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111화
“탈출이요?”
“어.”
야나 이바노프는 현재 레기온 성 지하 감옥에 있다.
한데 그녀를 탈출시킨다는 건, 한국 대륙의 내부에서도 공격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외부를 방어하기에도 바빠. 애초에 외부 방어만 하는 게 주된 일이고.’
그는 하슬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한창 중국의 병력을 막아내고 있는데 후방에서 야나 이바노프가 공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결과는 뻔했다.
“그럼 양동 작전이 목표라는 거네요.”
“거의 확실할 거야. 그렇지 않고서 이런 걸 뿌릴 리 없잖아?”
이근희가 손에 들린 보석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돌이 들어오는 빛을 난반사시켰다.
‘태무진이라는 사람. 각성 상태라고 나타났었지.’
대현은 도파민 다운로더를 썼던 사람의 상태를 떠올렸다.
‘잘하면…… 파동 소멸로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이하린의 상태가 호전됐던 걸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파민 다운로더는 투기장 쪽 사람들을 중독시켜서 자기 세력의 수하처럼 부리기 위함이며, 이근희는 이를 막는 쪽이니까.
‘잘하면 보고 퀘스트랑 연계해서 진행할 수 있겠어.’
고대현이 생각하고 있으니 이근희가 입을 연다.
“너, 레기온 성 소속이라고 그랬지?”
“네.”
“어차피 룰 브레이커로 나오는 건 못 막을 거야. 그러니 네가 상부에 말해서 수호 기사를 그쪽에 배치하라고 해줘.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일순 표정을 굳힌다.
“이제 슬슬 하린이의 상태를 괜찮게 해준 거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겠는데?”
이하린이 쓰는 비술은 이근희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대현을 의심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고대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뭐기에 이런 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를 말이다.
‘원래 세계에도 반정부 세력 같은 게 있었으니까. 유추 가능한 건 레지스탕스고······. 다른 건 생각이 안 나네.’
본래 바체슬라프와 함께 있었다고 하니 의도는 순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저야말로 말하기 전에, 먼저 뭐 하시는 분인지 설명을 들어야겠는데요?”
“흠……, 역시 궁금한 건가?”
팔짱을 끼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이근희.
그녀가 별안간 또 다른 정보를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걸 가져와 주면 해줄게. 일단 오늘은 초면이잖니? 아직 내가 널 완벽하게 신뢰할 만한 깜냥은 없거든.”
고대현의 앞에 나타난 창.
그곳에는 단검 하나가 있었다.
“이건…….”
“바체슬라프의 단검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레기온 성주가 가지고 있을걸?”
대현은 단검을 보자마자 드는 익숙함에 기억을 더듬었다.
‘이거, 레기온 성주가 나한테 들어보라고 했던 단검 아닌가?’
대행증을 받으면서 레기온 성주가 들어보라고 했던 단검이 있었다.
소유자가 따로 있었던 건가? 그때 인물 적응형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띠링─.
[정보 수집이 완료되었습니다.]
[(인물) 적응형 퀘스트]
[바체슬라프의 단검 회수하기.]
바체슬라프의 단검 회수하기 퀘스트였다.
‘퀘스트 부자네. 이렇게 많이 받고.’
대현은 지금까지 받은 퀘스트 목록을 살폈다.
너무 많아서 리스트를 정해서 동선을 짜야 할 판이었다.
‘단검을 성주가 가지고 있으니까. 성주한테 접근하려면…… 정태룡한테 가는 게 좋나?’
지금 한창 바쁠 시기라서 만나기 힘들다는 소리는 얼핏 들었다.
따라서 상부에 보고하기 퀘스트나 단검 회수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와 접촉하는 게 좋아 보였다.
“레기온 성주는 당신을 알고 있나요?”
“나는 아는데 그 사람은 몰라. 그러니까 네가 필요한 거지.”
“그렇군요…….”
이근희는 일정 이상의 정보에 대해 묵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고대현이 현 상황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여기는지라, 대화의 중간이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아마 이하린의 비술을 복사해서 쓴 거 때문이겠지.’
고대현은 마우스를 돌려서 옆에 있는 이하린을 바라봤다.
이하린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이하린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여기서 끝낼까?’
엄마는 불가능하더라도 딸은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일단 야나 이바노프에 대한 건 말해볼게요. 어머님.”
대현은 일전에 ‘당신’이라고 표현한 게 내심 거슬리는 나머지 마지막에 존칭을 덧붙였다. 이근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크흠.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고,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녀가 손을 올리고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기자 풍경이 변한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가 다시 밝아지고.
마침내 서 있는 위치는 일전의 낭떠러지였다.
‘없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이근희는 없고 이하린만 남아 있었다.
‘공간이동도 가능하다는 건가?’
텍스쳐를 만지는 수준에서 보통의 영역이 아닌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자니 이하린이 말한다.
“어땠어?”
“응? 어땠냐니.”
“안 이상했냐고 물어보는 거야. 보고도 아무 느낌 안 들었어?”
한꺼번에 정보가 많이 들어와서 느낌을 정할 새도 없었다.
학급 친구가 비밀 요원이었습니다, 같은 느낌이라서 놀랐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다행이네.”
“다행?”
“난 네가 그런 거 만드는 쪽에 속한 줄 알았는데. 적어도 생산자는 아니라는 거니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도했다, 식으로 말하니.
“으, 응…….”
이하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도파민 다운로더를 회수해야 하는 쪽인지라, 다시 레이나프라로 가겠다고 말을 이었다.
“어디 쪽으로 가는데?”
“보통 투기장에 많아. 그래서 투기장으로 가려고.”
다행히도 목적지는 같았다.
“그럼 나도 투기장으로 가야겠네.”
어차피 투기장에 갈 예정이었으니.
동선으로 봤을 때는 지금 가야 이득이었다.
그는 고민 없이 뒤를 따랐다.
* * *
“잠깐!”
“응?”
“가기 전에 변장 좀 하고.”
이하린이 가는 도중에 멈췄다.
얼굴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하린도 대현과 비슷한 정도로 바뀐 아바타를 하고 있었다.
“변장?”
“회수하려면 이 모습은 좀 그렇잖아? 일종의 위장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가면 형태의 아이템을 착용하는 이하린.
그녀가 빛에 휘감기더니 이내 변형을 완료했다.
나타난 것은 아저씨였다.
“어때? 감쪽같지? 외형만 바뀐 거고 능력치는 그대로야.”
그녀가 가슴을 으쓱 펴면서 말한다. 이전과 다르게 듬직한 모습이었다.
목소리까지 걸걸하게 바뀌었다.
“뭐야, 어떻게 바꿨냐?”
이곳에서 고대현 같은 기사 대행을 제외하면, 외형을 바꾸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머리카락 색을 교체하는 게 전부였다.
“바꾼 게 아니야. 인식 저해를 한 거지.”
“인식 저해? 아, 설마 야나가 수업 때 쓰던 그거 말하는 건가?”
야나 이바노프는 모습을 바꾸는 투구를 쓴 채 수업에 임했었다.
대충 그거랑 비슷한 아이템인 듯했다.
‘어디 보자······.’
디텍트 아이로 살핀 결과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이름 : 이하린]
[빙의체 상태 : 변형]
그저 빙의체 상태에 변형이라고 떴을 뿐.
“너도 해줄까?”
“나도 가능해?”
“자, 받아.”
그녀가 품에서 가면 하나를 더 꺼내서 건넨다.
고대현은 그걸 상호 작용 F로 받아든 뒤 착용했다.
[커스텀 모드 활성화.]
[외부 인식 노출 페이스를 선택해주세요.]
그러자 여러 가지 커스텀 모드가 나타났다.
대현은 오랜만에 커스텀질을 하는 김에 심혈을 기울였다.
‘역시 게임은 커스터마이징이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타난 것은 여자 캐릭터였다.
LOH에서도 사미러나 케이사 같은 여자 챔피언을 많이 해서 그런 걸까.
이하린은 대현의 모습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그런 취향이구나······.’라고 말한 뒤,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다시 이동을 시작하는 도중.
“너, 성에 소속된 건 아니지?”
고대현이 질문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자신처럼 성에 소속되어 있어서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보니 그런 게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응, 무소속이야. 이 계정은.”
이하린이 앞으로 향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우리 집에서 봤잖아. 지하실에 있는 캡슐 2개. 그걸로 접속하면 이걸로 할 수 있거든.”
“아, 그거.”
대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한때 들렀던 이하린의 집.
비술을 설명했던 곳.
그녀의 집 지하실에는 낡은 캡슐 2대가 있었다.
‘꽤 검소하게 살았지.’
그녀의 집은 다른 집과 달리 가사용 로봇이 없었다.
시대에 저항하겠다는 듯. 대부분 옛날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는 의아했지만, 레지스탕스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봤던 사진. 지금 보니까 야나 이바노프였을 지도 모르겠네.’
이근희는 한때 바체슬라프와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를 증명하듯, 이국적인 사진의 안에는 외국인 남자와 동양인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몇 명이 존재했었다.
‘기억상으로는 3명이었나?’
이근희는 바체슬라프의 아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즉, 한 명이 아니라는 건데······.
‘야나 이바노프 같은 사람이 2명 더? 이거 감당이 되나?’
다시 생각해보니 난이도가 높았다.
물론 저번 침략전 때처럼 수호 기사랑 특무대가 합동하면.
잡는 것은 의외로 쉬울 것이다. 하지만 라그나로크의 병력 중 일부가 지하 감옥으로 이동해야 하기에, 외부 방어선에는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름 중요안건 같은데……, 이건 미리 말해줘야겠다.’
대현은 가는 길에 내부 메신져를 켰다.
[야나 이바노프 탈출할 가능성 있음.]
[나중에 병력 일부는 성에 대기시켜 놓아야 할 듯?]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
‘이 정도면 되겠지?’
정태룡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니까.
학교에서 말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문자를 보낸 뒤.
대현은 레이나프라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어디로 갈까?”
이하린이 고대현에게 물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어차피 난 이쪽에 대해서 잘 몰라.”
여기 지역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렇게 낮에는 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대현은 이하린에게 주도권을 일임했다.
“으음, 나는 회수가 목적이니까 음지부터 갈 건데…… 괜찮겠어?”
“음지?”
이미 레이나프라는 음지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더 음지가 있다고?’
한데 여기서 더 음지로 갈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봤자 죽지는 않지.’
어차피 PC모드였으니.
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파민 다운로더 퀘스트를 위해서 ‘샘플’을 한 명 포획할 생각이었다.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대충 해롱해롱한 사람 하나 데려가는 게 싸게 먹히겠지.
“잘 따라와.”
이하린을 따라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도착한 곳은 외진 숲속에 있는 사설 투기장이었다.
스킬이나 무기가 장비된 중급 투기장과는 달리, 사설 투기장은 무기 없이 맨몸으로 하는 결투 방식을 취했다.
‘지하뿐만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하네?’
저번에는 밤이라서 지하 투기장만 열은 듯했다.
오늘은 지상에서도 투기장이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훈련장처럼 산 곳곳에 사설 투기장이라 써놓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대현은 보면서 이동식 서커스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기로 가자.”
그들은 투기장 하나를 고른 뒤 내부로 들어갔다.
큰 장막을 받치는 나무 기둥의 아래로 원형 경기장이 존재했으며, 바닥은 모래로 채워져 있었다.
이하린은 좌석을 둘러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일단 좌석부터 돌자.”
그녀는 관람객인 척하면서 수색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있다가 접근해야지.’
그러나, 다른 한 명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대현······, 응? 어디로 갔지······?”
아까까지 옆에 있었는데 사라졌다.
이에 그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관람인가?”
“아니요. 참가요.”
별안간 참가 수속을 밟고 있는 TS 고대현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