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89화
펄럭.
공중에서 거대한 날개가 펄럭인다. 화이트 드래곤, 온페리스였다.
‘남은 건 나뿐인가.’
레기온 성주는 온페리스의 목 부근에 있는 고삐를 잡으면서 아래를 응시했다.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대규모 토벌전.
그 레이드에서 살아남은 이는 자신뿐이었다.
‘크다.’
쿠드드드.
흙먼지가 걷히며 거대한 외피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색 껍데기가 흑요석처럼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심연의 에인션트 바위게가 꿈틀거린다. 너무 거대한 나머지 땅에 떨어진 운석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끼리릭! 끼릭!
틱틱거리는 기묘한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다. 땅을 빠르게 찍어내던 집게 팔들이 움직인다. 그것들이 다시 외피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간 기록된 패턴보다 복잡하네…….’
간단해 보이지만, 저 공격에 토벌대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보스몹의 특성에 대해 생각했다.
‘인과를 비트는 무빙.’
대륙의 보스몹에는 각각의 고유 능력이 있다.
눈앞에 있는 에인션트 바위게의 능력은 공간 왜곡…….
저 녀석은 일반적인 이동을 하지 않는다.
이동한다는 ‘결과’를 먼저 이루고, 이에 맞춰서 월드맵을 강제로 편집시킨다.
몸을 먼저 이동시키고 땅을 접어 버린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억지로 지형을 구기면서 이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기온 성주는 바체슬라프의 일격을 떠올렸다.
그 한 번의 도끼질로, 그는 거대한 썩은 아귀 대공을 죽이고 변성 고중력을 얻었다.
엄청난 파괴력의 일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아직 약해.’
그녀는 온페리스의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의 둥지로 되돌아가는 바위게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걸 원콤으로 죽이는 게 가능할까.’
심연의 에인션트 바위게의 난이도는, 체감상 변성 고중력이 나온 썩은 아귀 대공보다도 높았다.
분명 개체에서 드랍되는 스킬은 매우 파괴적일 것이다.
물론 원콤이 불가능해서 아직 못 얻고 있지만.
‘더 높은 화력이 필요해…….’
오늘을 위해 여러 가지 화력식을 구상했건만, 원콤은커녕 단순한 클리어조차도 버거웠다. 그녀는 아쉬움을 달래며 성으로 복귀했다. 수백 명이었던 정예 토벌대가 전부 로그아웃된 덕분에 착륙장은 한산했다.
라그나로크를 대비한 편제와 아이템, 무기, 작전을 정비하는 게 주요 업무였기에.
성주는 빈 하늘을 잠깐 응시하다가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집무실에는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은 ‘원로원’ 구성원들이 앉아 있었다. 나이가 200살에 육박한지라, 연륜만 있고 컨트롤은 떨어지는, 흔히 말하는 에이징 커브가 온 사람들이었다.
원콤 토벌 작전에 실패했다는 연락은 이미 들었기에 그들 중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역시, 아직 화력이 좀 부족하더군요.”
수염이 무성한 남자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단일 공격으로 대륙급 보스몹을 잡는 건 무리가 아닌지…….”
“확실히, 아직 무리긴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수백 명이 일제히 공격했다면 클리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원콤을 위해서 시간을 끌다가 에인션트 바위게가 ‘2페이즈’에 들어가게 했다.
“200만 HP를 한 번에 까는 방법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단신으로 200만 HP라…….”
합동 공격으로 200만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걸 1명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륙 보스몹은 리젠 기간이 6개월에서 길면 1년인지라 함부로 잡기도 쉽지 않았다.
얻고자 하는 건 원콤으로 떨어지는 특별 보상이니까.
“이 부분은 나중에 연구해서 더 살펴보도록 하죠.”
……회의 주제는 어느덧 토벌전에서 라그나로크로 넘어갔다.
올해의 1차 라그나로크가 3개월 앞으로 다가왔으니, 슬슬 준비해야 했다.
“이번 북부 탈환전도 신영범에게 맡기실 겁니까?”
“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해야죠.”
점령은 결국 요새에 접근해야 한다. 근접이 필수라는 소리다. 그저 포격만 하면 되는 다른 접경지와는 전투 양상이 달랐다.
“야나 이바노프가 없으니 바체슬라프만 나오겠군요. 이번에는 좀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바체슬라프는 신영범 선에서 저지할 수 있다. 저번 전투에서는 야나의 존재가 변수였을 뿐. 이번에는 그녀가 없으니 큰 어려움 없이 북부 요새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저번 구성에서 몇 명 정도 더 추가하도록 하죠. 이번에는 검사 비중을 더 높이는 게 좋을 겁니다.”
“하긴, 당장 투기장에서 죽치고 있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다행히도 인력은 넘쳐난다. 원로원은 투기장의 네임드를 추가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세웠다. 성주도 그에 대해서는 큰 반발이 없었다.
“다크 테이머 성향인 사람만 잘 거르면 큰 문제는 없겠네요.”
다만, 투기장 사람이 다크 테이머일 확률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다크 테이머는 적을 키우는 존재······.’
가끔 일부러 적팀을 키워줘서 아군 팀에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게 더 재미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세간에서는 이런 유저를 다크 테이머라고 칭한다.
펫이 아니라 적을 키워서 다크 테이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적 행위를 하는 유저에게 중요 임무를 일임할 수는 없다.’
최근 있었던 다크 테이머의 사례로는 바이올렛이 있다.
그녀는 한때 전도유망한 누커였으나, 라그나로크에서 의도적으로 진입 활로를 열어주는 게 적발되었다.
‘지금은 사설 투기장이나 도는 낭인으로 살면서 발광탄 재료를 가로채는 중이지…….’
성주는 다크 테이머의 존재를 경계했다. 요즘처럼 정체기에 들어선 한국 대륙에겐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한 성향의 사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선별된 유저를 물색하고 있으니…….”
“뭐, 그 부분은 됐고. 이제 접경지 수비 방안이나 보죠.”
원로원은 위로 올라온 안건 중 추천이 제일 높은 글부터 살폈다.
대부분 전열에 어떤 조합을 두느냐에 대한 내용이지만, 저번과 비교했을 때 서포터를 추가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 이외의 다른 점은 크게 없었다. 수비가 제일 큰 부분이기에, 문제점 대부분은 포킹과 화력 향상으로 해결되었다.
그렇게 글 수십 개를 넘기며 방안을 처리를 거의 막바지까지 했을 때였다.
[라그나로크의 접경지 변화에 따른 대비.]
‘접경지 변화?’
성주의 눈에 글 하나가 들어왔다. 추천 수가 제일 낮으며, 텍스트보단 이미지가 많은 글이었다.
“아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라그나로크는 무기랑 아이템 부분만 증강하면 되겠군요.”
원로원들이 몸을 푼다. 회의는 슬슬 종료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글로 회의를 더 끌기는 애매하겠네.’
레기온 성주는 회의를 종료하기로 했다. 그녀는 원로원들이 집무실을 나가고 난 다음 다시 그 글을 펼쳤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아 보이니 혼자서 볼 생각이었다.
[일본과 중국 대륙은 최근 의도적으로 접경지 수비를 헐겁게 해왔다.]
접경지는 라그나로크때 각 대륙이 제일 먼저 맞닿는 곳이며, 제일 먼저 폭격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접경지는 대륙 땅이 합쳐지면서 어그러지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내준다니 그게 무슨······.’
글의 내용을 살피던 성주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각 대륙이 합쳐지는 경계선을 살폈다.
뭔가 어색함이 느껴진다.
한국의 최다 접촉 대륙인 중국과 일본이······.
뭐랄까 중간중간 쥐 파먹은 듯이 안으로 움푹 들어간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정말로 뭔가 의도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걸까.
‘어차피 광범위 포킹을 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끼익─.
“성주님, 보고 할 게 있습니다.”
“응? 뭔데 그래?”
그때였다.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문을 열고 조용히 다가온 홍영이 대뜸 부서진 파편을 내밀었다. 파편의 겉면엔 복잡한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뭔가 익숙한데.’
자세히 보니까 총이었다. 그것도 꽤 고위급인.
“아니, 이걸 어쩌다가…….”
성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총은 상위급 무기 중에선 낮은 단계에 속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잘 부서지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고대현 학생의 훈련을 봐주다가 그만…… 제 불찰입니다.”
홍영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덧붙인다.
‘훈련을 봐주다가?’
삑.
눈을 동그랗게 뜬 성주의 앞에 홀로그램 창 하나가 떠오른다. 내부 훈련장에서의 기록 영상이 재생되었다.
영상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제 막 튜토리얼 단계에서 얻은 스킬을 실험할 뿐인데.
팅-!
쏘아져 나간 총알이 되돌아온다. 짧은 빛이 점멸하더니 총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레기온 성주는 미간을 좁히며 상반신을 굽혔다. 그리고 영상을 자세히 살피면서 일정 장면을 확대했다.
‘우연인가?’
확대해보니 총알이 정확하게 총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부서질 법도 하다.
“정확도가 대단하네…… 이제 겨우 1레벨 아닌가?”
“1레벨 맞습니다.”
“오호, 나중에 쓸만하겠어.”
그렇게 말한 성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전투력의 부족과 불신을 느끼던 차에, 희소식이었다.
어차피 100억짜리 무기 정도는 금방 보충 가능하니까. 좋은 인재를 발견한 셈 치면 된다.
‘보유 스킬은 거의 근접이네. 일단 대행 기간에는 검사로 갈 모양인가 보구나.’
신영범이 눈독을 들이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레기온 성주는 홀로그램 창을 옆으로 치워둔 뒤.
“할 이야기는 이걸로 끝?”
“네, 일단은요…….”
본격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녀는 손짓으로 홍영을 돌려보냈다.
일전의 토벌 때문에 슬슬 신경 피로가 거세지는 중이었으므로…….
‘피곤한데 좀 쉴까?’
과한 걱정은 금물이다.
레기온 성주는 일단 지도를 덮어두기로 했다.
그녀는 별안간 수면을 위해 접속을 종료했다.
* * *
한적한 일요일.
저벅저벅.
고대현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가 막 풀리기 시작한 시기다.
그 덕분에 땡볕에서 계단을 오를 일은 없었지만.
“휴우.”
중간까지 올라온 대현은 허리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다. 산 중턱에 있는 일본 신사를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몇 발자국을 더 올라가다가 무릎을 손으로 짚고 숨을 내쉬었다.
‘팔자에도 없는 등산을 하네…….’
고대현이 싫어하는 것 중 하나엔 등산이 있다. 큰 이유는 없다. 힘들기 때문이다. 쾌적한 환경에서 운동해도 모자랄 판에 산 벌레와 조우하면서 땀을 흘려야 한다니…….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고대현이 어느덧 계단의 마지막 구간까지 올라왔을 즈음이었다.
“오늘 날씨가 좋지?”
이하린의 목소리가 귓전에 매달린다.
고개를 드니 역광이 심해서 검은색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손등으로 햇빛을 가리고 나서야 사복 차림의 이하린이 눈에 들어왔다.
‘도복?’
사복이 아니었다.
그녀가 흰색 도복을 입은 채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이자 허리를 감싸고 있는 띠가 좌우로 흔들린다. 대현은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뭔가 본격적이네?”
“집에서는 맨날 이 옷인데?”
이하린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를 잡아끌었다.
대현은 이끌리는 힘에 몸을 맡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옛 기운이 흘러나오는 목조 건물이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건가? 피톤치드 흘러나올 것 같은 곳이네.’
대현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하린의 집 내부로 들어갔다.
드르륵.
안은 조용했다. 옆으로 밀리는 문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다.
“안녕하세요…….”
“아무도 없으니까 인사하지 마.”
“부모님은?”
“안 계셔.”
‘그럼 사양하지 않고…….’
끼익.
나무 바닥에 발끝을 대자 낡은 소리가 난다.
아까 전의 문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올드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특이점을 돌파한 오버 테크놀로지 시대에 이런 곳이 있다니. 대현은 다른 의미로 감탄하면서 이하린의 뒤를 따랐다.
“너 방금 실례되는 생각 했지?”
“아, 아니?”
의외로 감이 좋다.
“됐고. 이걸로 갈아입고 와.”
“아, 응…….”
고대현은 얼떨결에 그녀가 건네준 도복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옷의 무게를 느끼면서 앞을 보자 꽤 넓어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이런 걸 어디서 봤나…… 생각해보니, 언젠가 봤던 도장과 흡사한 형태였다.
‘오늘은 동작을 배우러 왔었지.’
실력 향상을 위해 친구에게 배움을 구하러 왔다.
예의 목적을 상기한 대현은 이하린이 가리킨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탈의실이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며 집안 내부를 이리저리 훑었다.
훈련 장소로 자신의 집을 불러주더니.
이 정도면 집에서 할 만했다.
‘저건?’
그때였다.
이리저리 굴러가던 대현의 눈알이 벽에 걸린 사진 하나에서 멈춘다.
‘가족사진?’
작은 액자의 사진 속에는 아이들과 성인 여성 한 명이 있었다.
풍경은 뭐랄까. 좀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가족 사정은 여기까지 보는 거로 할까.
스윽─ 탁─.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도복의 두꺼운 천이 움직일 때마다 살갗에 닿았다.
이하린은 미리 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부가 참 넓다. 천장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부터 가르쳐줄까?”
“음, 그냥 기초적인 것부터?”
“어차피 그라운드 제로 말고는 효력이 약하니까. 내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주로 쓰는 것부터 알려줄게.”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하나의 동작을 목표로 수련하기로 했다.
“너무 어렵지 않은 거로 부탁해.”
“안 어려워. 아마 오늘 중으로 마스터할걸?”
“오늘?”
오늘 중에 마스터 한다는 말이 왜인지 모르게 무섭게 들린다.
대현은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며, 수련 제1단계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