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31화
적들은 기본적으로 탑을 신경 써야 했다. 맵 스크롤로 상황을 살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교전이 벌어졌을 때.
당장의 전투나 스킬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지도를 보는 것은 사치였다.
결국, 39반과의 계곡전은 트위스터의 빽도어를 통해 마무리되었다.
[-승리-]
치이익.
게임이 끝난 뒤.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캡슐 밖으로 나온 40반 아이들은 저마다 고대현을 칭찬했다.
“아까 독수리 여왕 생각보다 잘하는데? 나중에 원딜 해보는 거 어때?”
“아니, 원딜 보다는 정글이지. 보니까 돌아다니면서 맵리하는 거 잘하더니만.”
유금옥은 원딜, 이태원은 정글을 추천한다. 각자 자신이 맡은 라인이었다.
LOH는 다양한 라인 경험이 있으면 실력이 빨리 오르기에 추천했다.
“이 정도면 시험은 큰 걱정 없겠어. 39반이랑은 비등비등하거나 압도했잖아.”
허건섭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대륙에서 쓸 수 있는 코인 지급의 기준이 되는 주간 평가.
옆 반과 대전하는 특성상. 이대로 가면 학교 코인 정산을 잘 받을 게 뻔했다.
“그런데, 다들 정산 비율은 어떻게 정했어.”
때마침 이태원이 정산 비율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주간 평가에 따른 코인은, 개개인이 설정한 순위에 따라 지급 비율이 변동되는 방식이었다.
어차피 3순위를 정하는 것이니 큰 의미는 없지만, 각자 자신 있는 종목을 알 수 있었다.
“나는 1순위 레오히. 2가 언더 워치.”
“나도 똑같아.”
“난 1이 언더 워치고 2가 레오히.”
대부분 신경 지구력 소모가 크지 않은 종목을 선택했다.
1순위에 그라운드 제로가 있는 사람은 이하린이 유일했다. 마지막 차례가 되자, 고대현이 입을 열었다.
“난 레오히, 언더 워치, 그라운드 제로 순서대로야.”
“생각보다 정석적이네…….”
“아직 그라운드 제로 컨트롤을 못 봤긴 했는데, 그래도 레오히 정도는 1로 둘만 해.”
대현은 처음과 비교해 평가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입학하고 3판 정도 했을 시점에서 이 정도 변화라니.
아마, 레전드 오브 히어로라는 게임이 그만큼 복잡했기 때문이리라.
‘외울 챔피언이 많아서 사실상 난이도 원탑이긴 하지.’
같은 챔피언이라도 숙련도에 따라서 다른 챔피언으로 인식되곤 한다.
레오히는 단순한 스킬 상성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기에.
컨트롤을 보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느끼곤 하니까.
삐리링 삥-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쉬는 시간 종이 울린다. 오전 시간 1교시가 끝났다.
소환사의 계곡은 오래 끌어봤자 1시간 이상 끌기가 힘들었으므로.
대충 한 교시를 1시간으로 설정해두면 쉬는 시간과 잘 들어맞았다.
‘이참에 잠시 학교나 둘러볼까.’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고대현은 쉬는 시간을 맞아 교실 밖으로 향했다.
다른 애들은 교실에서 쉬겠다고 한다. 다음 판을 위해서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나 뭐라나.
레오히의 신경 지구력 소모가 다른 게임보다 덜하긴 해도,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이하린과 단둘이 나왔다.
대현은 뒤따라 나온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는 어디 가냐?”
“나도 학교 둘러보게.”
이하린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말이었다.
이근하의 말 때문에 붙어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학교 구조에 관심이 있는 건 그녀도 똑같았기에.
다시 문이 드르륵 탁하고 닫히는 것을 신호로 둘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는 상위반 방향으로 향했으니 오늘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거의 마지막이라 여겨졌던 40반의 뒤에도 공간은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함께, 옆 건물로 통하는 교량이 눈에 들어왔다.
정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본관 못지않은 크기…… 아니, 어쩌면 더 클지도.
“저긴 어디랑 연결된 거지?”
대현의 의문에, 이하린이 안내판을 가리켰다. ‘체력 단련실’이라고 쓰여있었다.
“우리도 역량 평가 기간 끝나면 본격적으로 저기서 할걸?”
“으음…… 몸 쓰는 건 싫은데.”
“뭐어? 신경 지구력도 높은 애가…… 거짓말하지 마.”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고.”
게임만 하느라 운동을 거의 안 했다.
가끔 게임 속에서 잘 움직인다고 현실에서 잘 싸우는 소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고대현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나마 된다면 이하린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문득 다른 사람들의 현실 전투력이 궁금해진다.
시선을 슬쩍 옮겼다.
이하린은 아직도 못 믿겠다는 눈치로 응시하는 중이었다. 대현은 화제 전환 겸,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경험을 입에 담았다.
“너, 현실에서도 강한 편이야? 그라운드 제로 때처럼 움직이는 거 여기서도 가능?”
“응? 어, 아마…… 되긴 될걸? 근데 근육이랑 신경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할 거야. 현실은 근육량이 더 적고, 피로도가 심하거든.”
약간의 차이.
그 정도에서 약간이면 조심해야 하겠는걸…….
이하린이 목을 꺾고 달려드는 장면을 현실에서 본다고 생각하니, 자동으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너도 무거운 거 메고 등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건 가능하지 않겠어? 그걸 떠올리면 대강 예상이 될 거야.”
아니.
전혀 예상되지 않는데.
그런 걸 현실에서 하는 건 사양이었다.
대현은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어?’
그러다가 돌연 불길한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게임 하는 학교에 왜 굳이 저런 큰 체육 시설을 만들었겠는가.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중에 게임 속에서 하던 것과 비슷한 훈련을 저기서 하는…… 건가?”
말을 마친 뒤, 고대현은 조심스레 이하린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와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말투로 쐐기를 박았다.
“올해부터 강화됐다는데, 나중에 수영도 하고 전술 훈련 비슷한 것도 할걸?”
이런.
듣고 있자니 저절로 미간이 좁혀진다.
그러고 보니 운동을 관장하는 소뇌를 발달시켜서 게임 내부 능력을 신장시킨다고 들었다.
‘그럼, 잠깐만 살펴보고 갈까…….’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 확인해보자.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넜다.
유리로 된 자동문을 한 차례 지나자 다양한 세트장이 보였다. 사격장이나 여러 가지 클라이밍 같은 구조물들.
그것들이 교량이 있는 층에서 한 번에 내려다보이게 건축되어 있었다.
‘상상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옆에서 감탄하는 이하린과 달리 대현은 앞으로 일어날 수업에 대해 잔뜩 긴장했다.
게임에서는 잘했던 놈이 여기서 못한다고 뭐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괜한 의심을 살까 염려되었다.
“신입생들이 여기는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그때였다.
한창 주변을 구경하고 있으니,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훤칠한 키에 몸이 균형 잡혀 있었다. 딱 봐도 뭔가 강해 보이는 이미지.
“그냥 궁금해서 구경 왔어요.”
“듣고 보니 신입생들도 다음 주부터는 체육 수업도 병행이었군.”
그는 흥미로운 눈길로 이하린과 고대현을 훑었다. 그러다가 턱 주변부를 매만지던 손을 떼면서 말했다.
“그래, 이왕 왔으니 뭐 하나 체험하고 갈래?”
“체험이요?”
체험이라는 말에 이하린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녀는 이 시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흥미가 넘치다 못해 입꼬리까지 올리고 있었다.
흠.
일단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체육 선생님.
그분이 우리를 한 장소로 안내했다.
마침내 멈춘 곳은 농구 코트 정도 크기의 홀로그램 훈련장이었다.
“이 내부에는 홀로그램으로 게임이 진행된다. 가상현실이랑은 또 다른 느낌이지. 이건 전체적으로 몸을 많이 쓰게 해서 감각을 높여준단다.”
현실의 몸이 무의식중의 한계를 만들어서, 가상현실의 싱크로율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 장치는 현실에서의 빠른 움직임을 단련시켜서, 그런 걸 최대한 완화해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이 끝나고, 이하린이 첫 타자로 들어갔다.
우우웅.
작동하는 소음과 함께.
그녀의 주변에 홀로그램 장비들이 생겨났다. 손에 검이 쥐어지고 왼쪽에 방패가 생긴다.
무기의 생성이 끝나자, 앞에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쿠워어어어!!
진짜 몬스터는 아니겠지만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이에 고대현이 잠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저거 나도 해야 하잖아? 하기 싫은데.’
삑!
알림음을 신호로 대현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장면은 이하린이 괴물의 촉수를 현란하게 피하는 모습이었다.
냉병기의 무게가 없는 홀로그램인지라, 그녀의 동작은 재빨랐다. 현실의 근육과 신경 차이를 고려해도 대단한 육체 기능이었다.
타탓!
그때.
사각을 노린 이하린이 매섭게 사이를 파고들었다. 홀로그램으로 된 검을 몬스터의 정중앙에 박아넣는다.
몬스터의 가슴팍에는 빨간색 보석이 있었는데.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 보석을 단번에 찌른 것이었다.
[클린 히트 – 95%]
그러자 몬스터가 사라지면서 뭔가 대단한 게 나타났다. 클린 히트 95. 대충 히트 지점을 잘 맞췄다는 뜻이겠지.
결과가 나오자 체육 선생님의 반응이 요란했다.
“오호, 대단하군. 이건 현 2학년들도 꽤 어려워하는 건데 말이지.”
처음에 신기한 걸 보여주는 삼촌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유능한 사람을 발견한 코치 느낌이다. 그는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학생은 스킬이 거의 없는 퓨어한 게임에서 강한 스타일이군.”
이하린의 티어는 훈련장에 입장함과 동시에 가상화면에 나타나 있었다.
티어는 골드 4.
아마 적응하지 못한 게임 하나가 있는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졸업하고 다른 대륙으로 서버 이전을 하면 잘되는데…….’
타 국가 대륙의 상황을 상기한 그가 말했다.
“학생, 노선을 한국 대륙이 아니라 서구권 대륙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만.”
체육 선생님의 말에 이하린이 짧게 미소 지었다. 이어서 입술을 뗐다.
그리고 많이 들어봤던 소리인 것처럼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따로 목표가 있어서.”
“흐음. 그럼 어쩔 수 없구나.”
이하린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더이상 권유하지 않는다.
다만 여지는 남겨뒀다. 마음이 바뀌면 언젠가 있을 수업에서 끝나고 말하라면서─.
“그럼, 옆에 있는 남학생. 너는 어떻게 할 건가? 해볼 텐가?”
고대현에게 손짓했다.
할 거면 오라는 의미였다.
당연하게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현은 싫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쟤, 저보다 잘해요.”
아니.
“호오.”
저으려고 했다.
그 전에 이하린이 특별 전형에서 쟤한테 졌다는 발언만 안 했다면 말이다.
“한 번 올라와 보렴. 어차피 나중에 하는 거니까 미리 해본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말하면 올라간다는 선택지 말고는 없다. 대현은 이내 체념했다.
‘이왕이면 다른 애들이 없을 때 미리 해봐야겠네…….’
“흐흐, 잘하고 와라.”
“너어…….”
이하린을 곁눈질로 째려본다.
‘도대체 내 실력이 뭐가 궁금하다고…….’
대현은 계단을 오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이왕 하는 김에 잘하면 더 좋으니까.
‘행동 보정이 있긴 했지만. 원래 세계에서 가상현실로 잘했었지. 그러니까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하면 되는 거야!’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두 다리가 검은색 바닥에 닿고.
우우웅.
손에 홀로그램 검이 생겨났다. 무게는 없고 형상만 있는 검. 예전에 가상현실 컨트롤을 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물론, 지금은 무기만 가볍고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무기는 가벼워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쒜엑!
그의 몸이 몬스터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