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23화
“졌다고?”
가상의 공간.
그라운드 제로 사설 방에서, 1대 1일 겨루던 이근희의 눈이 일순 커졌다.
“네가 못하는 레전드 오브 히어로로 하다가 진 거 맞지?”
“아니. 그라운드 제로로.”
방향을 전환하며 몸을 피하던 이하린이 말했다.
“거의 반 진심이었는데 졌다니까.”
휘리릭.
허리춤에서 정글칼을 꺼낸 다음 휘두른다. 이근희는 이하린의 손등을 가격해서 이를 날려버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사격 연습을 했어야지. 붙는 거로는 한계가 명확해.”
이하린을 게임고에 보낸 이유는 그녀의 능력 향상을 위함이었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있으니까.
‘거길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 큰 두각을 못 드러내고 있으니 원…….’
싱크로율은 전체적으로 좋은 편이지만.
이하린은 거기 하나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나머지가 취약했다.
여러 컨트롤 조합이라던가.
운영이라던가 하는 것들.
땡그랑.
그때.
날아갔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으로 대련은 종료.
주먹을 거둔 이근희가 말했다.
“너, 레전드 오브 히어로도 연습하고 있지?”
“조, 조금……?”
“많이 해라.”
레전드 오브 히어로는 그라운드 제로와 다르게 전체적인 스킬 동작 완성도가 중요했다.
레전드 오브 히오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킬의 인과관계가 우선시 되니까.
결국, 그 스킬에 맞는 빠른 대응을 하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린이지에서 상대방의 스킬에 대응할 때 필요한 숙달 과정이었다.
“네 힘이면 충분히 가능해.”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힘든데…….”
이하린의 입이 삐죽 나왔다.
레오히는 어떤 체술을 취하든 간에, 그게 스킬 시전 동작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평타마저도 평타 동작을 취하지 않으면, 모션 캔슬이 되어버린다.
즉, 열심히 움직이는 게 의미가 없다는 소리.
이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체술 동작이 나와서, 적절한 방어 스킬을 취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리미터 해제의 부작용 중 하나로 보였다.
‘내가 제대로 관리를 못 해서…….’
이근희는 측은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하린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헤헤 웃었다.
“잘하는 친구랑 해보렴. 그럼 실력이 금방 느니까. 아…… 근데 친구는 좀 만들었니? 학교 분위기는 어때.”
“음…… 별로야.”
이하린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특히 임상배 위주로.
“…….”
그러자 이근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곧장 누가 우리 딸한테 그랬냐며 쳐들어갈 기세였다.
‘앗, 괜히 말한 듯한 기분이…….’
엄마가 학교생활에 신경 쓰면 곤란하니까. 이하린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화제 전환 거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걔가 있었지.’
“오늘 접촉해봤어요.”
“오, 그래?”
이근희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딸의 말에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고?”
“응.”
그로기 상태까지 몰아붙일 정도면.
같은 비술 사용자 일 줄 알았는데…….
고민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녀석. 티어는 어떻게 되는데?”
“잠깐만요.”
어차피 말로 해서는 못 믿을 것이다.
또 설명하긴 귀찮았으므로.
이하린은 자신의 친구 목록을 펼쳐서 보여줬다.
“이건…….”
이근희의 시선이 멈춘 곳.
아이언 2라는 티어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대현은 일어나서 씻고 나갈 준비를 마무리했다.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엘리베이터.
계단.
복도.
문.
여기까지는 어제와 똑같은 일과다.
그나마 다른 부분이 있다면.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옆에 한 명이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
어제는 없던 이하린이 아침을 먹으러 와있었다.
“응, 안 먹으면 배고프니까.”
상반신을 숙이고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린 채 고민하는 이하린.
대현은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먼저 결제하기로 했다.
삑.
무인 주문기에 지문을 대자 결제가 완료된다. 상품의 가격을 통해 가치를 가늠해본다.
‘1골드가 만 원 정도…… 대략 주당 10만 원이군.’
결제하고 고개를 돌리니, 이하린이 머뭇거리다가 메뉴 하나를 고른다.
간단한 빵과 스프만 나오는 기본식이었다.
삑.
그녀가 결제하자 화면에 잔액이 나타났다.
낮은 금액이다.
“벌써 어디에 쓴 거야? 내 절반밖에 없네.”
먼저 말을 걸 생각은 없었지만, 걸었다.
이하린은 뭔가 친근감이 가는 타입이랄까. 시험을 같이 통과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 그게…….”
이하린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군 죽였다고…… 감점으로 이만큼 준대.”
“아.”
정산 시스템은 학생들의 팀워크를 통제하기 위함도 있는 모양이었다.
음식을 받은 대현과 이하린은 창가 쪽에 앉았다. 마침 구름이 햇빛을 가려준다.
“오, 아침 생각보다 잘 나오는구나.”
이하린이 대현의 식판을 보면서 말했다. 아침부터 호사스러운 돈까스 정식과 양이 부족해 보이는 기본식. 한 테이블에 놓고 보니 차이가 확연했다.
“내 것 먹고 싶으면 좀 먹어.”
“진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다. 이하린은 사양하지 않고 포크로 돈까스를 집었다.
그리고 입가로 가져간 다음 우적우적 씹었다. 이리저리 음미하다가 음식물을 넘긴 그녀가 말했다.
“네가 날 이긴 이유가 여기 있었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침부터 이런 걸 먹으면 어쩔 수 없지.”
뭐야.
설마 진 이유를.
“그때 네가 죽은 이유가 아침을 안 먹어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마도?”
태연하게 말하는 이하린.
무슨 자신감이지? 대현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하지만 마지막 움직임을 떠올리자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동작 자체는 엄청 빨랐으니 말이다.
‘쟤도 총을 들었으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쓰러지는 건 나였겠지…….’
본체가 흙에 맞지 않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른 애들이었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물을 마신 대현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던 중.
문득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너, 어제 내 가슴은 왜 만졌냐.”
“푸흡—.”
갑자기 숨이 턱 막힌 이하린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말을 더듬거린다.
“누가? 내가? 언제?”
“…….”
얻어먹었는데도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간단하게 운동량 체크라면서 넘겼으면 이해했을 것을.
괜히 더 궁금해지게 만든다.
‘그래도 아직 캐물을 사이는 아니니까…….’
대현은 의문을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솟아난 궁금증을 완전히 접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식당 바깥에 있는 신기한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면 사격장처럼 보이는데.
그곳에서 다른 학년들이 서로 내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게 뭐지?’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이하린이 대현의 의문에 답해준다.
“홀로그램 사격장이네.”
“홀로그램 사격장?”
대현의 된장국을 한 차례 들이킨 이하린이 입가를 닦고 말을 이었다.
“응, 소리랑 무게, 반동까지 구현한 사격장이야. 총알은 궤적 계산으로 스크린에 표시되는 방식이고.”
요컨대 첨단화된 비살상 사격장이라는 것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걸 만들었네.’
대현은 창밖의 시설을 유심히 관찰했다. 모형 브스스를 든 사람 한 명이 1사로에 섰다.
그리고 견착한 뒤 표적을 향해서 격발했다. 총성은 아예 들리지 않았다.
다만, 총이 살짝 들리면서 반동을 표현했다.
저 정도면 해볼 만하겠네.
안 그래도 매일 PC 모드로 한 탓에 감이 떨어지면 어쩌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대현은 식판을 정리한 뒤 사격장으로 향했다.
이하린도 그의 뒤를 따랐다.
“너도 해보게?”
“응, 궁금하거든. 들어는 봤는데, 보는 건 처음이라서.”
사격장은 전체적으로 개방된 구조였다. 아마 모든 건물 내의 창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햇빛 아래로 표적지와 여러 가지 센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부터 해볼래!”
허용된 사로가 적었기에 돌아가면서 해야됐다. 대현은 그녀가 하는 것을 먼저 보기로 했다.
이하린은 골전도 헤드셋을 끼고 사로에 섰다.
이게 실제 소리를 낮춰서 들려준다는 설명을 이어나가면서.
삐익-!
쐈다.
모형총에 내장된 탭틱 엔진의 자체 반동과 진동.
전방에 구비된 증강현실 시스템이 홀로그램 총알의 궤적을 구현한다.
총알은 그대로 날아가서 표적지의 오른쪽 아래에 박혔다.
곧이어 전광판에 점수가 나타났다.
[66]
66, 반타작을 조금 넘었다.
“오, 성능 확실하네.”
점수판을 본 고대현이 감탄했다.
순전 기능에 감탄한 것이었지만, 이하린은 비꼼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뭐라고?”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네 차례야.”
그는 얼떨결에 이하린이 건넨 총을 받았다.
흔히들 브스스라 부르는 총기였다.
무게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걸까.
꽤 묵직하다.
“무겁네.”
대현은 중얼거리며 1사로에 자리한 뒤, 표적지를 바라봤다.
‘이게 다른 애들이 느끼는 감각이로군…….’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날것의 무게였다.
과연 잘 맞출 수 있을까?
고대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손가락에 힘을 줘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반동이 일면서, 홀로그램 총알이 발사되었다.
삐익—!
탕-!
골전도 헤드셋으로 총성이 전달된다.
생각보다 크다.
근데 그거 보다…….
‘아, 실수했다.’
총알이 총구를 떠나자마자, 감으로 눈치챘다.
이건 완전히 안된다.
예상보다 탭틱 엔진 반동이 큰 탓에 각도가 엇나갔다.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점수가 나타났다.
[52]
“오, 성능 확실하고만.”
뒤에서 있던 이하린이 입가를 가리고 웃는다.
“뭐가 확실해. 나 이거보단 잘하거든?”
오랜만에 해서 적응이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이하린은 일단 결과를 굳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곧장 총을 반납하고 출구로 간다.
“야, 기다려.”
고대현도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가는 길.
교정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학생 식당의 창가 부근.
1학년과 그 선배들이 자리를 붙어 앉았다.
“어제의 친선 대항전, 재미있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각 학년 상위권의 조합.
아직 어색하기만 한 모임이기에, 통상적인 이야기가 오간다.
3학년 1군이 임상배에게 말했다.
“너 레전드 오브 히어로에서 라인 어디 간다고 그랬지?”
“탑입니다, 선배님.”
“오오, 탑 좋지.”
‘그동안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물어보네. 오오는 무슨, 말을 듣는 거야 마는 거야??’
임상배는 식탁 아래에 있던 손을 말아쥐었다가 이내 폈다. 불편한 표정이 드러나면 안 된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게 집중했다.
“주 챔피언은?”
“류시안입니다.”
“호오. 그럼 취미픽은?”
“……데리오스입니다.”
“오호—.”
설마 같은 챔피언 사용자인가?
데리오스는 서로 특유의 유대감을 느끼고는 한다. 그러니 이대로 물꼬를 트기만 한다면—.
“난 탑 모티 대위를 즐겨 해. 얼마 전에도 데리오스 하나를 찢었는데……. 네 데리오스는 어떨지 궁금하네.”
‘이런, 망할 모티충이었군!!’
임상배의 미간이 좁혀졌다.
피도끼 회전의 미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걸 기대했는데.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게다가 앞에 있는 이 선배.
모티 대위로 탑 라이너를 찢는 것이 취미인 것 같다. 표정이 그리 알려주고 있었다.
“언제 한 번 탑에서 보자고.”
“아, 네에…….”
잘하는 모티 대위는 까다롭다.
이속증가 스펠과 발걸음 교체기를 들면 되는 문제긴 하다만.
역시 라인을 당기고 갱을 부를 확률이 높겠지.
“표정이 안 좋네? 아침 메뉴가 별로인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햇살이 눈 부셔서 그랬습니다.”
솔직히 햇빛이 강하진 않았다.
‘이러면 둘러대는 게 너무 티 나는데…….’
임상배는 빠르게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유리창 밖의 사격장을 발견했다. 고대현이 사격을 하고 있었다. 같은 학교 시절일 때는 정말 지지리도 못했었지.
‘지금은 좀 달라졌나?’
삑.
그때.
아주 작지만, 특징적인 소리에.
휙.
선배들의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매일매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기에 나온 결과였다.
‘??’
보고 있던 임상배는 소름이 돋았다.
식사 도중이라서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텐데.
“흠, 못하네.”
“그러게, 52라니.”
“저런 애는 다른 거로 극복해야지, 아니면 짐이나 들던가.”
‘역시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같은 고대현의 점수는 그렇다 치고.
순간 모티 대위로 인해 판단이 흐려진 것 같았다. 하도 실명을 당했더니, 이름만 들어도 반응이 오곤 하니까.
‘다시 잘해보자.’
그는 대화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데리오스라는 챔피언 자체를 무시하는 발언이 이어졌지만.
임상배는 굳이 토를 달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지금은 맞장구만 치는 게 중요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