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55화
다음 날.
대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 운동을 마친 뒤 학생 식당으로 이동했다. 아침 줄은 예상보다 짧았다. 덕분에 줄을 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식을 고를 수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샐러드…….
고대현은 접시를 받고 의자에 앉았다.
길쭉한 식탁의 위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적당한 햇빛.’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비가 오길 바랐다. 비가 오면 적어도 운동장 돌기는 안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밥 먹을 때는 해가 비추는 게 좋네.’
적절하게 따뜻한 햇볕이 차가운 뺨에 온기를 전해준다.
와작.
고대현은 창문 너머를 보면서 샌드위치를 가볍게 베어 물었다.
겉면에 귀리가 붙어 있는, 약간 건조한 느낌이 드는 빵 사이에 햄, 치즈, 계란프라이, 토마토, 풀 한 장이 들어가 있었다.
‘치즈, 살짝 녹여서 들어가 있군.’
크리스피한 겉면과 달리 속은 눅진하게 촉촉했다.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마다 치즈와 계란이 빵과 함께 엉긴다.
씹을 때마다 얇고 파릇한 채소 한 장이 입술 밖에서 흔들거린다.
소가 여물을 먹듯이 우적우적 먹었다. 대현은 샌드위치를 꿀꺽 넘기고 함께 나온 우유 한잔을 마셨다.
후루룩.
혀에 우유 향이 퍼진다. 유리잔이 살짝 뜨겁다.
아침인지라 우유는 따뜻하게 데워진 상태의 것을 주문했다.
차가운 우유도 좋지만, 따뜻한 우유만이 주는 풍미가 있으니.
후룩.
그것을 음미하면서 다시 우유를 머금었다.
이 조합.
근래 고른 아침 메뉴 중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샐러드도 먹어볼까.’
대현은 입에 남은 향을 음미하다가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약간 짭조름한 맛의 오리엔탈 소스와 채소들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채소의 중간중간에 잘 썰린 바나나와 사과도 있었다.
부드러운 바나나 조각을 으깨면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남아 있는 우유를 홀짝이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온다.
마침 아침이고 운동을 해서 그런듯했다.
‘운동이 끝나고 기숙사에 들러서 샤워하고 나올 수 있었지…….’
여유 시간은 넉넉하게 1시간 정도 있었다.
‘기숙사에 돌아가서 잠깐 자고 올까.’
고대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을 내쉬고 있자니, 이하린이 입을 열었다.
“많이 피곤해? 어제 후유증이 아직도 남은 것 같은데…….”
“후유증?”
“너 어제 거의 마지막까지 있었다면서.”
신영범 학년 담임의 수업.
그 힘든 수업에서, 고대현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맞아. 너 어제 쉬지도 않고 바로 어디 나가던데.”
유금옥이 말하자 다른 애들도 덧붙인다.
“당장 눈에 안 보여도 축적되는 거니까 조심해야 하는데, 그거.”
“그러게.”
대현은 진아가 호들갑 떨던 때를 떠올렸다. 또 자신도 모르게 주변인들을 걱정시킨 것 같아서 머쓱해졌다.
‘어차피 그런 일은 없을 텐데…….’
고대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사이 아침 식사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태원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오늘은 쉬든가.”
“응? 쉴 수도 있어?”
대현의 질문에 이태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듣자 하니.
조퇴처럼 쉴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물론 몸에 이상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했다.
“평가전은 금요일에 있으니까. 오늘은 문제없을걸?”
원래 쉴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니까 혹한다.
절대로 오늘 오후에 있을 체육 수업을 빼기 위함이 아니었다.
대현은 지난날을 떠올렸다.
‘되짚어보면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살았지.’
병원에서부터 입학식, 그리고 현재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오늘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선생님께 말하고 쉬어야지.”
“잘 생각했어.”
“흐흐, 난 네가 언제 그 말 하나 했다.”
다들 쉬겠다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열심히 하긴 했나 보다.
대현은 교무실로 향하기 전에 말했다.
“근데 나 빠지면 팀전 같은 건 어떻게 되냐?”
“음, 오늘은 팀전 없으니까 괜찮을걸?”
허건섭이 홀로그램 화면을 보면서 오늘의 커리큘럼을 설명해준다.
“오늘은 고화력 기술 사용 연습이 메인이야.”
“고화력 기술이면…….”
“베루코즈의 궁극기나 미스터 포츈의 궁극기 같은 거 말이야.”
대응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배우지만, 결국 원거리 딜러와 메이지 브루저가 희망인 애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그런 고화력 기술을 연습하는 수업이 존재했다. 특히 다양한 환경에서 스킬을 쓰는 걸 교육 목표로 한다고 하는데…….
‘빠져도 되겠네.’
대현은 대강 고개를 주억거린 뒤 교무실로 향했다.
위잉.
고대현이 들어오자 선생님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다.
대현은 김원 선생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어, 저 오늘 조퇴하면 안 될까요.”
“조퇴?”
“오늘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그러니?”
고대현의 거짓말이었지만, 김원은 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하긴, 그런 걸 했는데 안 피곤한 게 이상하지.’
어제 해보고 나서 난이도 조절을 해야겠다는 소리가 곧바로 나왔다. 아직 1학년에게는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신영범 학년 담임도 허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 오늘은 가서 쉬어라.”
“넵.”
조퇴 허가를 받은 고대현이 교무실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신영범 학년 담임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든 채 들어왔다.
“특이 사항 있나?”
“고대현 학생이 조퇴했습니다.”
“뭐, 뭐라고?”
화들짝 놀라는 신영범.
그는 탁자에 머그컵을 올려놓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뭐래?”
“어제 수업 때문에 피곤한 모양입니다.”
“흠…….”
신영범은 어제 있었던 전투를 상기했다.
훈련 대륙 옆에 있는 섬에서.
그는 야나 이바노프의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냈다.
다른 학생은 받아내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게다가 10%긴 해도 그 무기를 들고 스킬을 사용했지.’
단순히 밀어내기만 했던 침략전과는 다르다.
들고 사용하기까지 했다.
분명 대미지가 쌓였겠지.
신영범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대현 학생도 사람이긴 하네.”
* * *
대현은 조퇴한 뒤 기숙사로 돌아왔다.
자신 말고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를 하기 위해서 들르는 애들이 많았다. 그들과 함께 복도를 가로질러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게 눕자마자 잠이 온다.
‘이대로 한 두 시간만 자야지.’
몸이 침대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고대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다른 애들은 수업하고 있으려나.’
천장을 보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자니 심심함이 몰려온다.
‘한 판 해야겠다.’
조퇴했는데 캡슐실에 가서 할 수는 없으니, 방에 있는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했다.
‘오늘의 퀘스트는 타워철거 8번인가.’
오랜만에 퀘스트 목록을 살폈다.
하루 6시간 퀘스트만 하고 나머지는 좀 소원해진 경향이 있는데, 이참에 다시 골드 모으기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UI 업그레이드로 감정 표현이 나왔으니까. 이번에는 시설이나 업그레이드해야겠다.’
고대현은 LOH 비정규 전에 접속한 뒤 마스터 우를 픽했다.
오랜만에 정글 마스터 우를 할 작정이었다.
“정글 선입니다.”
그러나 선수를 빼앗겼다.
정글을 먼저 하겠다는 사람이 있던 것이다.
“그럼 탑 갈게요.”
결국 대현은 3가지 라인 중에서 탑 라인을 가기로 했다.
“탑이요?”
“네.”
탑 마스터 우가 대중적인 픽은 아니다.
오히려 탑으로 가서 불리한 경우가 훨씬 많은 픽.
그래서 그런지, 팀원들은 미심쩍은 눈길로 마스터 우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같았다.
‘어차피 일반 비정규에서 열 내봤자 나만 손해지…….’
잘하는 사람 대다수는 사설 그룹 게임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정규를 돌린다는 건, 언제라도 이상한 컨트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슉슉슉.
로딩이 끝나고 게임이 시작된다.
소환사의 계곡에 도착한 마스터 우의 위에 게스트 1111이 나타난다. 대현은 곧장 탑으로 향했다.
‘저거 탑 가면 힘들 텐데.’
‘상대 팀 피요나 엄청나게 크는 거 아니야?’
마스터 우는 평타 기반의 챔피언.
감마 스트라이크라는 순간 지정 불가 딜링기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딜을 가할 수 있는 건 평타 뿐이었다. 마스터 우는 팀원들의 의심을 받으며 탑으로 갔다.
‘맞라인 상대는 피요나네.’
고대현은 가는 길에 대진표를 봤자. 상대 탑은 피요나였다.
참고로, 피요나도 마스터우와 비슷한 평타 위주의 검사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탑에서는 피요나가 좀 더 유리하지.’
마스터 우는 감마 스트라이크의 의존도가 너무 높다.
초반에 스킬을 잘못 쓰면 스노우 볼이 끔찍하게 굴러가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서 들어갔는데 바로 상대 정글이 온다든가…….’
마스터 우는 HP를 채울 수 있는 스킬 ‘마음 챙김 명상’이 있지만, 몸이 약한 편이라서 초반 갱킹에 아주 취약했다.
반면, 피요나는 치고 빠지기에 능한 스킬을 갖추고 있었다.
패시브가 상대방의 약점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 약점을 찌르면 추가 딜이 들어가고 이동속도가 증가했다.
해서, 돌진 스킬인 슬라이딩 찌르기로 약점을 친 다음.
곧바로 빠지면서 딜 교환을 할 수 있었다.
‘일단 미니언 정리용으로 써야겠다.’
대현은 와리가리 하다가 미니언을 향해서 감마 스트라이크. Q를 사용했다.
딸깍.
화면 속 마스터의 우가 검을 휘두르면서 상반신을 아래로 숙인다.
다음 순간.
사사사삭!!
마스터 우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지정한 미니언 일대에 마스터 우의 잔상이 퍼져나간다. 순간적으로 범위 내의 적에게 수십 번의 칼질을 하는 스킬, 감마 스트라이크!
몸을 이동시킬 수 있음과 더불어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기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킬 중 하나에 들어간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아닌 것 같지만…….’
스걱!!
감마 스트라이크가 끝남과 동시에.
뒤에 있던 마스터 우가 지정한 미니언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감마 스트라이크의 시전 원형의 범위만큼.
다른 미니언들에게도 감마 스트라이크의 딜이 들어갔다.
스걱스걱.
미니언 막타를 친다.
고대현의 입장에서는 단순하게 앞에 있는 미니언에 스킬을 사용하고, 나머지 미니언들을 평타로 관리하는 과정이었다.
‘저, 저건…….’
하지만.
앞에서 약점 찌르기 각을 보고 있던 피요나는 일순 몸이 굳어버렸다.
아니.
“흐냑!”
우당탕.
너무 놀란 나머지, 슬라이딩 찌르기를 하다가 넘어졌다.
* * *
이유노는 암살을 좋아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상대와 붙어서 합을 겨루는 걸 좋아한다. 서로의 무기가 한 뼘 차이로 교차하는 게 좋다.
HP 1틱 차이로 이겼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노가 본 대륙에 진입하고 나서 실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륙은 이미 몇십 년간의 점령을 끝내고 안정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근접하는 암살자와 검사의 활약 무대가 점점 없어졌다.
던전과 투기장이 있지만, 그녀가 원한 형태는 아니었다.
해서, 그녀는 한때 해외 대륙으로의 이전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대륙을 이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해당 대륙의 캡슐 스테이지에서 접속해야 하므로, 현실에서 사는 장소 자체도 옮겨야 하니까. 특별 허가증을 받는 게 아닌 이상 고향과 떨어져야 하는 건 필수였다.
게다가 암살자로 상대해야 하는 곳이 한국 대륙이라면…….
그냥 안 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유노가 눈 돌린 곳은 교육 쪽이었다.
왜, 가끔 보면 소득과 사회적 인식이 아래지만, 의외로 교육생들이 많이 몰리는 분야가 있지 않은가.
검사나 암살자가 그런 포지션이었다.
현실을 알아도 개개인의 선호가 작용하기에 선택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얘도 그런 부류인가…….’
이유노는 하품을 하면서, 관전창으로 자신의 수강생을 관전했다.
“하암…… 탑 피요나하게?”
“네! 나중에 응수랑 힐링 결투장을 가지고 싶거든요.”
모든 학생은 성인이 됨과 동시에 자신만의 커스텀 챔피언을 가지게 된다.
이때 기본 무기와 서브 스킬을 채워서 만든 스스로의 모습으로, 본 대륙에서 메인 스킬을 찾는 게 사회 초년생들의 일이었다.
“응수랑 힐링 결투장이라…… 어려운 거니까 잘 익혀야겠네.”
응수와 힐링 결투장은 난도가 높은 스킬이었다.
솔직히 던전 보단 콜로세움에서 투사를 하는 데에 최적화된 스킬 구성…….
‘이 학생은 나중에 그런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요즘 애들 사고방식은 알 수가 없네.’
이유노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상대 챔피언인 마스터 우를 응시했다. 마스터 우도 감마 스트라이크라는 어려운 스킬을 가진 챔피언이었다.
‘감마 스트라이크…… 검날 흘려내기까지는 좋지만, 감마 스트라이크는 나도 무리인데…….’
감마 스트라이크를 꽤 자주 사용했지만, 성인식 때 고르진 않았다. 한정된 스킬 슬롯으로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의 감마 스트라이크의 구현 평균은 20%, 한국은 40%……. 과연 저 사람은 어느 정도로 할까.’
이유노가 건조한 눈길로 게스트 1111을 응시하고 있을 순간이었다.
팟!
마스터 우의 몸이 사라졌다.
“어……?”
동시에 이유노의 잠도 싹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