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80화
그라운드 제로를 마지막으로 평가전이 끝났다.
학교 코인은 다음 주 월요일에 각자 정해놓은 비율대로 지급될 예정이었다.
피드백이나 상담도 다음 주에 하는지라, 금요일 밤은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나 먼저 간다.”
“다음 주에 보자.”
해가 지고 밤이 어느 정도 깊었을 때 즈음.
학생들 대부분이 집으로 복귀했다.
고대현은 귀찮아서 내일 아침에 가기로 했다.
“넌 안 가?”
“기숙사에서 쉬었다가 가려고.”
이하린도 고대현처럼 집에 가지 않았다. 내일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그런 이하린을 따로 만나서 말을 건 게 밤 10시쯤이었다.
“이번 주말에 보자고?”
“응.”
고대현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새로 생긴 장비로 이하린의 움직임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네 움직임 좀 가르쳐줘.”
“내 움직임?”
“그거 있잖아. 막, 휙휙 하는 거.”
고대현이 대강 흉내 내면서 말하니, 이하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업계 비밀이라서 안되는 걸까.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고민하던 이하린이 입을 열었다.
“가상현실에서 만날 거야?”
고대현은 당연하게 어, 이라고 답하려다가…… 머뭇거렸다.
‘가상현실은 좀 애매한데…….’
남들과 다르게, 자신은 동작이 자유롭지 않다. 이하린이 옆에 딱 붙어서 지도하면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취한 동작을 등록하는 거니까 형태만 익히면 된다.’
대현은 생각을 정리한 뒤 현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금세 문제에 봉착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연습을 할 곳이 있나?”
연습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학교 체육관에서 하면 되긴 하다만, 주말에 학교에 나오고 싶진 않았다. 그때 이하린이 말했다.
“그럼, 네가 우리 집으로 올래?”
“너희 집?”
“아주 넓지는 않아도 연습할 정도는 되거든.”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엄마와 수련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하린의 집이라.’
세계가 바뀌고 나서 처음 가는 친구의 집이었다.
이렇게 바로 가도 되는 걸까?
고대현은 1초 정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집 주소 좀.”
“문자로 보내줄게.”
그녀가 손목에 있는 스마트 워치를 들었다. 반 아이들과의 연락처 교환은 진작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너, 몸은 괜찮지?”
움직이던 이하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는 고대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몸 걱정은 나보다 네가 해야 하는 거고.”
“……지금은 큰 문제 없거든?”
홀로그램 화면을 몇 번 만진 그녀가 전송을 누른다.
별안간 대현의 스마트 워치에 알림이 왔다.
그는 손목을 들어 올려서 대략적인 위치를 봤다.
‘산 근처라…… 생각보다 외진 곳이네.’
지도에 찍힌 위치 옆에 산이 있었다.
아니, 가만 보면 산 중턱인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전화해. 내가 데리러 내려갈 거니까.”
“아, 응.”
왜인지 모르게 엄청 빡세게 굴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적당히 하겠지. 뭐.’
속으로 생각하면서. 고대현은 미약한 불안감을 지웠다. 오랜만에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그럼 일요일에 보자.”
“응, 잘 가라.”
고대현은 엘리베이터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하린은 여자 층이라서 먼저 내려야 했다.
“잠깐만.”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두 발자국 정도 디딘 이하린이 다시 엘리베이터 내부로 돌아왔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음 층계로 향하는 버튼을 응시했다.
스르륵.
그런 사이에 문이 닫힌다. 엘리베이터는 남자 층으로 이동했다.
“왜 안 내리냐?”
의아함을 느낀 고대현이 질문했다. 이에 이하린은 턱 끝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실험해 볼까?”
“실험?”
“저번에 갔을 때는 벌점 있었잖아.”
이하린이 말하니까 기억난다. 그 덕분에 유금옥과 단둘이 했었지. 고대현이 잠시 과거를 상기하고 있자니, 별안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기숙사 내부는 조용했다.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대부분 집에 갔기 때문이었다.
“얍.”
이하린이 남자 층 복도에 발을 들였다.
“너, 또 저번처럼 벌점 먹으려고?”
“그래 봤자 캡슐실 제한인데 뭘.”
그녀가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고대현도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이거 좀 있으면 경보 울릴 것 같은데…….”
“글쎄다. 그때도 방 근처에 있다가 울렸는데. 지금 수준이면 아직 안전 범위야.”
저번에는 방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벌점을 먹었다.
일정 시간이나 거리로 따져서 매기는 것 같았다.
이하린은 감시 카메라를 살피다가 호실이 늘어져 있는 복도에 시선을 줬다.
그녀는 방 근처까지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다시 엘리베이터에 근처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면 걸리는 시스템인가?”
“글쎄다…… 아마 그럴지도?”
고대현도 어느새 그녀의 실험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재미가 있던 것이다.
“이번에는 네 방 안까지 들어가 볼까?”
“그건 좀…….”
하지만 방까지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위험 레벨이 너무 높았다.
고대현이 난색을 보이자 이하린이 피식 웃으면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농담이야.”
스르륵.
별안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고대현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향했다.
* * *
한편, 그 시각.
범단월은 레기온 성 수련장에서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좀 더 각도를 틀어서…….’
탕-!
총알이 원하는 각도로 휘어지면서 훈련용 더미에 적중한다.
오랜만에 비술을 곁들여서 하는 훈련이었다.
‘잠시 쉴까.’
훈련장에 나온 그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홀로그램 창을 띄워서 복사할 영상을 탐색했다. 피드를 주르륵 내리자, 저번에 봤던 영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상을 추천한다.
‘이건?’
범단월의 눈에 켄지로 레일하라트의 서리 불꽃을 튕겨내는 영상이 잡혔다. 켄G무비의 검날 흘려내기 영상을 봤더니 비슷한 걸 추천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켄G무비는 못 따라오겠지.’
보통 이런 건 어중간하게 따라 하는 영상이 대부분이었다.
복사할 거면 더 상위급의 영상이 있기에.
범단월은 딱히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재생을 눌렀다.
습관적인 행동이라고 봐도 좋았다.
“응?”
그런 범단월의 눈이 별안간 점점 커졌다.
표정은 어느새 심각하게 되어서 영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빠르다. 그리고 깔끔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켄G무비보다 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켄G무비는 찰나에 불을 헤집듯이 방향을 틀어서 복제 반사하는 반면.
이 켄지는 매우 빠른 손놀림으로 타점을 잡아서 불을 튕겨내고 있었다.
팅-! 화르륵-!
손에 닿은 서리 불꽃을 곧장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상대에게 날린다. 레일하라트의 서리 불꽃은 타점을 잡기가 매우 힘든데 이걸 해내다니.
‘보통 놈이 아니다.’
범단월이 ‘복사’를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영상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꽤 오래 하시네요.”
레기온 성 4 수호 기사 중 한 명인 ‘홍영’이었다.
4명 중에서 서열이 제일 낮은 그녀는 정태룡의 보조 같은 위치였는데.
그 때문에 홍영은 정태룡이 데려온 후원자들과도 친한 편이었다.
“뭣하면 제가 봐 드릴까요?”
홍영은 한국 대륙 원거리 딜러 중에서 상위 0.1%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범단월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직은 그녀의 발아래였다.
“괜찮아요. 오늘은 총보다는 검을 수련하고 싶어서요.”
“나중에 올마스터라도 되시게요?”
직급이 올라갈수록 보유 스킬의 수가 증가한다. 보통 같은 계열의 스킬을 익히는 게 정석이지만, 가끔 다중화된 무기를 다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글쎄요. 이건 그냥 재미로 하는 거라서.”
“재미요?”
“어디까지 강해질지 궁금하잖아요. 제 힘이.”
“아, 네…….”
홍영은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범단월 말고도 봐줄 사람이 있었다.
“고대현 학생이랑은 아직 안 친한가 봐요?”
“네? 아, 뭐…… 아직 친한 단계는 아니죠.”
범단월은 고대현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처음이라서 어색한가 보네요?”
“네.”
고대현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무뚝뚝한 타입이었다.
가까이 가기 힘든 게 이해가 된다.
홍영은 팔짱을 끼고 훈련장을 훑으면서 이야기했다.
“언제 성으로 들어오면, 저한테 오라고 해주세요. 답례로 몇 번 봐줄 생각이라서.”
“답례요?”
“네, 제가 침략전에서 무리한 부탁을 했었거든요.”
범단월도 대행 기사라서 침략전의 알림을 받았다.
다만 자느라 못 들어와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내부 기록마저도 고위급이 아니면 열람 금지 상태였다.
“걔가 침략전에서 뭘 했는데요?”
“음, 방패랑. 미끼 정도의 역할을 했었죠. 가지고 있는 스킬이 없어서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흐음.”
고대현의 동작을 상기한 범단월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언제 한 번 만나서 전해줄게요.”
그렇게 말한 범단월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접속을 종료했다.
* * *
시간이 지나고, 대충 아침이 밝았다.
고대현은 일어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평가전은 어땠어?”
진아가 위의 질문을 한 건, 그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 4시간쯤 지났을 시점이었다.
간간이 안부 연락을 한 덕분에. 그녀도 어제 평가전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캐리.”
대현은 짧게 답하면서 짐을 정리했다.
“무슨…… 맨날 캐리했다고만 하네.”
진아는 볼을 부풀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나랑 1대1 해볼 생각 없어?”
“1대1?”
“1대 1이 서로 배우기 좋잖아.”
1대 1은 라인전과는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상대 정글 갱킹이나 로밍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혼신의 결투! 가끔 이런 걸 해줘야 감각이 살아난다.
“오, 그래. 1대 1 좋지.”
고대현도 동생과의 1대1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기숙사에서 헤드셋을 챙겨왔기에 바로 할 수 있었다.
“뭐로 1대1 할까.”
접속하기 전에 진아가 물어본다.
“너 편한 거로 해.”
“나 편한 거?”
진아는 원거리 딜러를 주로 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음, 그럼 붸인으로 해도 돼?”
“붸인? 붸인 좋지.”
“진짜?”
진아는 LOH에 접속한 뒤 1대1 방을 팠다.
그리고 살짝 멈칫하다가 붸인을 픽했다.
붸인은 원딜 중에서 난도가 높은 챔피언…….
솔직히 1대1을 하려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 숙련도가 뒷받침되어 있어야 했다.
‘잘하니까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진아는 오빠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 상황이었다.
뤼신이나 쉐앤 같은 근접 챔피언 하는 건 봤는데. 원딜을 하는 건 못 봤으니까.
‘카이팅은 잘하나?’
[소환사의 계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자니 게임이 시작되었다.
소환서의 계곡, 아군 시작 지점에서 눈을 뜬 진아의 붸인은 듀란검과 포션을 사고 미드로 향했다.
상대 미드에도 붸인이 있었다.
계곡의 햇살 때문에 붸인의 은화살이 반짝인다.
먼저 구르기를 써서 평타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한 범위 내에서 서로를 견제했다.
[미니언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때, 각 라인으로 미니언이 도착했다.
적 미니언과 아군 미니언이 투덕거리면서 싸우는 가운데.
푝푝-
진아는 침착하게 CS를 먹었다. 미니언 막타를 치자 골드가 들어온다.
솔로킬을 따거나 CS 100개를 먼저 채운 사람이 이기는 룰이었으니 미니언도 신경 써야 했다.
푝푝, 퓩퓩.
양쪽에서 은화살이 오간다. 진아는 곁눈질로 상대 붸인을 관찰했다.
고대현의 붸인은 정확한 평타 모션으로 미니언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다.
‘평타 모션은 좋고…… 견제력이나 봐볼까?’
어느덧 3레벨을 찍고, 교전의 때가 왔다.
진아는 미니언에 평타를 때리는 척하다가 상대 붸인이 장전 노리쇠를 당기는 순간.
“느려.”
데구르르.
기습적으로 구르기를 썼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강화된 평타를 날렸다.
퓩퓩칭-!!
평타 2대를 날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대못, 볼트를 날리면서 3스텍 고정딜까지 터트려준다.
마지막에 볼트로 몸을 밀어내서 반격을 취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진아는 HP가 줄어든 오빠의 붸인을 보면서 탄식했다.
‘아, 너무 진심으로 했나?’
생각해보면 붸인.
거의 처음이었을 텐데 초장부터 너무 강하게 나갔다.
이에 진아가 ‘살살해볼까?’라고 생각할 때였다.
퓩퓩칭-!!
고대현의 붸인도 구르면서 진아의 콤보를 따라 했다.
진아는 볼트에 의해 뒤로 밀려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