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115화
푹!
날아가던 화살이 궤적을 틀다가 정확하게 표적에 맞았다. 그에 보고 있던 박하성의 팔짱이 저절로 풀렸다. 화살을 쏜 정태룡도 스스로 놀란 듯했다.
‘깨달음이 늦게 온 건가?’
잠깐의 정적 끝에 박하성이 추론했다.
갑자기 된 걸 보니 가르쳐준 것의 효과가 지금 나타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한 조언 하나로 저렇게 바뀌었을 리 없으니까.
“다시 쏴보시지요.”
박하성이 말했다. 성주가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이기에 대강할 수는 없었다. 정태룡이 박하성의 앞에서 다시 비술을 시연한다.
핏-!
첫발은 안정적으로 나간다. 문제는 연속으로 쏘는 2번째 공격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궤적이 엇나간다. 팔을 지지하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까는 운이었나?’
박하성이 고대현이 있는 방향을 응시한다.
고대현은 패밀리어의 보조 범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계약한 사람이 어디까지 가야 효과가 풀리나 확인해 본 것이었다.
‘거리가 꽤 짧네. 아직 싱크로율 분배기를 얻은 지 얼마 안 지나서 그런 건가?’
현재로서는 LOH의 용 둥지보다 살짝 넓은 면적만큼 효과가 적용되는 중이었다.
‘내가 가까이 가면 해결되겠네.’
고대현이 둘에게 가까이 가면서 말했다.
“다시 활시위 당겨봐.”
“다시?”
정태룡이 들고 있는 활은, 시위를 당기면 자동으로 마나를 응축해서 화살을 생성하는 고가품이었다.
끼이익.
정태룡이 다시 시위를 당기며 표적을 조준한다. 연속 사격에서의 떨림을 잡는 게 주요 포인트였다.
임계점까지 당긴 후, 멀리 있는 표적을 보던 정태룡은 아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팔 떨림이 없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쥐는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정태룡은 의아했지만, 일단 옆에서 수호기사가 보고 있었기에 손끝에서 힘을 놨다.
피잇-!
세차게 날아가는 첫발.
왼쪽으로 휘었다가 다시 방향을 돌린다.
이어서 두 번째 발.
처음 쐈던 궤적의 역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이내 표적에 닿는다.
푹푹.
원통형 표적의 양쪽에 박히는 화살.
시간차 공격을 통해 한 방향의 수비를 와해시키기 위한 기술 중 하나였다.
“오, 완벽하게 하셨군요.”
박하성이 짧게 박수를 친다. 일전은 애매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상황을 통제하면서 날린 2발이었다.
‘흠, 이상하긴 한데 뭐라 틈 잡을 게 없네.’
박하성의 고개가 자동으로 기사 대행, 고대현에게 돌아간다.
‘특별하게 전수해준 건 없다. 그런데 왜지?’
수호기사답게 전장을 읽는 실력이 1급인 박하성이다. 그는 변화의 중심이 고대현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음, 페이스 메이커…… 같은 건가?’
하지만, 정확한 시스템까지 추론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옆에 있으면 잘되는 심리적 페이스 메이커라 여겼을 뿐.
‘촬영도 했으니까.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
박하성은 속으로 결론을 내린 뒤 기록석을 챙겼다. 뭐가 되었든 간에 정태룡을 가르치는 일은 성주가 시킨 일이었고, 성과가 나왔으니 이제 성주에게 보고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나저나…….”
그렇기에 박하성은 이곳을 떠나기 전, 좀 더 근본적인 의문을 건네기로 했다.
“기사 대행이 여기는 왜 온 거지?”
“아, 생각해보니까 너 아까 낮에 뭐라고 메시지 보냈던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정태룡도 입을 열었다. 낮에 야나 이바노프 어쩌고, 라고 왔던 건 기억하는데 내용이 예상보다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지하 감옥에 있는 야나 이바노프가 빠져나온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인가.
초기의 고대현이었다면 ‘아, 사람 잘못 골랐네.’ 하면서 넘겼겠지만, 최근 그의 중요도와 몸값이 많이 오른지라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음…….”
고대현은 레기온 성에서 높은 위치를 자랑하는 2명을 디텍트 아이로 살폈다.
[이름 : 정태룡]
[빙의체 상태 : 양호]
[컨트롤 웨이브 : (굴절)형]
[이름 : 박하성]
[빙의체 상태 : 양호]
[컨트롤 웨이브 : (굴절)형 (탐지)형]
‘둘 다 각성 상태는 아니다.’
이 두 명이 이적 세력일 확률은 줄었다.
처음 보는 수호기사가 껴있긴 하지만 얼버무리기도 뭣하기에.
고대현은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저 정도 위치인 사람이 넘어간 거면 어차피 레기온은 망할 운명이니까.’
“길어질 것 같은데 어디에 앉아서라도 이야기하죠.”
3명은 한적한 테라스로 이동했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 동안 설명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레기온 성의 지하 감옥.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이군.”
신영범이 야나 이바노프가 갇혀있는 쇠창살 앞에 섰다.
야나 이바노프는 뒤돌아 앉은 채 벽을 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군.”
신영범은 오랫동안 반응이 없자 바닥에 앉았다. 야나가 벽을 보고 있는 동안 신영범은 그녀의 등을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알고 있었나?”
야나 이바노프가 입을 뗐다.
“응? 알다니, 뭘 말이지?”
“아니, 아니다…….”
야나 이바노프는 말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영범이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이근희와 관련된 사실을 알았다면 이미 조치한 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 사람은 실력 향상에 관해선 정직했으니까.
신영범은 순수하게 학생들의 실력을 위해서 자신에게 권유한 것이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중인 건가.’
야나가 생각에 잠겨 있으니 신영범이 묻는다.
“이하린 학생이랑 대결할 때, 마지막에서 기록이 훼손됐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록이 훼손됐다고?”
“그래, 처음 있는 일이라서 나도 좀 당황스럽다.”
그의 말에, 벽을 보고 야나 이바노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동그랗게 커진 상태였다.
‘벌써 그런 수준까지 가다니.’
바체슬라프의 진영에서도 사용자와의 반응을 겨우 일치 시켜 감시를 피하는 게 전부였다.
상대는 훨씬 작은 규모로 이쪽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수를 써야겠네.’
신영범의 표정을 살피는 야나 이바노프.
그가 다른 사람과 정보 공유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고려해야겠노라고.
야나가 속으로 고민하는 순간.
“수업은 할 거냐.”
신영범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야나 이바노프는 흠칫했다.
수업에 참여한다는 건 다시 그들을 봐야 한다는 거니 말이다. 아직 고대현을 어떻게 대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역시, 적 사단에 있는 편이라고 보는 게 좋겠지.’
그녀는 자동적으로 전지수에 대해 떠올렸다. 신영범의 말에 따른 이유에는 전지수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러나, 지금까지 수업을 하면서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본래의 재능에 따르게 개도해줘야 하는데.
이 더러운 한국 대륙에서 끄집어내야 하는데.
가까운 거리에 적 세력들이 더 많으니까.
이제 자력으로 설득하기엔 애매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턱 끝을 만지작거리던 야나 이바노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응. 아마도…….”
* * *
한편.
‘표정이 아주 진지해.’
고대현의 얼굴을 지긋이 보던 박하성이 속으로 되뇌었다.
아까 들었던 말.
터무니없지만, 증거도 충분하고 시기상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 이상한 아이템을 사용해서 탈옥할 거라는 말이지?”
“네.”
에인션트 바위게.
이 보스몹은 얼마 전에 박하성도 직관한 바가 있었다.
‘성주님이랑 레이드를 갔다가 한 번에 쓸려나갔지.’
레기온 성주가 레이드를 꾸려서 보스몹을 잡으려 했었다. 그것도 일격에 말이다. 덕분에 정공법으로 상대하지 못한 대다수가 아웃을 당했었다.
‘당시에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야나 이바노프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까 좀 다르게 보이네.’
레기온 성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템이 형량을 무로 돌릴 힘을 가지고 있다면, 성주 정도 되는 자가 탐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반한 연합이 노릴 만해.’
고대현은 이러한 정보를 반한 연합을 통해서 입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한 연합은 투기장을 돌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저 투기장 주인 녀석은 블랙리스트의 최하위에 있던 사람이니까. 아주 신뢰성이 없는 정보는 아니야.’
최근 라그나로크 준비에 앞서, 다크 테이머와 반한 연합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본디 순수하게 트롤 짓을 하던 다크 테이머와 반한 연합이 합세해서 더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큰 성에도 배신자가 속해 있다고 그랬지.’
어떤 성에 속했을지는 모른다. 단지 다크 테이머 모임에 위장 침입한 말단이 관련 찌라시를 들고 왔을 뿐.
따라서, 이번 일은 비밀리에 조용히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병력을 상시로 대기 시켜놔야겠군.”
경중에 따라서는 이대로 국외 추방도 논의해보겠노라고.
구석에 있던 3명의 인간 탑을 가리킨 박하성이 말을 잇는다.
“토벌대를 꾸리고, 이놈들 위치도 당분간 지하 감옥에 고정해야겠어.”
정해진 시간 동안 접속하지 않으면 계정이 삭제되며, 기본 소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억지로라도 접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리 시스템에도 문의할 거야. 유해성이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조치는 취할 확률이 올라가겠지.”
“휴, 다행이네요.”
“그런데, 용케도 이걸 조사할 생각을 했구나. 원래 이런 데에 관심이 있었나?”
찾게 된 과정에서.
대현은 이근희의 존재만 빼고 설명을 진행했다.
“제가 원래 이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군. 그래도 대행 기사 신분으로 그런 구역은 안 가는 게 좋아.”
“워낙 호전적인 성격인 건 알았는데, 레이나프라까지 갈 줄은 몰랐네.”
박하성의 말에 정태룡도 동조한다.
앞으로는 인식 저해 가면을 쓰면 되기에.
대현은 적당히 대답하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외부에 발설하지 마라. 이번 수색은 꽤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아직 제도화되지 않은 거라서 수작업으로 잡아야 하거든. 만약 정보가 새어 나가면 힘들어져.”
고대현은 디텍트 아이로 각성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저도 토벌대 참여를─.”
이에 그가 도와주려고 하니.
“아니, 이건 어른의 일이야. 윗선에서 알아서 할 테니, 넌 학교나 열심히 다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물론 각성 상태를 알 수 있는 것과 소멸 파동을 쓰면, 중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려주면 되겠지만.
‘이걸 믿어줄 리가 없지.’
대현은 이하린의 비술을 작동시키기에 앞서 3중으로 탑처럼 쌓여있는 손돌, 진철, 태무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상호작용 – F가 나타났다.
‘설마 이것도 안아서 처리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쓰기 싫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으니, 굳이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상대가 연막탄처럼 작동시킬 때가 있어요. 그전에 이 고글을 쓰면 안전할 거예요.”
“고글을 쓰라고?”
“네, 저는 운 좋게 이걸 쓰고 있어서 당하지 않았거든요.”
“때마침 이런 걸 쓰고 있었구나.”
“제가 고글을 좋아해서.”
“흠, 알았다.”
고글을 살피던 박하성은 아이템의 구조가 단순하다는 걸 눈치챘다.
‘분석하면 금방 양산이 가능하겠네.’
박하성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성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를 뒤에서 보던 대현은 느꼈다.
뭔가 일이 크게 벌어지려는 조짐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 * *
어른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박하성의 말에, 대현은 성의 내부 일에 더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역으로 주시 대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기조와 함께 평일이 찾아왔다.
고대현이 월요일 아침부터 경리단과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해란이네 아빠. 지하 감옥형에, 부모 양측 양육권 박탈, 격리조치까지 당했다고 하네.”
“진짜요?”
“응. 어제 치안 로봇이 들렀다 갔대.”
누군가가 중간에 관여했을지 뻔히 보인다. 그때 경고했던 걸 그대로 실천하시는구나.
대현은 문득 태해란이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럼, 해란이는 앞으로 어떻게 한대요?”
“아마 돈은 문제가 없을 거야. 비유하자면 물독에 난 구멍이 메꿔진 거니까.”
“돈은 딱히 문제가 안 되는 거군요.”
“그래도, 뭐, 심란하긴 하겠지.”
“잘됐으면 좋겠네요.”
“잘될 거야.”
토끼 산책은 짧게 마무리되었다.
대현은 학생 식당에서 이하린을 마주쳤다. 이하린은 무인 주문기 앞에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비싼 거 고르네?”
“응, 누구 덕분에 돈이 많아졌거든.”
이하린이 손으로 브이자를 하면서 미소짓는다, 저번에 베팅할 때 크게 얻은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나보단 적겠지만…….’
그때.
이하린이 입을 열었다.
“너, 성에 간 이후로는 어떻게 됐어?”
“성에서는 토벌대를 꾸려서 잡을 예정이라 하더라.”
“그래? 잘됐네. 우리는 접근도 불가능하고 수상해서 안 들어줬는데. 역시 엘리트 말은 잘 듣나 보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이하린.
괜히 이근희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했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이하린이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웃라인에서 본 다음부터는 서로 불가침 영역이 된 듯한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 퀘스트대로 바체슬라프의 단검을 가져와야 진전되겠지.
“저……, 앉아도 돼?”
그때였다.
전지수가 어색하게 물어보면서 합석을 요구한 것은.
“어, 괜찮아.”
당연하게도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이하린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하린이라고 그랬었나?”
전지수가.
“혹시, 기간티아 성으로 올 생각……, 있어?”
돌연 위와 같은 소리를 하기 전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