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102화
쾅─!
공기가 진동한다. 쇠끼리 충돌하는 것치곤 소리가 요란하다.
‘이 녀석.’
야나 이바노프는 자신의 대검을 막아낸 상대방을 응시했다.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지만 중심축이 무너지지 않았다.
‘꽤 하네?’
그녀는 손에 전해지는 무게감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실력이 높은 반도 쉽게 격파하고 오는 길인지라,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학생이 나타났다.
물론 고대현보다는 약하지만.
‘조금 놀아줘 볼까?’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서 검의 옆면으로 친다. 밀려나면서 벽에 어깨를 부딪친 임상배는 붕 뜬 몸을 다잡았다. 그는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파바박! 화살이 빈자리를 메꾼다.
서로 살짝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다시 교전이 시작된다.
임상배는 소환사의 계곡에서 도끼를 썼던 경험을 활용했다.
부웅!
힘이 더 들긴 했지만, 기본적인 자세는 좋았다. 무수한 평타 동작으로 숙련된 움직임.
“느려.”
허나, 야나 이바노프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녀는 도끼로 공격한다 가정했을 때 발생하는 빈틈이나 준비 동작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도끼를 무기로 쓴 건 LOH가 전부였기에, 임상배는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성채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아군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버티는 시간이 길수록 점수를 많이 주는 거니까. 난 적당히 버티기만 하면 된다.’
실력은 이미 알고 있으니, 이긴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 사람, 저번에 화살을 맞고도 엄청 빨리 움직였지.’
공격이 성공한다 가정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최대한 방어적인 컨트롤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조금만 과격하게 움직였다간 바로 쓰러질 테니까.
“더 빨리 움직여봐!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될 것 같아!”
그래서인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괜히 짜증이 났다.
‘에라이, 그럼 직접 해보던가! 버티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삼키며 상반신을 숙였다.
카가가각!!
대검이 뒤에 있던 성벽을 긁고 지나간다. 스파크가 튀었다.
‘거리가 가까운 지금이 기회다.’
바닥을 보고 있던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대검은 근거리에서 약하니 지금 붙으면 된다.
‘바로 머리를 공격하면 되겠지.’
임상배의 몸이 재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퍽!
그러나 움직임을 읽은 야나의 발길질이 그의 몸통을 가격했다.
“윽!”
신경 지구력이 한계 도달했다. 임상배는 도끼를 놓치면서 꼬꾸라졌다.
“아쉽게 됐네.”
하늘을 향해 대검을 들어 올리는 야나 이바노프.
티티티팅!
성에서 쏴대는 화살을 검의 옆면으로 막아낸다. 면적이 넓어서 큰 무리 없이 화살을 방어할 수 있었다.
‘닿기만 한다면.’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성채 위의 인원을 탐색했다. 4명이 일렬로 서서 아래를 조준하고 있었다.
‘4명이면 금방이지.’
그 생각과 함께 휘둘렀다. 마지막에 손아귀에서 힘을 빼면서.
부웅.
대검을 던졌다.
서걱!
공기를 가르며 부메랑처럼 날아가던 그것은, 순식간에 4명의 인원을 아웃시켰다. 거의 예초기 앞의 잡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역시 붙으면 너무 약해서 시시하네. 이번 성도 3분 정도에서 마무린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라그나로크가 아니라.
이렇게 대놓고 붙여두는 모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강세인 그녀였다.
‘원딜이 붙으면 약한 게 당연하긴 하다만.’
야나 이바노프는 깃발을 올린 반의 목록을 살폈다. 막 40반의 깃발이 올라오고 1반은 아직 대기 중이었다.
말은 랜덤이지만, 40반과 1반으로 갈 권한 정도는 신영범에게 양도받았으므로.
‘이제 가볼까?’
그녀가 남은 시간을 보면서 40반으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였다.
“하압!”
임상배가 도끼를 휘두른다. 데리우스를 많이 했던 그답게 도끼를 회전시키는 숙련도가 높았다.
신경 지구력이 부족해서 완벽하진 않지만.
파괴력은 있어 보이는, 마지막 힘을 짜낸 기습 일격이었다.
턱.
그래서일까.
어느새 회전축 내부로 들어와 도낏자루를 잡고 공격을 저지한 상대를 보며.
임상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 어떻게?”
“어떻게 하긴, 내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거지.”
도끼를 잡은 상태로 앞차기를 퍽 날리자 힘없이 밀려난다.
야나 이바노프는 자기 손에 들어온 도끼를 응시했다.
도끼는 그녀의 주 무기 중 하나이자, 바체슬라프가 애용하는 무기였다.
‘오랜만에 써볼까.’
적을 가르치는 건 배덕감이 있기에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바로 끝낼까 했던 야나는 임상배에게 도끼를 겨눴다.
“조금은 쓸 줄 아는 것 같은데, 허점이 너무 많아.”
“네?”
“한 수 가르쳐줄게.”
같은 걸 쓰니 가르쳐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야나 이바노프는 허공에 여러 가지 초식을 펼치며 말했다.
부웅부웅-.
닿기만 해도 찌그러질 것 같은.
거대한 물체가 고속으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난다.
‘저런 게 가능하다니.’
임상배는 야나 이바노프의 움직임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도끼는 어쩔 수 없이 빈틈이 발생하기 마련이거늘, 저건 틈이랄 게 없었다.
‘저 보조교사는 뭔데 저런 게 가능한 거지?’
데리우스의 스킬인 피도끼 회전이 대륙으로 가면 여러 형태로 분화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런 형태의 초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행동 보정도 없는 곳인데.’
몸에 익지 않고는 불가능한 행동에 나름의 추측을 하고 있으니.
“자, 여기까지.”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는 듯.
바닥에 도끼를 던진 야나 이바노프.
그녀가 성의 위로 향했다. 임상배는 그걸 막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가 안 될 게 뻔하니까.
별안간 내려온 야나의 손에는 15반의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더 재미있는 걸 보길 원하며.
‘40반으로 가야지.’
이어서 40반으로 향했다.
* * *
‘퀘스트?’
한편, 고대현은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를 살피고 있었다.
야나 이바노프에게 1승 하기.
퀘스트를 보던 대현의 미간이 좁혀진다.
‘이번 수업은 학생 쪽이 이기는 게 상정되어 있지 않은데…….’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나왔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은 퀘스트였다.
애초에 승패가 아니라 수비 시간을 볼 정도니까.
‘그래도 하긴 해야지.’
한숨을 쉬면서 어떻게 상대할지 구상을 시작한다.
적응형 퀘스트는 보상도 유동적이다.
뭘 받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 대상과 관련된 걸 주겠지.
그렇다면, 아주 구린 걸 주진 않을 것이다.
절그럭.
그때였다.
차가운 갑옷의 철판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걸친다.
기다리고 있는 사이 야나 이바노프가 앞에 도착했다.
대현은 각반의 순위표를 열람했다.
[순위]
2반.
15반.
5반.
3반.
20반.
교전 중 표시가 떠 있던 15반이 올라갔다.
막 15반을 격파하고 오는 길인 듯했다.
“다들 준비하자.”
뒤에서 엄호할 준비를 하던 허건섭이 말한다.
“근데 저 교사. 네 말대로 강하긴 강한가 보네. 앞에 반이랑 교전하면서 아무런 타격도 안 입은 것 같아.”
“맞아, 지친 기색도 없는 것 같은데…….”
같은 데가 아니라.
아마 맞을 것이다.
‘저걸 어떻게 이기지?’
머릿속으로는 다짐했지만, 막상 보니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이하린에게 배운 동작을 단축키로 등록해 놓았음에도 쉽게 이기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나마 5대 1이고 옆에 이하린이 있어서 걸어볼 만한 상황이었다.
‘이거, 개인이 아니라 팀이 이긴 것도 1승으로 쳐주려나?’
그때 문득 든 생각.
‘내가 먼저 퇴장해도 팀이 이기면 1승 퀘스트가 클리어될지도 몰라.’
어차피 PC모드라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이하린과 합동 공격을 하기엔 불편한 점이 있으니.
대현은 이하린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상대할 거니까. 넌 중간에 틈을 봐서 습격해.”
“네가 먼저? 뭐하러?”
“힘을 빼놓겠다는 말이야.”
과거 OT 때.
이하린의 순발력은 상당했다. 그 전지수가 당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야나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
탕-!
이하린이 대현에게 뭔가 말하려는 찰나.
디펜스 포탑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슬 성 중앙에 있는 깃발을 가지러 접근하는 모양이었다.
“넌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기둥 사이에 숨어있어.”
“그래, 이왕 시간 끌 거면 1초 컷 당하지 말고 잘해봐.”
이하린은 은폐물에 숨어서 각을 보기로 약속했다.
대현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 크지 않은 성인지라, 금세 적을 만날 수 있었다.
투구를 쓴 야나 이바노프가 차가우면서도 정겹게 말한다.
“혼자 왔니?”
디펜스 포탑은 다 파괴된 상태였다.
저거 다 평가전에서 얻은 코인으로 산 건데 아깝게.
“네.”
대현의 대답에, 야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니, 오히려 잘됐네.”
한 명이면 가르쳐주기도 편하니까.
야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검을 들었다.
고대현도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쿠웅-!
두 개의 대검이 교차하면서 충돌한다.
철 기둥끼리 맞붙는 듯한 굉음이 났다.
야나는 고대현의 딱딱한 검술을 상기하면서 몸의 방향을 틀었다. 경직된 동작의 빈틈을 알려주기 위해, 오늘은 다각도로 압도할 계획이었다.
‘맞으면서 배우는 게 빠르니까.’
카카각-!!
하지만.
딸깍.
옆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했다.
고대현이 방어용으로 등록했던 동작이었다.
‘일반 공격을 쓰는 중간에 단축 버튼을 사용한다.’
키보드를 통한 컨트롤은 진작에 익숙해졌고.
따로 분리된 컨트롤 박스의 단축키를 누르는 것도 슬슬 적응된 참이었다.
대현은 이제 딱딱한 움직임을 탈피해서 좀 더 부드러운 공격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변칙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으, 응?”
외통수를 받아낸 고대현.
그를 본 야나 이바노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와 지금의 시간차는 얼마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발전했다는 건가?
‘아직, 아직이야.’
설마, 그럴 리 없다.
야나 이바노프는 좀 더 변칙적인 연격을 취하기로 했다.
대검의 무게 중심을 이용하면서 빈틈을 없애고, 회전력을 통한 파괴력도 강화시키는 검술.
카가가각-!!
하지만, 그 역시 먹히지 않았다.
대현의 아바타가 검을 휘둘러서 막은 것이었다.
“어, 어떻게?”
야나 이바노프가 놀라는 한편.
‘휴, 위험할 뻔.’
대현은 등록해둔 구르기 단축키를 써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일전에 했던 초식을 상기했다.
‘두 개를 섞은 게 예상보다 쓸모 있었어.’
대현은 일반적으로 마우스를 눌렀을 때 나오는 평타.
그리고 단축키의 기술이 시전될 때의 간극을 통해 일전의 공격을 막아냈다.
‘내 반응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었지.’
딱딱하게 직선으로 움직이는 척하다가.
갑자기 유연하게 틀면서 곡선을 그리고.
반대로 유연하게 가로 베기를 하던 중, 곧장 찌르기를 사용한다.
이는 고대현이 보기에도 변칙적이고 위력적이었으며.
상대하고 있던 야나 이바노프마저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야나는 뒤로 물러나면서 손아귀에 힘을 줬다.
‘역시 재미있어.’
정적인 동작에 맞춰서 대응 기술을 준비했건만.
보란 듯이 파훼해 버리다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푸확!
그 순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하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턱-!
이하린은 재빨리 야나의 목 부분을 잡고 조르기를 통한 제압에 들어갔다.
“지금이야! 빨리 처리해.”
이하린이 발악하듯 외친다.
얼마 버틸 수 없는 모양이다.
‘실수로 동시에 아웃되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대현은 이하린과 야나가 겹쳐져 있는 것을 무시하고.
딸깍-.
그대로 찌르기 동작을 실시했다.
스륵.
그러나, 야나의 발차기가 대검의 옆면을 미묘하게 쳐서 그대로 기둥에 박히게 만들었다.
‘방금 그건…… 패링?’
검술 게임에서 중요하게 쓰이며, 실력의 척도로 나오기도 하는 패링을 발로 쓰다니.
괴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대현이 다시 찌르기를 쓸 찰나였다.
“후읍─.”
갑자기 심호흡을 하면서 집중하는 표정을 짓는 야나 이바노프.
대현은 그 모습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해. 일개 학생도 있는데…….’
이하린에게 비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보인다. 상대가 비술을 쓴다는 것이.
“어……?”
가까이 붙어 있던 이하린도 느꼈다.
꾸드드득.
야나가 입을 연다.
“너…… 뭐냐?”
팔을 억지로 풀어버린 야나가 목을 까딱거리며 뒤를 돌아본다.
‘어쩐지 닮은 것 같기도.’
그녀는 이하린을 본 다음 기억해냈다.
과거, 한국 대륙에서 러시아 대륙으로 침략전을 걸었던 시기를.
자신처럼 러시아 성의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되짚어 보면 그 여자도 잡혀 들어온 주제에 날 가르쳤지.’
야나 이바노프는 이하린을 처음 봤을 시기.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기술이 자꾸 사용됐음을 그제야 깨닫고.
“배신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