 성주가 그렇게 말하고 정태룡이 자리를 비워준다. 마침내 남은 사람은 레기온 성주와 고대현, 둘 뿐이었다.
“야나 이바노프에 대해 말했던 정보는 잘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대현은 성주가 직접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룰 브레이커 때문에 그런 듯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간 끝에 레기온 성주가 말했다.
“그게 규칙을 재정립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지.”
한때 바체슬라프와 동맹 관계였기에, 레기온 성주는 룰 브레이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바체슬라프가 언젠가 저걸 모아서 쓸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조사한 길드에게 물어보니, 곧 왕이 천지를 결합시킨 뒤, 성스러운 창으로 공주를 빼낼 거라는 소문이 있더구나.”
“그렇군요…….”
그것은 고대현이 임기응변으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지금은 지하 감옥 근처에 병력을 배치했다. 이쪽에서 움직였으니까 바체슬라프도 인지하고 있을 거야.”
잡은 이상 소식이 상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따라서 야나 이바노프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앞에 병력을 상시로 배치하고 있었다.
“룰 브레이커가 그 정도인가요?”
성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 그대로 규칙을 파괴하는 거니까, 예시를 들자면 라그나로크 기간이 아니더라도 한국 대륙에 발을 들일 수도 있겠지.”
본디 라그나로크 때가 되어야 상대 대륙에 발을 들일 수 있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동맹이나 필드 스와핑을 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룰 브레이커가 있다면 그런 걸 무시한 뒤, 바다를 뚫고 올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히, 파격적인 효과긴 하네요.”
“그래, 이것도 하나의 예시일 뿐이지. 또 어떤 식으로 쓸지는 아무도 몰라.”
그런 이유로 레기온 성은 최상위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다른 성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대현은 이근희에게 들었던 성의 배반자를 상기하고 질문했다.
이에, 성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다른 성과의 공조는 하지 않았다. 그쪽 내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현명하십니다.”
역시 성주답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이참에 단검에 대한 것도 물어볼까.’
고대현은 지금까지의 대화로 성주가 충분히 바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마 단검을 얻으려면 기회가 얼마 없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달라고 하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잘못했다간 적으로 몰릴 수도 있고 말이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날 시험하는 듯하긴 해.’
고대현은 특유의 싸한 기운을 감지했다.
탑에서 라인을 밀 때 느껴지는 정글의 음산함이 주변에 산개해 있었다.
“아무튼, 다음 사냥조가 있을 때 널 부르려고 한다만. 괜찮겠지?”
“……·저야 불러주시면 고맙죠. 다 때려잡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성주는 짧게 입꼬리를 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말했듯이 바쁜지라, 그녀는 다음 일을 처리하러 가야 했다.
얼마 뒤, 다시 테라스에 혼자 남은 고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공을 제대로 세워야겠네.’
그가 그리 다짐하고 있으니, 정태룡이 다시 다가온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
“어? 아, 뭐. 잘했지.”
“그래, 그러면 오랜만에 레이드나 같이 갈래?”
정태룡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투를 하고 있었다.
‘연기는 아닌 것 같고…….’
감시 목적으로 붙여놓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감시 목적이 아니어도 거기서 거기였다. 성주 아들이 붙어 있는데 어쩌겠어.
‘아, 그러고 보니 퀘스트가 있었지.’
그때.
대현은 문득 패밀리어 퀘스트를 떠올렸다.
‘A급 몬스터 레이드랑, 내부에서 50시간.’
시간을 고려한다면 미리미리 하는 게 좋았다. 대현은 꺼림칙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와 레이드를 나서기로 했다.
“근데 다른 애들은?”
“음? 기억 안 나? 다들 그때 죽어서 한 달 접속 제한이잖아.”
“아.”
성 내부는 바쁘고 다른 애들은 접속 제한이었다.
결국, 대현은 정태룡과 단둘이 레이드를 떠나게 되었다.
* * *
한편, 그 시각.
“기간티아성에서?”
“응.”
이하린은 자신의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당연하게도 전지수가 했던 권유에 대한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걸 물어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기간티아는 좀 의외네. 넌 전혀 기간티아 타입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물어봤는데, 그런 건 차차 바뀔 거래.”
“흠.”
이근희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치다가 말했다.
“전인택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기간티아의 성주를 담당하고 있는 전인택.
이근희는 다행히도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곳이 투기장이었지.’
그녀는 전략상 비밀에 부쳐진 성주들의 스킬셋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전인택의 것은 더 잘 알고 있었다.
‘초창기 스킬은 다 주먹질 아니면 도끼질이었지.’
지위가 올라갈수록 스킬 페이지는 늘어난다.
전인택을 책으로 비유하자면, 첫 장은 로맨스였으나 뒤로 갈수록 호러로 변모하는 책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첫 페이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이근희는 한때 같은 레이나프라 출신이었던 그를 떠올리고는, 몇 분간의 고민 끝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락해. 이참에 내부 정보 좀 최신화하게.”
<1부 완결>
<2부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