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45화
게이밍 플러그의 실내 스튜디오.
그곳에 4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목적은 진로 상담 프로그램 촬영.
가상현실에서도 가능했지만, 이런 방송은 실제 촬영으로 찍는 게 신뢰도가 높았기에.
“자, 오늘의 고민 상담!”
짝.
진행을 맡은 소속 게이머, 태해란이 손뼉을 치면서 고민 사연을 읽어내려간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레전드 오브 히어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각 챔피언을 컨트롤 하는 과정에서 너달리에 관심이 생겼는데, 아시다시피 너달리가 어려운 챔피언이잖아요.”
“그래서 현 너달리 원 탑 분에게 조언을 좀 듣고 싶습니다. 여기 제 너달리 컨트롤 영상도 첨부해서 보냅니다. 현실적인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태해란의 앞에 사연자의 너달리 컨트롤 영상이 재생되었다.
4발 달린 야수와 인간의 모습을 넘나드는 인외 변환형 챔피언인 너달리.
촥!
너달리의 장창 투척 스킬이 적중되고, 표범폼으로 변한 너달리가 적에게 달려든다.
전체적인 변환은 빠르지만, 전환하고 나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게 매끄럽지 않았다.
태해란은 영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아직 행동에 주저하는 게 보이네요. 할퀴기를 할 때, 발 움직임에서 머뭇거림이 많아요.”
너달리는 덫이나 창을 맞춰서 표식이 생긴 적에게 도약할 수 있는 스킬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적에게 물어뜯기를 쓰면 더 강한 대미지가 들어갔다.
해서, 창을 맞춘 뒤 도약 점프를 하면서 물어뜯기를 하는 게 핵심 콤보였다.
“물어뜯기나 할퀴기를 할 때 머뭇거리시면 안 돼요. 핵심 딜링기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으면 그 챔피언을 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적어도 물어뜯기나 할퀴기를 할 때는 진심을 담아서 해야 해요.”
갑자기 표범으로 바뀌어서 상대 챔피언을 물어뜯는 동작은 어려운 동작이다.
상대를 무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부감이라는 걸 극복해야 구현도 높은 스킬을 뽑을 수 있었다.
“너달리를 할 때가 아니더라도 물어뜯기나 할퀴기 동작을 연습해보는 게 좋아요.”
태해란이 양손을 고양이처럼 들어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크왕, 하고 잡아먹을 듯한 동작이었다.
-오, 자세 보소.
-순간적으로 몸 움츠러들었음ㄷㄷ
-역시 강림 너달리!!
-현실에서도 너달리 동작을 취해서 익숙해져야 한다, 라…… 어렵네.
-이래서 인외형 챔피언이 재능있는 사람만 쓸 수 있다는 거임.
-레기온 성이랑 계약한 사람다운 실력이네.
태해란은 실시간으로 달리는 시청자들의 댓글을 보면서 말했다.
“보니까 폼 전환 속도는 빨라요. 너달리는 전환 속도만 빠르면 절반은 가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창도 잘 던지시고.”
정말로 너달리를 못했다면 따끔하게 말렸겠지만, 이 정도면 아직 가능성이 충분했다.
“앞으로 잘 연습해보세요. 상대적으로 난도가 높아서 그런지, 너달리를 잘하면 다른 챔피언을 할 때도 뭔가 더 쉽게 되는 게 있거든요.”
훈훈하게 마무리한 뒤.
그녀는 다음 사연으로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인 학생입니다. 원래는 마법사나 원거리 딜러로 진로를 잡았는데, 영창을 하거나 멀리서 때리는 게 갈수록 저랑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임을 하다 보면 의외의 챔피언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는 것처럼.
컨트롤 할 때마다 스스로 놀라는 일이 있다.
그게 현실의 수요와 다른 경우까지도…….
“그냥 실력이 떨어져서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암살자 위주로 연습을 해보니까 전적도 잘 나와서…… 좀 고민이 됩니다. 영상보고 판별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입시 전문가인 주나무가 설명할 차례였다.
그는 사연자의 컨트롤 영상을 보며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흠.
과연.
“보니까 이부린이나 샤크호 같은 은신계 암살자를 많이 하네요. 이런 암살자는 라그나로크때 잠입해서 점령석을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창 한국 대륙이 영토를 넓힐 때 이런 은신계 암살자를 많이 등용했었죠…….”
삑.
주나무가 라그나로크 동향 예측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
“하지만, 현재 한국 대륙은 넓힌 영토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입니다. 원래는 상대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서 마법사나 원딜 못지않게 암살자를 많이 뽑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점령석을 가져오는 부분은 근접이 될 수밖에 없기에.
대규모 길항을 펼치는 정석 대치 구조보다는 암살자들을 많이 고용했다.
이는 학창 시절에 미리 연습했던 언더 워치 점령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학교는 메타를 따라가기엔 너무 느리니까…….
“지금은 늘어난 경계면을 최대한 커버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과연 혈맹들이 암살자 TO를 늘릴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나마 있는 수요가 북부 탈환전이지만, 다음에 있을 북부 탈환전에도 현재 있는 암살자들을 데려다가 비율만 높이면 그만입니다. 신입이 필요 없어요. 그나마 있는 수요조차도 지금 있는 인력으로 처리가 가능한 상황이죠.”
돌진을 필요로 하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국이 상대하는 대륙은 탱커와 감지와드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으니.
길을 뚫을 용도로 암살자를 쓰기 애매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마법사를 보조하는 힐러의 수요가 오를 확률이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마법사들의 지구력을 보조해 줄 수 있는 포지션이 필요하게 된 것이지요.”
논리적인 의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주나무가 말을 이었다.
“사연자분이 암살자 컨트롤을 잘하긴 합니다……. 하지만 암살자는 천재들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상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동작을 계속 취해야 하는데. 그게 전투 중에 숨 쉬듯 나오는 사람이 아니면 힘들죠. 진로에 관해서는 더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주나무 대표님 피드백 꼼꼼한 거 보소
-하긴, 암살자들도 뒤로 물러날 때 됐지. 과거 점령뽕에 취해서 아직도 그 이야기나 하고 있음 ㅋㅋㅋ
-마법사도 딜 극한으로 올리면 암살자랑 다를 게 없다.
-근데 힐러 수요 상승은 의외네.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어서 보조하는 사람 있어야 되긴함 ㅇㅇ
-맞음. 자꾸 컨트롤 시간 늘어나는데 지구력 키울 수도 없으니까.
두 번째 사연도 적절하게 넘어가고.
태해란은 다음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어머니가 레기온 성 산하 혈맹에서 일하시는데, 어제 한국을 상대로 침략전이 열렸었다고 하시네요. 지금 범인은 레기온 성 지하 감옥에 있다고 하는데, 혼자서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강하길래 혼자 왔냐고 물어봤더니, 거의 1천 명 가까이 상대했다고 하네요. 참고로 사용 장비는 망치였습니다. 즉, 전사 클래스라는 건데…… 전사가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의외의 사연 내용에, 스튜디오 사람들의 신경이 집중되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예의 사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해란도 밤중에 접속하진 못했지만,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고.
주나무나 다른 게스트도 연줄을 통해서 건너들은 바가 있었다.
‘이번 침략전은 기록 열람 불가에, 내부 정보도 거의 알려주지 않았지.’
어차피 본 사람이 많아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레기온 성은 이 사실을 최대한 숨길 모양인 듯했다.
‘인상착의는 확실한데 말이야.’
주말 밤중에 접속한 사람들.
그들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해봤을 때, 침략을 시행한 사람은 러시아 대륙의 야나 이바노프였다.
‘인터넷 악플 때문에 한국에 침략전을 걸다니. 괴기스럽긴 하다만. 야나 이바노프라면 그럴 만도 하지.’
주나무는 야나 이바노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나무 같은 사람의 현실적 조언을 케케묵은 말이라며 싫어했다.
이번에 커뮤니티에서 야나를 욕하는 글이 많았으니.
아마, 많이 싫어했을 것이다.
주나무는 야나의 움직임을 대강 예상하면서 말했다.
“전사가 강하긴 합니다. 약한 건 아니죠. 다만 상대에게 붙는 게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잘 붙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봅니다.”
붙으면 강하다.
괜히 뚜벅이라는 멸칭이 붙는 게 아니니까.
-전사도 붙으면 강하긴 하지.
-근데 그거 하나하나 다 맞으면서 접근하기가 싫음 ㅋㅋㅋㅋ
-그렇긴 함. LOH에서도 그런데 린이지에서는? 어우…….
-그래서 다 위로 갈 때 탱전사 버리는 거지.
계속해서 올라가는 채팅창.
이제 고민 사연 코너도 거의 끝나간다.
태해란은 마지막으로 의견을 정리한 뒤, 고민 상담 코너를 마무리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봐요. 오늘은 모두 안녕~.”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말 잘 들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ㅅㄱㄹ
“후우, 잠시 쉴까요?”
“그래요.”
스튜디오 인원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계속 말을 하느라 목이 마른 태해란은 음료수를 마셨다.
“다음 코너는 장인 탐방 시간인가?”
옆에서 이유노가 말했다.
이유노의 정체를 아는 태해란은 그녀의 켄지 컨트롤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기대되네. 과연 어떤 장인들이 나올지…….”
“아직도 켄지 장인을 찾으세요?”
학창 시절에 켄지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수요 감소로 인해서 마지막 선택 때는 고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장인이라 부를 만한 수는 계속해서 감소하는 중이었다.
“해란아. 이럴 때일수록 켄지 장인이 빛을 발하는 거야. 모두가 방심하고 안 할 때 팅, 하고 튕겨내서 카운터를 날리는 거지.”
켄지의 검날 흘려내기는 린이지의 편입 과정에서 큰 상향이나 너프를 받지 않았다.
거의 그대로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워낙 어려운 스킬이니까.
이유노는 숨겨진 켄G무비 채널의 주인답게 매드무비에 대한 잡설을 이어나갔다.
“요즘 애들, 검날 흘려내기 반사율 평균이 40%도 안 나온다더라. 쯧쯧…… 이래서 요즘 애들은 안 되는 거야.”
“언니. 그런 올드한 말을…….”
“농담이야. 농담.”
이유노가 농담이라 넘겼지만, 그 표정은 진심이었다.
태해란은 대화 주제를 넘기고자 일전의 사연 내용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발견했던 사람은 야나가 아니던데요?”
“그러게. 완전 헛짚었어.”
보여주기식으로 무게를 올리는 짓.
그건 야나의 채널에서 나오는 방식인지라,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내가 발견했으니까. 사실상 침략전 빌미는 내가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진짜 스노우볼이 엄청나게 굴러가는 거 보니까 심장이 철렁하더라.”
이유노는 사림 성 소속이라서 레기온의 사정은 몰랐지만.
대충 자신이 발견한 게 도화선이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떡밥 굴린 애들이 잘못한 거죠.”
“그런가?”
핸드무비라는 채널에서 해명용으로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의심자는 채널 소속의 남자였다.
하지만 야나가 한국에 부계정이 없다는 내용이 공개되어도 커뮤니티에서의 조롱은 계속되었다.
“그런 걸 스포츠처럼 즐기는 사람이 꽤 많아요.”
태해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음료수를 목 뒤로 넘겼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룡이 데려왔던 사람도 신경 지구력이 뛰어났다고 그랬었지…….’
애초에 그런 티어로 게임고에 들어왔으니 특출난 편일 것이다.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그렇게 다짐한 태해란은 곧이어 다음 코너 진행을 시작했다.
* * *
그 무렵.
[저번에 찍은 불꽃 흘려내기는 내일 업로드할게.]
[네, 편한 대로 해주세요.]
김성현 대표는 야나의 부계가 아니라는 내용을 매드무비의 댓글에 첨부한 다음 업로드했었다.
이래야 조회 수가 잘 나온다면서 말이다.
‘뭐 실제로 잘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치느라 그라운드 제로 분량을 먼저 편집하게 되었고.
서리 불꽃 흘려내기는 내일 올라갈 예정이었다.
‘일단 오라고 했으니까. 여기부터 가야겠다.’
고대현은 문자를 마무리한 뒤, 가상현실에 접속했다.
띠링.
고대현은 A급 기사 대행증을 받기 위해 레기온 성에 접속했다.
저번처럼 성의 테라스 부근으로 스타트하자, 정태룡이 마중을 나왔다.
“A급 대행증은?”
“좀 기다려봐. A급은 내가 못 주고 성주가 줘야 하거든.”
“그래?”
대행증만 후딱 받고 가려던 고대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려도 상대에겐 잘 안 보인다는 게 이득이었다.
“금방 끝나지?”
“응, 지금 오는 중이셔.”
고대현은 정태룡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가족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일개 직원 아들이 회사 오너를 만나는 급이니까.
‘아빠가 레기온 성 소속이니까. 내가 잘되면 아빠도 좋은 거겠지?’
D급 대행증만 해도 공대원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하던데.
A급이면 어느 정도로 하실지 모르겠다.
저벅저벅.
얼마나 이동했을까.
대현은 얼마 후 성의 옥상(?) 부근에 도착했다.
헬기 착륙장처럼 넓은 지대가 성 위에 있었다.
“네가 고대현이구나.”
그때, 레기온 성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잉, 하고 바람이 불었다.
소리의 근원지로 마우스를 조정하니, 용을 타고 내려오는 레기온 성주가 보였다.
그렇다.
레기온 성주는 용을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네, 제가 고대현입니다.”
“그렇구나. 활약상은 잘 봤다. 야나를 앞에 두고 전혀 물러서지 않던데? 학생의 기백이 아니야.”
“에이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레기온 성주의 눈이 고대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드래곤의 날갯짓…… 바람이 강할 텐데 일체 미동도 없네.’
성주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태도.
‘어딘지 모르게 그와 닮았다.’
그녀는 짧게 웃고 나서 A급 대행증을 꺼냈다.
손에 푸른색 기운이 돌면서 원형으로 모인다.
“받으렴.”
정중한 자세를 취할 수 없기에, 다소 건방진 모습으로 대행증을 받았다.
고대현은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말로 호들갑을 떨었다.
“감사합니다. 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여기까지 오시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후후, 한 게 없다니 너만 할 수 있는 거란다.”
띠링.
[A급 기사 대행증을 받았습니다.]
[외부 노출 모드를 활성화하겠습니까?]
‘외부 노출 모드?’
[활성화됩니다.]
대현은 기사 대행증을 받자마자 활성화 시켰다.
그러자 신체의 여러 부분이 바뀌었다.
뭐랄까. 좀 더 어른 같아졌다.
“이건 도대체…….”
고대현이 마우스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하자 성주가 입을 열었다.
“정식 활동을 할 수 있는 아바타야. 성 밖으로 나갔을 때, 미성년자 모습으로 활보할 수는 없잖니.”
“아.”
회사에 들어왔으니 양복이라도 입으라는 것이었다.
‘키가 커지고 얼굴도 좀 바뀌었네. 다른 애들도 이런가?’
A급 기사 대행증을 받은 사람에는 태해란과 범단월, 조지아도 있었다.
전부 미리 이런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걸까.
고대현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야 각도를 조정할 때였다.
“어?”
문득 이상한 게 보였다.
[탑승] - F
“……?”
성주의 드래곤 위에 탑승 UI가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