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29화
독수리 여왕을 고른 고대현은 생각했다.
‘맵이 넓어서, 로밍 가려면 독수리 여왕이 좋겠네.’
초반에는 각 라인에서 싸우겠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정글에서의 게릴라전이 많아질 것 같았다.
‘궁 찍고 내려가서 터트려야지.’
대현은 독수리 여왕의 궁극기 ‘독수리 탑승’을 통해 빠르게 라인을 이동할 생각이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속도 때문에 정글에서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위에서 보니까 최대 속도로 이동할 수 있겠어.’
대현은 화면 오른쪽 아래의 맵을 응시했다. 검은 실루엣으로 정글의 지형이 나타나 있었다. 이거라면 정글을 통과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가 내심 만족하고 있으니, 허건섭이 우려의 한 마디를 건넸다.
“너, 독수리 컨트롤 잘 할 수 있겠어? 그거 속도도 빠르고…… 백 텀블링도 해야 한다고!”
독수리 여왕의 공중 회전차기는 적을 순간적으로 밀쳐내고 슬로우를 가하며, 패시브인 약점 표식까지 남긴다. 기능으로만 보면 매우 좋은 스킬이다.
하지만.
‘그 대신 난이도 높은 스킬 동작을 구사해야 하지.’
허건섭의 눈길이 냉혹해졌다.
그냥 공중제비도 아니고 거의 날다시피 회전차기를 해야 한다. 어설픈 동작으로 하면 기능 한두 개가 빠지는 것은 기본.
“괜찮아. 이 정도야 뭐.”
그러나 대현은 걱정을 일축했다.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어차피 말해도 안 듣겠네.’
허건섭은 속으로 혀를 차고, 훈수는 여기까지 두기로 했다. 어차피 첫판이니 나중에 판별할 생각이었다.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게임이 시작되었다.
독수리 여왕
트위스터 페이트
마스터 우
붸인
누틸누스
VS
갤리오
센아
블러디이미르
사미러
킨드블루
독수리 여왕(고대현), 트위스터 페이트(허건섭), 붸인(유금옥), 마스터 우(이태원), 누틸누스(이하린)이 되었다.
우물에 있는 벽이 허물어지고 각자 위치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대현은 곧바로 탑을 향해 나아갔다.
잠시 타워 아래에 멈춰서 탑에 누가 올지 예측하고 있는데, 허건섭에게서 전음이 왔다.
“대현, 탑은 괜찮아? 맞라인은 누구?”
“음, 블러디이미르 아니면 갤리오겠지?”
“너무 키우지만 마. 특히 블러디는 크면 감당이 안 되거든.”
“오케이.”
[미니언이 생성되었습니다.]
미니언들이 생성되었다.
다져진 길로 미니언들이 쫄랑쫄랑 걸어온다. 대현은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맞라인을 응시했다.
‘블러디이미르네. 설마 지진 않겠지?’
블러디이미르는 탑과 미드에서 자주 쓰이는 AP챔피언으로, 흡혈 스킬을 때문에 라인 유지력이 좋은 챔프 중 하나다.
지금은 스킬이 눈에 띄게 강하진 않지만, 잘 크면 궁극기와 광범위 피 뿌리기를 통해 원활한 진형 파괴가 가능한 녀석이다.
‘하지만 그만큼 파일럿 차이가 크지. 일단 라인전 하면서 간 봐야겠다.’
대현은 미니언을 받아먹으며 상대 블러디 이미르의 컨트롤을 주시했다. 기본적인 움직임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쮸왑!
미니언의 피를 원격으로 빨아들이는 블러디. 얼마 지나지 않아 강화 흡혈 상태가 된 그가 흡혈 공격을 위해 다가온다.
‘그래도 나한테는 안되지.’
위에서 보기에 상대가 각을 본다는 게 잘 느껴졌다. 스텝에서부터 차이가 오니까.
쒜액!
실명을 날려서 거리를 벌렸다.
강화 흡혈 상태는 일시적이기에, 잠깐 물러나니 금세 해제되었다.
결국 그냥 두기도 아까운지 옆에 있는 미니언에 사용한다.
‘이제 내 차례군.’
흡혈이 빠진 블러디는 위험성이 낮다.
대현은 곧바로 따라붙어서 평타를 때렸다.
독수리 여왕의 패시브인 약점 노출 때문에 추가 물리 대미지가 들어간다.
이어서 블러디이미르가 광역 스킬인 피뿌리기를 차징하고 있을 때, 공중 회전차기로 스킬을 캔슬 시킨다.
그리고 바로 흡혈하지 못하게 실명과 평타를 적절히 섞어준다. 블러디의 피가 금세 절반으로 떨어졌다.
누가 봐도 완전히 독수리 여왕이 압도하고 있는 구도였다.
‘어차피 갱 올 사람도 없으니까 팍팍 밀어야지.’
대현은 라인전에서 봐줄 생각이 없었다. 부지런히 라인을 민 끝에, 블러디이미르는 타워 아래에서 미니언만 받아먹는 형국이 되었다.
‘블러디는 피 뿌리기랑 피 은신의 HP 소모가 커서 초반에 마음대로 못 움직이지.’
거의 유린하며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견제했다.
이쯤 되자, 저절로 학습됐는지 라인을 굳히고 앞으로 나오지 않는 블러디.
“왔다.”
그때 킨드블루가 탑에 갱을 왔다.
라인을 막 밀어놨으니 안 오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아오오~.
킨드블루가 울프독을 소환하고 폴짝폴짝 뛰어온다.
‘이럴 때는 정글부터 차근차근.’
타닥!
블러디는 합류하기까지 거리가 멀었기에, 킨드블루부터 공격했다. 공중 돌려차기와 실명 평타를 빠르게 섞어준다. 마지막으로 점화 까지거니, 킨드의 HP가 급격하게 감소했다.
‘흠, 아직 초반이라서 딜이 아쉽네.’
무리하면 킬을 따낼 수 있겠지만.
적당히 몸을 피했다. 킬을 따고 바로 블러디이미르에게 죽으면 곤란하니까.
“야. 탑 괜찮아?”
이태원의 놀란 소리가 들려온 것은.
탑에서 교전이 일어났다는 이하린의 브리핑이 들려온 다음이었다.
“어, 괜찮아. 킨드블루는 방금 내려갔어. 아마 집으로 귀환하고 있을 듯.”
“확인 완료.”
꿰액!
막 암석게를 베어 넘긴 이태원의 마스터 우가 미드로 향했다. 일단 팀 리더격인 미드를 풀어주는 게 우선이었기에.
‘트위스터가 예상보다 더 고전하네.’
미드는 한창 갤리오와 트위스터 페이트가 싸우고 있었는데. 갤리오 자체가 마방도 있고, 돌진 도발기도 있다 보니.
트위스터 페이트가 한 번 물리고 나서 꽤나 밀리고 있었다.
“나간다. 준비해.”
“알았어. 최대한 뒤로 뺄게.”
전음으로 말하고 준비한다.
미드 풀숲에 숨어있던 마스터 우가 적절한 순간에 갤리오에게 감마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갤리오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칼을 크게 휘두르며.
상대에게 빠져들 듯이 상반신을 기울이자.
삐빅.
[동작 구현 : 60%…….]
마스터 우의 신형이 일순 허공에서 자취를 감춘다. 갤리오를 향해서 순간이동 된다. 그 사이를 단편적인 마스터 우의 칼날 베기 동작이 메꾼다.
순간 지정 불가 상태로 변하며.
상대에게 딜을 할 수 있는 스킬인 감마 스트라이크.
‘제길 시야가……!’
그러나 고속으로 몸을 이동시키는 스킬이기에, 시야 처리가 곤란했다. 눈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돈다.
그래도.
그보다 먼저.
‘베어낸다.’
서걱─!!
마침내 허공에서 나타난 마스터 우.
그가 실체화됨과 동시에 추가 일격을 가하자 갤리오의 몸이 쓰러진다.
퍼스트 블러드!
[마스터 우-> 갤리오]
“후우, 다행히도 피가 낮아서 금방 처리했네.”
갤리오가 처치되고.
뒤에서 골드 카드 하나를 날려준 허건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고맙다.”
“적당히 밀고 가. 킨드블루 올지 모르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라인을 열심히 밀었다. 트위스터 페이트는 라인을 빨리 밀고 로밍을 가는 챔피언이다.
이를 위한 빠른 파밍과 레벨업은 필수였다.
라인을 밀고 집으로 복귀한 허건섭은 경보 와드와 양피지를 사고 미드로 왔다.
이번에는 도발 거리를 최대한 주지 않으며, 미니언을 정리했다. 6렙은 금세 달성되었다.
“이제 로밍가야지.”
트위스터 페이터의 궁극기인 운명의 눈. 이것을 쓰면 맵 전체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
-야야, 바텀에서 교전! 궁 지원 좀! 킨드블루랑 갤리오 다 왔어!
때마침 봇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유금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에 그가 맵 스크롤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 순간.
화르륵.
맵에 상대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트위스터 페이트의 손가락이 바텀의 한 장소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그곳으로 텔레포트 하겠다는 수인(手印)을 맺은 뒤, 그가 땅에 손바닥을 찍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쒜애애액-!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커지는 이상한 소리…… 아니.
‘이동 포식자?’
이동 포식자 스펠이 사용되는 소리였다. 허건섭은 누가 포식자 스펠을 들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 정체를 목격했다.
돌연 부쉬에서 나오는 독수리의 머리.
“독수리 여왕?”
어느새 6렙을 찍은 고대현이 미드에 도달했다. 이동 속도를 높이는 궁극기인 ‘독수리 탑승’과 이동 포식자를 사용한 그의 몸이 미드를 쌩하고 스쳐 지나간다.
‘저, 저렇게 빨리??’
보아하니 바텀으로 가는 게 틀림없다.
허건섭도 재빨리 궁극기의 시전 준비를 마치고 이동을 시작했다.
촤라락.
트위스터 페이트의 몸이 사라지고.
다시 바텀에 나타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허건섭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광경은, 킨드블루의 궁극기 ‘안식처’가 끝나갈 타이밍이었다.
촤라락.
“이때다!”
덱을 섞은 허건섭이 소매에서 골드카드를 꺼냈다.
스핏—!
그때였다.
카드를 날리는 속도보다도 빠른 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독수리 여왕이었다.
체공하던 독수리 여왕의 자태가 사뿐하게 킨드블루의 가슴팍을 밟았다.
‘톡’하고, 당연한 듯이, 아주 가볍게.
뒤로 밀려난 킨드블루의 몸이 순간 경직된다.
그 짧은 간격 사이.
땅에 착지한 독수리 여왕이 평타를 때리고, 실명을 날리고, 다시금 평타를 때렸다. 보는 사람이 뭔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처치!
[독수리 여왕 -> 킨드블루]
순식간에 킬이 나왔다.
트위스터 페이트는 카드 고르는 것도 잊고, 멍하니 독수리 여왕을 응시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가 바로 공중 회전차기라니…… 워낙 빨라서 동작을 연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끼루룩!
허건섭을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거대 독수리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였다.
그가 특별하게 뭘 하지도 않았는데, 봇의 상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저…….”
대현은 허건섭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독수리를 타고 다시 원래 정글로 향했다. 아까 왔을 때와 마찬가지의 빠른 속도였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생각했다.
‘나도 나중에 독수리 여왕이나 해볼까…….’
* * *
게임은 어느덧 중반부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밀리다니…….’
우물에서 살아난 킨드블루는 다시 정글로 향하며, 짧은 과거를 회상했다.
상대 탑이 아이언 2라고 해서 탑부터 갱을 갔다.
그런데 허탕만 치고 실패했다.
녀석의 동작 완성도가 예상외였기 때문이다.
‘나도 그 정도는 못 할 것 같은데…….’
킨드블루는 머리를 긁적였다.
의문 거리가 넘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결국 화는 탑의 블러디이미르에게 돌아갔다.
“너 탑 완전히 발라놓는다면서 탑 차이 뭐냐.”
“아, 그, 그게…….”
“그럴 거면 그냥 텔레포트 들지 왜 점화를 들어서 에휴…….”
일전의 봇 한타 대패.
그 원인은 블러디가 참전하지 않은 게 컸다. 탑에서 왕귀한다고 점화와 감전을 들고 갔는데.
어차피 미드인 갤리오의 합류 궁이 있어서 괜찮다는 게 블러디의 의견이었다.
“일단 아이템 어느 정도 뽑았으니까. 다음 한타 때 잘해볼게.”
“그래. 믿는다.”
팀원간의 전음 연락이 끝나가는 가운데, 킨드블루는 정글의 첫 길목에 발을 들였다. 이제 슬슬 스텍을 쌓아야 한다.
그녀는 아이템 벨트에 있는 와드볼을 수풀에 던졌다. 그러자 와드에 있는 발광석이 빛나면서 주변을 밝힌다.
‘혹시 와딩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킨드블루가 감지형 와드볼을 꺼낼 때였다. 귓가에서 팀원들의 전음이 들려온다.
“엇? 바, 방금 지나간 거 뭐야?! 뭐가 저렇게 빨라?”
갤리오의 통신에서.
“응? 뭐가 지나갔다고 그…… 꺗!”
곧바로 사미러의 통신.
이어서—.
Pyorororong~
“──??”
귓가에 속도 증가 공격 아이템, 아유무의 요령검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싸늘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쌈과 동시에. 수풀 사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고속으로 움직였다.
“으갹!”
킨드블루는 놀라서 뒤로 넘어갔다.
아니.
누군가에게 복부를 발로 차였다.
몸이 밀려난다.
“하아……?”
멍청한 소리가 입가에서 새어 나온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시야가 검게 변했다.
‘설마……?’
드문드문 보이는 빛의 틈새 사이로, 희미한 실루엣이 보인다.
시선이 멈춘 곳.
석궁을 거머쥔 독수리 여왕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