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85화
파스스.
[초급 사냥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대현이 도착한 장소는 사림 성과 레기온 성의 중앙에 위치한 초급 사냥터였다.
현실 날씨와 연동되는 걸까. 양옆을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는 이제야 연두색 빛을 두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초보 몬스터가 어디 있을까.’
주말부터 초보 몹이 있는 곳을 쏘다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고대현은 팻말이 적힌 부분을 따라서 이동하다가 슬라임 무리를 발견했다. 일단 저 슬라임을 잡으면서 숙련도 레벨을 올리고 돈도 벌 생각이었다.
초보 사냥터답게 슬라임이 난폭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크게 공격하지 않는다.
대현은 슬라임들을 향해서 감마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그러자 여러 마리의 슬라임에 대미지가 가해진다.
다만 대미지 자체는 낮아서 그런지 슬라임이 한 번에 죽는 일은 없었다.
‘아직 숙련도가 낮고, 무기가 구려서 그런가……? 손맛이 없네.’
접근해서 평타를 때린다. HP는 줄어드는데 예상보다 딜이 약하다. 평타를 때릴 때마다 감마 스트라이크의 쿨 타임이 줄어드는 것이 그나마 있는 위안거리였다.
스걱-!
[(감마 스트라이크)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2LV
1레벨이던 스킬이 2레벨로 올라간다. 초반답게 레벨업 속도가 빠르다. 가만히 슬라임을 치고 있는 고대현은 레벨 계산에 들어갔다.
‘레벨의 상한선은 없다.’
LOH에서는 스킬 레벨의 상한선이 정해있지만 여긴 아니었다. 종합 레벨을 올리기보단 스킬 레벨을 극한까지 올리는 방식에 가깝다. 한 분야의 장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당분간은 여기서 감마 스트라이크 레벨을 올려야겠다. 다른 스킬은 다른 곳에 가서 하고.’
발광탄은 발광소자가 없어서 못 쓰고, 검날 흘려내기도 상대 공격을 반사 시키는 것인지라 여기에선 별로였다.
고대현은 쿨타임이 지날 때마다 감마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딜은 약하지만 동작이 좋아서 재빠르게 움직인다.
스킬 숙련도 레벨을 6까지 쉬지 않고 올렸다.
‘잠시 쉴까.’
사냥을 멈추고 쉰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자니 문득 자동 사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솔직히 자동 사냥 나올 법하지 않나? 고대현은 UI 시스템 업그레이드 내역을 살폈다.
‘저번에는 시설 테크를 올렸으니, 이번에는 UI 테크를 올리자.’
뭐가 나올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직감이 들었다.
이거 계속 업그레이드 하다 보면 소재가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자동사냥이 나온다는 직감이…….
“솔직히 나올 게 거기서 거기란 말이지.”
스걱!
쉬다가 다시 움직인다. 목표가 정해졌다.
이번 목표는 자동 사냥이 나올 때까지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 이런 반복 사냥에서 벗어나려면 자동 사냥이 필수였다.
띠링.
[(감마 스트라이크)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10LV
어느덧 레벨이 10에 도달했다. 처음보다 대미지가 강해진 게 티가 난다. 슬라임을 처치하고 얻은 마석이 인벤토리에 쌓였다.
‘이걸 팔아서 검이나 사야겠다.’
스킬은 그렇다 치고 평타는 100% 검으로 수행한다. 보유 스킬 상 결국 평타로 주딜을 넣어야 하기에. 좋은 검과 아이템은 필수였다.
‘지리도 익힐 겸 지금 매도하러 가야지.’
고대현은 다시 워프 게이트를 타고 레기온 성 영지로 돌아왔다. 이런 걸 파는 상점의 위치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간의 게임 경험을 살려서 발걸음을 옮기자, 별안간 상점이 눈에 잡힌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정상적으로 생겼네.’
상점을 본 첫 감상이었다. 허름한 내부를 상상했는데 예상보다 현대식이었다. 진열대에 장비가 쭉 놓여있고, 가운데에 계산대가 있다. 마트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대현은 [매입]이라고 적힌 곳 앞으로 갔다.
“판매하시게요?”
“네.”
슬라임을 죽여서 파밍한 마석을 꺼낸다. 슬라임 100마리 분량이었다.
점원은 마석을 받고 익숙하다는 듯이 판매금을 건넸다.
슬라임 100마리분량의 마석 가치는…… 1실버였다.
‘아니, 1실버는 좀 짠데.’
매대로 오면서 진열된 장비들의 가격을 살핀 결과, 쓸만해 보이는 수준의 무기는 대부분 100골드 단위였다. 아마 사려면 하루 종일 사냥만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퀘스트라도 받든가.
“어디 퀘스트 주는 곳 없나?”
상점을 나온 고대현은 영지 내부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딱 봐도 모험가 길드처럼 생긴 곳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니 구인 공고판 같은 것이 있다.
[던전 클리어 경력자 우대]
[마법 경력자 우대]
[원거리 스킬 보유자 우대]
[최소 스킬 레벨 50]
‘아니, 전부 경력자만 뽑으면 나 같은 사람은 어디 가서 경력 쌓으라는 거지?’
퀘스트를 받는 최소 기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이거 일정 기간은 그냥 닥치고 사냥터에서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고대현은 접속 시간 창에 눈길을 돌렸다.
‘아직 3시간밖에 안 지났다. 그냥 저녁까지 사냥 노가다나 할까?’
소모되는 힘은 없으니 사실상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이런 건 원래 세상에서도 잘 안 하던 건데…….
고대현이 다시금 워프 게이트로 향할 때였다.
펄럭.
바닥에 있는 종이가 발에 차인다. 평범한 전단지였다. 하지만 내용이 이목을 잡아끈다.
‘콜로세움? 투기장?’
투기장 홍보 전단지가 있었다.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서 바닥에 있는 걸 집어보려고 하는데……. 상호작용이 없었다.
아, 이거 어떻게 줍지. 고민하던 대현의 손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저번에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얻은 조이 스틱이 있었다.
‘모션 캡처를 해서 쓰면 되려나.’
이걸로 행동을 등록해서 쓸 수 있다. 푸른색 원 위에 선 대현은 바닥에 있는 걸 줍는 동작을 취했다.
[모션 캡처 완료]
[버튼 2에 등록하시겠습니까?]
‘수락.’
버튼에 동작을 등록했다. 고대현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잠시 조이스틱 박스를 조종했다.
딸깍.
전단지의 앞에서 허리를 굽힌다.
손으로 잡는 동작까지 등록했는데,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서 그런지 자꾸만 손끝이 빗나간다.
대현은 옆으로 이동한 다음 다시금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빗나갔다.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건설 현장에서 각도 맞추는 것도 아니고, 발 위치랑 허리를 굽히는 위치, 손이 닿는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
‘슬슬 짜증 나려고 그러네…….’
그냥 1인칭 모드로 바꾸고, 허리를 굽혀서 보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짧은 흥미가 식었다. 솔직히 초반부터 투기장 같은 곳에 가봤자 큰 소득은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강한 게 중요하지.’
이에 고대현이 투기장 따위는 무시하고, 다시 초보 사냥터로 떠나려 할 때였다.
스륵.
옆에 있던 사람이 전단지를 잡아서 건넨다.
키는 160정도에 단발. 가죽 부츠에 흰 셔츠, 손에는 듣도 보도 못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얼굴은…….
당연하게도 모르는 사람이다. 불쌍해서 도와준 건가? 고대현이 화면에 나타난 상호작용을 보면서 멈칫거리자 상대방이 입을 연다.
“고대현?”
“──!?”
머리 위에 레벨과 이름 정보가 나타나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 그런데 이름을 알고 있다. 그것도 외형을 바꾼 모습을 말이다.
‘성 내부 사람인가?’
화면을 1인칭으로 바꾼 그는,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응시했다.
응시하고.
별안간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누군지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었다.
“어, 음, 누구세요?”
“아, 이 모습이라서 못 알아보나?”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행히도 아는 사람이다.
‘쟤도 외부 노출 상태인가?’
고대현은 입가를 달싹이다가 말했다.
“재림 너달리?”
“……재림이 아니라 강림이야.”
태해란은 큼큼,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본인 스스로 강림이라고 하니 뒤늦게 부끄러움 비슷한 게 다가온다. 그녀는 손에 잡힌 투기장 홍보 전단지를 보면서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투기장? 콜로세움? 너 처음부터 이런 곳에 가려고?”
“왜? 가면 안 돼?”
“몰라서 물어?”
“응.”
고대현은 순수한 의문을 가진 채 질문했다.
딱히 큰 의미는 없는.
내용을 몰라서 대신 알려달라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고대현의 차갑고도 무감정한 표정을 본 태해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사회의 민낯이야.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곳이라고. 너 같은 초보 뉴비가 가면 금세 더럽혀질걸?”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궁금해하지 마. 지금은 그냥 착실하게 스킬 숙련도나 쌓는 게 좋으니까.”
그렇게 말한 태해란은, 고대현을 위아래로 살폈다.
가지고 있는 장비는 검 하나.
그렇다면 보유 서브 스킬은 검이랑 관련된 거겠지.
“너, 스킬은 뭐 골랐어?”
“감마 스트라이크, 검날 흘려내기, 발광탄, 마지막 전사 정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2개가 전부긴 한데…….”
“2개는 검술이니까 그렇다 치고, 발광탄은 좀 의외네. 너, 발광소자 모으는 퀘스트는 했어?”
발광탄은 발광소자 모으기 퀘스트를 완료하고, 제작에 들어가야 쓸 수 있다. 즉발 스턴이 가능하지만, 여러모로 번거로운 스킬이었다.
“아니, 아직 안 했어.”
“그럼 그것부터 해.”
“알았어, 강림 너달리야.”
“······태해란이야.”
태해란은 옆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쟤는 테이밍 능력이 좋으니까. 당분간 옆에 두고 봐야겠다.’
“일단 당분간은 내가 알려줄게. 따라와.”
그녀가 손짓하면서 어딘가로 향한다.
고대현은 마침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별말 없이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성의 외벽 부근. 앞은 낭떠러지가 있는 절벽이었다.
절경은 꽤 멋졌으나, 고대현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발광소자 모으는 곳은 다른 쪽인데…….”
지도를 보면 기간티아 성 부근으로 워프 게이트를 탄 다음, 요정숲의 산맥으로 이동하는 게 최단 루트였다. 그러나 태해란은 또 다른 길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다려봐. 좀 있으면 알게 되니까.”
철컥.
그녀가 손에 있는 장비를 조작한다. 건틀렛처럼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 미세한 기계 장치가 연결되어 있다. 그 모습이 스팀 펑크를 연상케 한다. 워낙 섬세해서 무기용으로는 안보였다.
촤라락. 끼릭.
날개를 펼치듯 벌어진다. 철사와 힌지가 벌어지고 조립되면서 관악기 같은 장치를 만든다. 태해란은 뿔피리를 불듯, 그것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끼에에에엑!
작은 장치에서 날 수 없는 거대하고 높은 고음이 공기를 울린다. 독수리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 때마침 우중충한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고대현은 그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뭔가를 부르는 건가?’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서 펄럭이는 그림자가 춤추듯 내려왔다.
그리핀이었다.
“다행히도 근처에 있었네.”
태해란은 그리핀 위에 타면서 손짓했다. 뒤에 타라는 것이었다.
“그 뿔피리로 부른 거야?”
“응, 몬스터의 성대를 본떠서 만든 장비야.”
“뭐야, 테이밍 천재라고 하더니 장비 빨이네.”
“길들인 애들만 부를 수 있는 거거든? ”
“미안.”
고대현은 사과하면서 그리핀의 뒤에 탑승했다.
펄럭.
곧이어 비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