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82화
[-승리-]
터져나간 수정석이 머리 위에 승리, 라는 문구를 만든다.
진아는 잠시 상공을 응시하다가 옆을 본다. 자신의 오빠가 컨트롤하는 르블론이 바로 옆에 있었다.
슈웅.
아니.
마지막 순간까지 위치를 바꿔가면서 상대를 농락한다.
위잉, 치킨.
금속 팔이 허공을 스쳐 지나간다.
르블론은 대표적인 그랩 챔피언인 브리츠크랭크의 로봇팔 돌진을 가볍게 회피했다.
초반의 라인전 때도 상대 그랩을 빼면서 농락하더니.
이제는 헷갈릴 수밖에 없는 2중 워프홀로 브리츠크랭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르블론…… 잘하네? 2중 워프홀 때는 실수 좀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 은근히 아쉬워하는 말투다?”
“솔직히 상대 브리츠가 너무 불쌍해서…… 나였으면 한 번은 끌려줬다.”
“몰라. 뽑기도 못하는 깡통 사정을 내가 왜 봐줘?”
르블론은 워프홀이라는 스킬을 통해서 일정 거리를 이동한 뒤. 다시 지정해둔 장소로 올 수 있다.
지속 시간만 된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복귀가 가능한 스킬로, 제도의 그림자 교체와 더불어 고위급 위치 변환 스킬에 속한다.
특히 르블론의 궁극기는 스킬의 이중 사용이 가능한데.
이를 통해 워프홀을 쓴 상태에서 또 워프 해서 2단 이동이 가능하다.
‘그때 2개의 홀을 잘 이용해서 상대를 농락하는 게 중요하지.’
숙련도 높은 르블론은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이동기가 없는 뚜벅이 챔피언을 농락시킬 수 있다. 고대현의 농락실력은 상당히 위였다. 상대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거겠지.
‘오빠, 나중에 샤크호를 해도 잘할 것 같은데…….’
진아가 로비로 나왔을 때였다.
“그건 그렇고…….”
고대현이 전적을 보면서 입을 연다.
그는 진아의 아이템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진아는 일전의 게임에서 불손한 파괴자, 무라마사, 수정 약탈자를 올렸다. 이주리얼에게 평범하다면 평범한 템트리.
그런데 스크롤을 내려서 그 이전의 전적을 살피자, 이상한 템트리가 눈에 밟힌다. 고대현이 미간을 좁히며 말한다.
“너, 왜 쉐앤으로 칼날폭우 특성에 자객의 손톱을 갔냐?”
뭐랄까. 아이템과 챔피언이 어울리지 않았다.
“으, 응? 내, 내 전적 보고 있었어?”
진아가 당황한다. 목소리가 떨린다.
대현은 개의치 않고 그간의 기록들을 살폈다.
“아크션으로 도락사르의 결혼검, 처형의 총, 무라마사, 셰릴다의 창…… 죄다 방어력 관통으로 갔네?”
“그, 그건…….”
아크션은 보통 마최, 고래 학살자, 처형의 총을 올린다.
그런데 진아가 간 템트리는 텔론 같은 암살자 챔피언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시선을 더 내린다. 아크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챔피언들의 템트리도 조금씩 엇나가 있었다.
“카타린아로 태불방이랑 거드라?”
이거 완전 트롤 템트리 아닌가.
“이, 일부러 그렇게 산 거야.”
“일부러?”
진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잇는다.
“모래주머니 수련법이라고 알아?”
“모래주머니?”
팔이나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서 움직이는 수련법은 안다.
가끔 만화에서나 보던 거.
한데, 모래주머니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설마…….
“힘을 제한한 상태에서 싸우다가, 실전에서 힘을 해제하면 폭발적인 힘이 나오지.”
“아이템이 모래주머니라는 거야?”
“으, 응…….”
대답이 시원치 않다.
“그냥 특이한 템트리가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고?”
가끔 이상한 템트리로 자신보다 티어가 낮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경우가 있다.
원거리 딜러인데 방어 아이템만 올려서 이긴다든가. AP 챔피언인데 AD 아이템을 올린다든가. 비살생주의 라면서 한타 참여를 아예 안 한다든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취향이었나?’
진아도 그런 취향일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예상외로 탐구심이 깊은 모양이다.
“너, 팀원들이 뭐라고는 안 해?”
“뭐라고는 안 하지. 난 항상 실력으로 증명하거든. 그리고 이런 걸 해줘야 뉴메타도 나오고 하는 거야!!”
대현은 진아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더 이상의 염탐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저렇게 하다가 간혹 새로운 조합이나 템 빌드가 나오기도 하는 건 사실이니까.
‘되짚어보면 앳쉬로 그런 템트리도 갔었지.’
제국의 망령과 무라마사를 올렸던 과거를 떠올린다.
전부 UI 시스템의 보조 강의 탭에서 본 템트리지만, 예상외로 쓸 만했었다. 따라서, 진아의 템트리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대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앳쉬로 제국의 명령이랑 무라마사, 그리고 방어력 관통 아이템 둘러도 꽤 좋더라고. 너도 나중에 해봐.”
“엥? 누가 그런 쓰레기 같은 템트리를 가?”
“……태불방, 거드라 카타린아보단 훨씬 좋거든?”
몇 분간 쓰레기 같은 템트리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대화 결과. 진아는 원딜을 제외한 픽에서 상당한 실험 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의 프로 똥믈리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접속을 종료합니다.]
대현과 진아는 별안간 접속을 종료한 뒤, 식탁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주말 점심.
부모님은 둘이서 놀러 간다고 잠시 외출하셨다.
집에 있는 사람은 2명뿐이었다.
꼬르륵.
슬슬 배고플 시간이다.
“뭐 먹을 거야?”
진아가 요리 로봇 앞에서 말한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메뉴 목록이 쭉 정리되어 있다. 대현은 대충 아무 볶음밥이나 달라고 답했다.
코인이 남아돌아서 샀는데, 신형 로봇답게 요리 속도가 빠르다.
금세 식탁에 볶음밥이 놓인다.
‘처음 먹어보는 종류 같은데…… 맛은 좋네.’
고급 레시피까지 활용 가능한 패키지로 구매해서 그런지 실력이 좋다. 고대현은 잠시 말없이 밥을 먹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진아가 숟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 기사 대행증 있었지?”
“어. 그런데 그건 왜?”
“이따 밥 다 먹고 그걸로 접속하자!”
“관전하게?”
진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번 침략전 때 관전하다가 금방 끝난 게 아쉬운 듯했다. 고대현도 내부를 돌아다니고 싶은데 연습 때문에 못 했으니 이참에 접속해 볼 생각이었다.
“다 먹고 내 방으로 와라. 준비해 놓을게.”
설거지를 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대현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가상현실 헤드셋을 썼다. 별안간 진아가 의자를 가지고 뒤따라온다. 손에 무언가를 든 채로.
“팝콘이랑 콜라는 왜 가지고 오냐.”
“그냥 보면 재미없잖아.”
그녀는 의자를 침대 근처에 놓고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시야 공유형 관전이 가능하면 좋겠다만. 보안상의 이유로 불가능하기에 홀로그램 영사 기능으로 봐야 한다.
‘거의 일주일만인가?’
대현은 침대에 누운 채 접속을 시작했다. 여타 3대 종목이 아닌 린이지의 레기온 성으로 접속한다. 내면의 공간 안에 구비된 모니터가 검게 물들었다가 순간 밝아진다.
스타트 지점은 본성의 1층 로비였다.
보자마자 천장이 높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위를 보자 거대한 샹들리에가 있고, 그 옆의 길쭉한 벽면에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박혀 있었다.
고대현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내부를 탐색하기로 했다.
‘주말이라서 그런가 접속자가 생각보다 없네.’
내부는 한산했다. 마치 평일의 박물관을 보는 것 같달까.
그렇게 몇 발자국 걷고 있자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앞에 도달했다.
여길 나가면 모험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가 나온다는 것이겠지. 이에 고대현이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튜토리얼을 완료한 뒤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튜토리얼?’
튜토리얼 안내와 함께, 아래에 추가로 문구가 떠오른다.
[레기온 성 기사 대행증 A급.]
- 기사 대행 필수 등록 이수하기.
보상 : 외부 통행권.
겉모습이 외부 노출용 아바타로 바뀌었다고 바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대현은 미간을 좁히고 퀘스트창에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지도에 나타난 종착지는 성 내부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실내 연무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덜컥.
환영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연무장은 주춧돌 같은 푸른빛의 암석이 일대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띠링.
[교육 이수]
-서브 스킬 등록.
-기본 능력 측정.
[진행 중에는 외부 노출 모드가 해제됩니다.]
‘뭐 이렇게 하라는 게 많아?’
짧게 한숨을 쉰다.
고대현은 튜토리얼을 싫어한다.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날 스킵을 하는데, 여기는 스킵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다.
‘흠. 일단 여기서 기본 능력을 측정하고 나머지 교육을 들어야겠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설명을 읽은 대현은 별안간 기본 능력 측정을 위해서 훈련용 꼭두각시 앞에 섰다. 기본 능력 측정이라는 네이밍답게 하는 일은 간단했다.
‘튜토리얼이 제시하는 무기를 잡고 훈련용 꼭두각시를 공격하면 된단 말이지?’
처음부터 어떤 무기를 제시할지는 모르겠다만.
상호작용 [F]가 있으니 어떤 무기가 와도 상관없었다.
지잉.
빛과 함께 바닥에서 활이 소환된다.
신체의 길이 문제 때문일까. 테스트는 외부 노출 모드가 해제된 상태로 진행되었다.
딸깍.
대현은 여느 때처럼 F키로 화살을 잡았다.
그리고 튜토리얼이 제시하는 꼭두각시 포인트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퓩-!
[클린 히트 : 100%]
화살은 곧잘 맞아 들어갔다.
몇 번이나 고득점을 획득하자 난도가 상승한다.
꼭두각시가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핸조로 팔라를 맞추는 거에 비하면 너무 쉽지.’
정신을 집중해서 날리니 이번에도 클린 히트가 떴다.
[데이터 수집 완료]
[다음 무기로 넘어갑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곧이어 다음 무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길쭉한 스태프. 그러니까 마법 지팡이가 나타났다. 보유 스킬이 없는지라, 기본 마법밖에 쓸 수 없었다.
‘이번에는 여러 개를 동시에 맞추는 거네.’
지팡이는 활과 달리 광범위 능력을 보는 듯했다.
기본 스킬 설명창에 나타난 스킬 시전 방식을 읽었다.
방식이 생각보다 복잡하지만, 고대현에게는 쉬웠다.
[UI 시스템 발동]
그저 마우스 왼쪽을 길게 눌러서 차징하고.
컨트롤을 누른 채 대상을 오른쪽으로 클릭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개체가 중복 선택이 된다.
고대현은 꼭두각시를 다 고른 뒤,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파파파파팍-!!
기본형 측정형 마법 공격이 투사체로 변해서 날아간다.
10개 정도의 꼭두각시에 모든 투사체가 적중했다.
‘깔끔하다.’
여기까지 성공하니 지팡이로는 더 할 게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검과 도끼, 망치 등. 여러 가지 무기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실패하거나 기준치에 미달 되는 일은 없었다.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측정이 완료되었다.
이제 서브 스킬 등록의 시간인가? 고대현이 측정 결과표의 올 퍼펙트 표식을 보면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익숙한 목소리가 어깻죽지 뒤편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니, 침략전 때 봤던 수호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화려한 갑주가 빛을 반사한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이후로는 첫 접속이신가요?”
“아, 네······.”
침략전 이후로 대우가 깍듯해졌다.
대현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여러 명이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렇게 2명이 서 있으니 뭔가 어색했다.
“아직 스킬 등록은 안 하셨죠?”
“네.”
고대현이 가만히 있으니, 그녀가 설명을 시작한다.
저번에 미끼로 사용한 것에 대한 사례라고 하면서 말이다.
“원래는 성인식을 거쳐서 얻지만, 미성년 대행 기사는 등급에 따라서 원하는 만큼 베타테스트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고를 걸 미리 체험하는 느낌으로 선택하는 게 좋지요. 그런데…… 나중에 뭐할지는 정하셨어요?”
커서 뭐할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글쎄요. 학교에서는 광전사 추천하던데.”
“크흠, 광전사는 좀 별로긴 한데, 고대현 학생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요.”
수호기사, 홍영은 고대현의 측정 결과표를 훑었다.
침략전 때를 생각하면 전사류를 하는 게 좋아 보인다.
그러나.
결과표를 확인한 홍영은 곧장 생각이 바뀌었다.
‘전부 다 가능하다고?’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
각종 수치가 도식화된 5각형 내부가 꽉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