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113화
“쓰읍, 이거 첫판부터 이러면 좀 재수가 없는데…….”
“흠,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진철의 귀에 꽂힌다.
‘역시 반응이 안 좋군.’
LOH에서도 첫판을 간단하게 함으로써 감을 찾고 시작한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첫판은 간단한 도박 감 찾기 판 같은 거지.’
첫판이 애피타이저 무대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작하자마자 너무 많이 날리면 아예 정이 떨어져서 해당 판을 떠나버린다. 크게 대인 나머지 손댈 생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따는 구조로 가다가 막판에 많이 잃게 해야 지속적으로 오게 된다.
“에잉 쯧, 가자.”
이를 증명하듯 혀를 차던 사람 중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철은 멀리 있는 손돌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그는 턱 끝을 만지면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 정체가 뭐래? 옆에서 들은 거 없어?”
대기 시간, 진철이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질문하는 손돌.
진철은 얼핏 들은 바를 이야기했다.
“들어보니까 콜로세움 출신이라는데요?”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양지로 나온 투기장 중에 제일 성공한 곳이다. 이에 따라 규모도 크고, 참가자의 수준도 훨씬 높았다. 거기는 한명 한명의 이름값이 높아서 1대1 경기의 인기가 제일 높았다.
‘그곳 출신에 여자라면…….’
손돌은 상대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마법사 바이올렛과 또 다른 한 명.
귀찮다는 이유로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는 여자가 있긴 했다.
‘그 사람인가?’
좀 더 딱딱하긴 하지만. 실력이나 동작을 보면 얼추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근데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냥 학살하러 왔다고 말하던데요?”
“에라이…….”
그냥 스트레스 풀기 용이었나.
손돌은 미간을 구기다가 말했다.
“어차피 상황을 보니까 저기로 쏠릴 것 같으니까 다음 판에 확률 조작 좀 하지 뭐.”
다음 판은 토너먼트로 이루어지는 1대 1 결투로, 랜덤하게 나타난 무기를 들고 싸우는 판이었다.
‘단순히 돈을 안 걸고 구경만 하러 오는 관람자도 있다. 그들을 잃으면 안 돼.’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면 재미가 없기에, 그는 아이템 분배에 손을 써둬서 적당히 균형을 맞출 생각이었다.
몇 분 뒤, 다시 경기가 시작되고.
손돌은 제약 필드의 비율을 손봤다.
콜로세움 정도로 가면 불법에 속하는 일이지만, 여기는 사설이니만큼 공공연한 일이었고, 알아차린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자, 이번 경기는 1대 1 아이템 전입니다!]
‘1대 1 아이템 전?’
고대현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을 훑었다.
기본 스킬은 봉인된 상태에서 랜덤하게 나타난 아이템의 효과로만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의 1대 1이네.’
대현은 대진표를 보면서 관중석으로 마우스를 돌렸다. 전 판에서 너무 날뛰어서 그런가? 처음에 비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진 게 느껴졌다.
‘어?’
그러던 중.
고대현은 이하린의 옆에 있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온다고 하더니 또 왔네?’
하슬란에게 훈계를 받고 다시는 안 온다고 했던 태무진.
그가 이곳 사설 투기장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침 잘됐네.’
태무진은 도파민 다운로더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분명 이하린의 엄마가 말했던 반한 연합과 관계가 있겠지.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지금은 제약 필드에 동의한 상황인지라 투기장의 경기가 끝난 뒤에야 저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대현은 안내에 따라 대결 필드의 앞에 섰다.
“아까 혼자 캐리하던 사람이네?”
“저 사람한테 걸어야겠다.”
“일단 아이템은 보고 선택해. 아무리 잘해도 똥 같은 아이템 걸리면 나가리야.”
마지막에 들린 말이 괜히 신경 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팟-!
눈앞에 나타난 아이템의 효과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운명의 모닝 스타]
-공격력 + 10
무거워 보이는 건 당연하고, 효과도 단순한 데미지 증가.
반면 상대는 공격 속도 증가와 도트 데미지 효과가 달린 검이었다. 대현은 모닝 스타를 든 채 화면 속 자신을 컨트롤했다.
‘여기서 스킬은 못 쓰니까 순수한 피지컬 결투…….’
이 필드에서만 통용되는 설정 HP 값이 떨어지면 탈락하는 시스템이기에, 반응 속도가 뛰어난 대현도 신중해야 했다.
“합!”
스핏-!
발끝을 들기 바쁘게 상대가 공격을 시작한다.
검이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대현은 구르기를 써서 거리를 벌렸다.
처음 보면 놀랄 만할 정도의 스피드지만, 이미 전 경기에서 나왔으니. 상대도 노련하게 대응했다.
팍!
바닥을 구성하고 있던 모래를 발로 찬다. 대현의 안면에 모래가 날아들었다.
이에 관중석 쪽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상 대미지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진 데다가 무기까지 구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이템이 구리니까 안 되겠지?”
“그렇겠지 아마…….”
“많이 움직였으니까 오히려 불리할걸?”
“하긴, 그렇게 움직였는데…….”
또다시 결과 예측 제출이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결정이 뒤집혔기에, 고대현이 이기는 쪽으로 55%가 되었다. 거의 반반이라고 봐도 좋았다.
‘어차피 고대현이 이겨.’
고대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이하린은 그에게 걸었다. 첫판에서 20배 이상 불어난 코인을 전부 걸었다.
‘저번 수업에서도 눈이 안 보이는데 싸웠으니까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퍼억-!
그녀의 예상대로.
고대현에게 통하는 일은 없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공격을 날린다.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아이템이기에 결판이 빨리 났다.
빙그르르- 푹!
[스, 승자…… 5번.]
뒤늦게 바닥으로 떨어진 검과 함께.
고대현의 번호가 허공에 나타나면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아, 아깝네.”
“쯧쯧, 애초에 애피타이저 경기 에이스인데 왜 다른 사람한테 거냐?”
“그 정도로 움직였으니까 지칠 줄 알았지…….”
들려오는 관중들의 소리.
그들은 5번이 첫 경기에서 무리했기에 승률을 예상보다 낮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5, 5번…… 승!]
고대현은 이어지는 경기에서도 전부 압승을 거두었다.
심지어 갈수록 아이템의 성능 차이가 벌어졌는데도 말이다.
누가 봐도 5번은 더 무거운 무기, 맞서는 이는 경량화되고 강한 무기가 부여되었다. 그뿐만이랴. 일전의 경기에서는 창에 그물까지 줄 정도였다.
아무리 강해도 창과 그물은 어렵기에.
예측 게임은 19%와 81%.
배당률이 1:5.3까지 치솟았다.
[또, 또다시 5번 승!]
“이쯤 되면 보통 지쳐서 집중력 떨어지지 않나?”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네.”
“아, 역배로 갈 걸 그랬어…….”
‘대현이가 저거 가지고 지칠 리 없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하린의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매일 같이 그와 게임을 했다면 그에게 걸 수밖에 없었으니.
띠리리링.
처음 걸었던 가치의 500배 가까이 되는 코인이 손에 들어왔다.
대륙 공용 코인이니 원화로 환전한다면 약 10억.
한순간에 거금을 만지게 된 이하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규모가 아주 크지 않은 곳도 이 정도면, 거대 투기장은 거래 규모가 엄청나겠네…….’
왜 이렇게 레이나프라에 사람들이 많은지 실감하게 되는 하루였다.
“후후, 오늘은 꽤 벌었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남자도 입을 헤 벌리고 수익을 계산했다.
그도 만만치 않은 수익을 거둔 상태였다.
“이걸 다시 올인하면…….”
다만, 도박 중독인 탓에 다시 올인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 하면 됐지 않나요?”
옆에서 보던 이하린이 말을 걸었다.
오늘은 고대현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거고.
평범한 날이었다면, 저 남자는 다 털렸을 것이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손 씻고 이 판을 떠나는 게 여러모로 좋아 보였다.
“안 됩니다. 다시 그걸 구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거든요.”
“네?”
도대체 뭐길래 부족하다는 걸까.
물론, 가치가 높다 싶은 아이템은 기본 수십억대를 호가하긴 한다만…….
“기존에 구매하던 물건이 있었는데, 거래처랑 신뢰 관계를 잃어서……, 이 정도는 가져와야 물건을 줄 것 같더라고요.”
“음.”
이하린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품 안에서 어머니에게 받았던 정보를 꺼냈다.
‘이런 장소에서 나누는 대화가 주로 거래나 물건에 대한 거, 또 과한 중독자 같은 증세를 보이는 거…….’
다시 보니 의심자에 적합했다.
그에 따라 이하린이 태무진을 주시하기로 마음먹는 한편.
손돌은 관중석의 분위기를 보면서 턱 끝을 만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아.’
아이템 차이 때문에 5번의 전투는 생각보다 길었다.
때문에, 전투 명장면이라고 표현할 만한 장면이 많이 나왔고.
단지 베팅을 떠나서 전투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다.
‘흠, 이참에 일반 관람객을 늘리는 게 좋을지 모르겠군.’
예전에 진철에게 접근했던 것처럼.
손돌은 고대현에게 접근했다.
잘하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기…….”
“응? 왜 그러시죠?”
“혹시 같이 동업할 생각 없으신가요?”
“동업?”
현재 위치는 대기실이었다.
슬슬 나가서 관중석을 살피려던 고대현은 미간을 좁혔다. 물론, 화면 속의 자신은 도도한 표정으로 답하고 있는지라, 손돌은 표정을 읽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협조해주신다면 수익 분배도 좋게 해주고, 경기 조건도 잘 붙여주겠노라고.
손돌은 자신이 제약 필드의 확률을 조작했다는 사실까지 은연중 드러내 버렸다.
당연하게도 고대현의 시선이 좋을 리 없었다.
“싫은데요?”
“그, 그러면 비율을 좀 더…….”
“아뇨. 그냥 싫다니까요.”
고대현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조작뿐만이 아니라. 당장 태무진을 처리해야 했으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보상을 읽기에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띠링─!
[투기장 5연승]
[(상황) 적응형 퀘스트 완료]
[보상이 주어집니다!]
[야간투시력 향상기]
-야간 상황 시 자동으로 야간투시 모드로 돌입됨.
‘어두운 상황에서도 잘 보이게 하는 기능이네.’
밤중에 흑의인들과 싸웠을 때는 의도적으로 화면 밝기를 높인 다음에 싸웠었다.
이 기능이 있으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이 물건을 준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때였다.
포기한 줄 알았던 투기장 주인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면서 다가온 것은.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좋은 물건이지요.”
빨간색 루비와도 같은 물건.
도파민 다운로더가 그의 손에서 반짝인다.
“이게 아주 좋은 물건인데, 그, 일단, 시범을 보이죠. 진철아! 이리 와 보거라!”
다가온 진철은 손돌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반색했다.
“오늘은 그냥 주시는 겁니까?”
“암, 당연하지.”
손돌은 곁눈질로 고대현을 응시했다. 손돌은 상대를 몰래 중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범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중독시키면, 내 편이 될 수밖에 없지.’
그는 예전에 진철에게 했던 것처럼, 일정 파장을 막는 고글을 쓴 뒤 도파민 다운로더를 작동시켰다.
파앗-!
그러자 붉은 행성이 터져나가서 밤하늘을 밝히듯, 특수한 형태의 홀로그램이 나타나서 모빌처럼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까지.”
손돌은 작동을 중지시켰다. 충전된 양을 전부 쓸 수 없으니, 맛보기용으로 보여준 정도였다.
“헤, 흐.”
진철은 이미 해롱해롱한 표정으로 맛이 간 상태였다.
‘이걸 경험하면 협조할 수밖에 없겠지.’
손돌은 고대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 같네.”
그의 고개가 멈춘 곳.
고대현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무 이상이 없다는 듯.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고대현은 PC모드라서 그런지 도파민 다운로더가 통하지 않았다.
‘중간에 매개체를 두고 컨트롤해서 그런 건가?’
애초에 직접적인 신경 지구력 영향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 무슨?!”
하지만, 손돌이 이를 알 리 만무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해롱해롱한 놈 하나, 가지고 있는 놈 하나. 두 명이 세트로 있네?”
고대현이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침 보고 퀘스트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으니.
대현은 아웃라인에 있을 때, 이근희가 혹시라도 관계자들을 찾게 된다면 쓰라던 물건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