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98화
태해란의 합동 레이드를 수락하고.
기숙사의 캡슐방에 가서 접속하기 전.
대현은 경리단과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 40반 애들끼리 왔을 때 유금옥이 했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태해란은 이미 나가고 없기에.
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토끼를 일정 주기로 풀어놓자고?”
“네.”
“흠, 그건 좀 그래.”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경리단.
그녀는 산책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왜요?”
“통제하기가 까다로워.”
하긴, 관리 로봇을 부숴버릴 정도였으니 그녀가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대현은 토끼 우리에 있는 대장 토끼를 보았다.
대화의 주인공인 녀석답게 덩치가 크고 튼실하다.
흔히 외국에 있는 토끼라 그런지 올라오는 몸집이 큰 품종이었다.
“목줄을 채워서 나가기도 애매해. 중간에 갉아먹고 탈출하면 어떡해.”
“흠.”
토끼가 전선 따위의 줄을 끊어먹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로봇을 부순 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대현의 귓전에, 그때 이후로 한대를 더 부쉈다는 설명이 들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확인해보니 진짜로 부서진 파편이 있었다.
‘예상보다 강하구나.’
솔직히 저 정도면 방생하는 게 답이지 않을까.
사냥당하진 않을 것 같고.
분명 최상위 포식자 라인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대현은 위의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방생할 생각이 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테니까.
선배가 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게 사심이든 뭐든 간에······.
토끼를 지그시 응시하던 대현은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원래 폭력성이 강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정갈하게 부숴놨다. 거기에 더해서, 대장 토끼는 옆에 있는 다른 동물들과 꽤 원만하게 지내는 듯했다.
고대현은 녀석이 관리 로봇한테만 폭력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저 애, 저도 한번 만져봐도 돼요?”
“응?”
의외의 말이었을까.
그녀가 한차례 눈을 깜빡이기를 잠시.
“뭐, 안되는 건 아닌데······ 조심해. 물릴 수도 있으니까.”
결국 머뭇거리면서 허락한다.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대현은 조심스레 녀석에게 가까이 갔다.
코를 킁킁거리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근육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공격할 것 같지는 않네.’
대현은 자신이 공격당하지 않을 거라 믿었고.
삐익? 킁킁.
이는 적중했다.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코를 들이밀다가 이내 얌전하게 쓰다듬을 받는다.
“너, 생각보다 친화력이 좋구나······.”
그녀가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말을 잇는다.
“해란이가 너 이런 쪽에 소질 있다고 말하더니 진짜였네.”
“그러게요······.”
이렇게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기에.
고대현도 살짝 당황했다.
‘와이번, 그거 사실 내 능력이 그 정도라서 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각사각.
사료용 건초를 주자 우물우물 받아먹는다.
그때, 대장 토끼의 모습을 보던 경리단이 대뜸 입을 열었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여기 관리부원 할 생각 없어?”
“네? 테라피룸 관리요?”
“응, 아무래도 사람 한 명은 필요한 곳이거든.”
부원 권유 같은 건가.
고대현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질문했다.
“관리하는 시간이 어떻게 되는데요?”
“아침에 간단하게 몇 가지 체크하고. 나머지는 자유야. 나는 심심해서 자주 오는 거고.”
솔직히 말해서.
고대현은 할 생각이 없었다.
다양한 학교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생각보다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가 살짝 고민하는 척하면서 안 된다고 말할 찰나였다.
‘응? 그러고 보니 아침에는 운동 커리큘럼이 있는데······.’
매일 있는 아침 일정이 떠올랐다.
매일 일어나서 귀찮게 운동장을 돌고 운동하는 거 말이다.
“아침에 관리하는 거면, 운동하고 나서 시간이 없지 않나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거 하면 자동으로 열외야.”
“아하.”
“나도 이거 때문에 열외거든.”
여기 오는 대신 아침 운동 열외라······.
그렇다면 결정이다.
“저, 할게요.”
“진짜?”
“네, 당장 내일부터 나오면 되는 거죠?”
“어? 어, 어······.”
말을 더듬는 경리단.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곧장 수락한 것이 의외인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뭐어, 등록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럼 내일부터 와.
라고 덧붙인 그녀는, 고대현에게 인증 암호키를 주었다.
띠링.
서로의 손목을 스캔하자, 스마트 워치에 보안키가 도착했다고 알림이 온다.
‘본격적으로 학교생활 시작이라는 느낌이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여기고 있자니, 경리단이 말한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현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답했다.
뭐랄까.
수락하는 게 많은 듯한 하루였다.
* * *
저녁 식사 후.
[접속하셨습니다.]
고대현이 접속한 곳은 레기온 성의 테라스였다.
게임 내부는 밤이었는데, 성 외벽의 조명이 밝게 빛나서 경치가 좋았다.
‘그때 이후로 처음이네.’
대현은 마우스를 돌리면서 경치를 구경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나마 달라진 꼽자면, 처음 보는 얼굴이 많다는 거 정도일까.
“저 사람들은 누구?”
고대현은 비교적 친한 태해란에게 질문했다.
“이번에 정태룡 레이드 간다고 보조해주는 사람들.”
“보조?”
“성주 아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잘 보이고 싶나 봐.”
퉁명스레 답하는 태해란.
다른 사람까지 대동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고대현은 앞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인원은 5명 정도에, 고급스러운 복장보단 수수한 차림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척 봐도 수호 기사보다는 낮은 등급으로 보였다.
그렇게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정태룡과 이야기를 마친 사람 중 한 명이 이쪽으로 왔다.
이제 곧 사냥을 나갈 건데 몰이꾼으로 참석한다는 남자의 말에서.
‘응?’
대현은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네가 그때 걔구나? 싸우는 거 잘 봤다.”
그들의 정체는 스턴 특무대였다.
야나를 상대하는 걸 살아남은 몇 명이 바로 옆에서 직관한 듯했다.
“네 덕분에 살았다. 만약 접경지까지 뚫렸으면 우리들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거야.”
스턴 특무대는 고위급 적의 무력화를 위해 편성된 부대다.
그런데 무력화에 실패하고, 그걸 기사 대행이 대신한 격이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단신으로 임무를 해낸 고대현이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화는 사냥터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계속되었다.
“발광탄을 골랐다고? 그럼 나중에 스턴 특무대에 들어와도 되겠네.”
“어허, 이런 할 일 없는 부대에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를 넣으면 쓰나?”
“뭐? 스턴 특무대가 뭐 어때서?”
특무대 사람들이 농담을 하면서 떠들고.
대현과 1반 아이들은 그 뒤를 따르는 구조가 되었다.
“다들 네 이야기만 하네. 도대체 그때 뭘 했는데 다들 저러는 거냐.”
계속 말이 나오니 궁금해진 걸까.
범단월이 질문한다.
‘꽤나 기대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2번 정도 막고 죽은 게 전부였기에.
고대현의 대답은 상당히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음, 적당히 공격 막고······, 그러다가 죽었지.”
“적당히 막아서 저런 이야기가 나오겠냐? 야, 정태룡. 이제 슬슬 정보 공개할 때 안됐냐?”
정태룡에게 슬슬 정보를 풀라고 말하는 범단월.
영상 기록의 열람은 레기온 성에서 의도적으로 막고 있는지라, 자세한 내용을 아는 건 당시 참석자들뿐이었다.
“엄마가 안 된대. 잘못하면 적한테 기밀 유출된다고.”
“기밀? 기밀까지 가는 레벨이야?”
“곧 라그나로크 시기라서 어쩔 수 없나 봐. 이미 엄마는 쟤를 예비 특무대로 생각하고 있거든.”
다크 테이머를 대비해서.
특무대와 관련한 정보가 있는 건 공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스턴 특무대까지는 아니지만, 이미 성 내부에서는 고대현을 특무대 위치까지 인정하는 중이었으니까.
“어쩐지…… 특무대 아저씨들이 살갑게 대하더니. 후임 들어온다고 좋아하는 거였네.”
‘후임? 그게 그렇게 되나? 나 아직 정한 것도 없는데.’
옆에 듣고 있던 고대현이 입을 열었다.
“이번 라그나로크에서 특무대는 무슨 일 하는데?”
“특무대가 하는 일? 음, 일단 초반에는 거의 없고. 나중에 상대 대륙 고위급들이 근접하면 그때 나서는 부대야.”
아무리 철통같아도 뚫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특무대는 이때 적의 고위급 유저를 무력화시키는 부대였다.
“뭔가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상황이 안 터지면 할 게 없을 것 같네.”
“응, 네 말대로 특무대가 움직였던 적은 거의 없어.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정태룡의 말이 맞다면 특무대로 큰 재미를 보긴 어려울 것이다.
대현은 다른 부대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 이왕이면 굴절활 비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가 정태룡에게 말했다.
“너는 어디 부대 소속이야?”
“나? 나는 중앙 기사단 저격 1부대인데······ 그건 왜?”
“아, 그럼 나도 그쪽으로 가야겠네.”
난데없는 선포에 태해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는 나랑 공중부대 들어가야지!”
“거기는 주로 하는 임무가 뭔데?”
저번에 듣긴 했지만, 라그나로크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몰랐다.
“음, 그러니까······.”
태연한 질문에 순간 언성을 높이고 주변의 시선이 쏠렸음을 확인한 태해란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공중부대의 장점과 들어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러쿵저러쿵.
“─해서, 넌 나랑 같이 가야 한다는 거지.”
“흐음.”
공중의 틈으로 들어오는 적을 처리 한다라······.
설명만 들으면 나쁘지 않고 재미있을 것 같기에, 대현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넌 이미 이번 라그나로크 때 할 게 어느 정도 정해졌어. 그러니까 너무 다른 곳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쿡쿡 웃으면서 이미 편제는 다 짜였다고 말하는 정태룡.
“다 짜였다고?”
“어, 올해는 북부 탈환전으로 가게 될 거야. 간단하게 백업하는 식이지만, 범단월도 그쪽으로 넣을 거고.”
마치 장기 말을 옮기듯 말한다.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그가 성의 고위급 인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고대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때였다.
사냥터에 도착했으니 몰이를 시작하겠다는 특무대원들.
‘사람들이 다 보조해주고······ 사냥을 되게 편하게 하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범단월이 다가온다. 뭐지? 왜 결심한 표정인 건데? 그가 허리춤에 있는 검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 스킬은 다 검사 쪽으로 골랐으면서 저격부대는 왜 간다고 한 거야?”
본심을 말할 수는 없으니, 대현은 적당하게 답하기로 했다.
“검은 어느 정도 마스터했어. 그래서 다른 거 해보려고 한 거지.”
“뭘 마스터했다고······?”
“검.”
범단월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스킬을 정했으니, 업적 등급을 올리기 전까지는 슬롯이 늘어나지 않는다.
이미 이번 라그나로크에는 현재 가진 스킬로만 참여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연습할 거면 검을 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냥 아무거나 찔러보고 있네······.’
당장 마지막 전사 퀘스트를 하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빠가 있으니까. 아빠는 검에 대해서는 엄청 깐깐하다고.’
일명 산신이라 불리는 범단월의 아버지.
그는 수질을 관리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준에 미달하는 스킬 선택자들을 패배시키고 돌려보내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시간 낭비를 안 하려면 내 도움을 받아야 하지.’
홍영의 부탁을 떠올리며.
다시금 2% 아까운 고대현의 검 놀림을 상기한 범단월이 입을 열었다.
“넌 당분간 나랑 수련하자. 내가 봐줄게.”
“네가?”
네가, 라는 말이 심기에 거슬리지만.
범단월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가 속성으로 가르쳐 줄게. 핸드 무비의 켄지 정도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켄G 무비랑 근접하게 만들 수는 있을 거야.”
한편.
고대현은 범단월에게서 익숙한 훈수충의 향기를 느꼈으나.
‘뭔, 무비?’
중간에 섞여 있는 익숙한 채널명에 신경을 빼앗겼다.
그가 잠시 가만히 있으니, 별안간 범단월이 가까이 다가와서 창을 띄웠다. 자주 본 것인지 관련 영상이 다 그런 것들이었다.
“이걸 베이스로 연습하면 될 거야.”
“자, 잠깐.”
동작에 대한 이해가 빠른 범단월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고대현은 범단월과 언더 워치에서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행베기는 검날 흘려내기랑 다르게 공격용이니까. 알만한 단서가 거의 없었겠네······.’
그때였다.
“오, 마침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네.”
새 영상이 올라왔다면서 썸네일을 보여주는 범단월.
‘새로운 영상?’
새롭게 올라올 만한 것은 얼마 전에 유금옥과 촬영한 게 전부였다. 그사이에 편집을 끝냈다는 건가? 사실상 유금옥이 핸드무비와 계약하고 낸 첫 영상이기에.
드르륵.
대현은 관심을 가지며 화면을 확대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이 멈춘 곳.
[한국의 떠오르는 신예의 모습에, 검사 강국 일본이 발칵 뒤집힌 이유? “이제 우리가 1등인 분야는 없다.” 일본 네티즌들曰 “한국이 가진 비밀 무기. 공개하라.”]
어그로력이 매우 높은 썸네일 하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