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Epilogue.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
바일사르의 수도에서 일어난 벨커스의 반란을 진압한 지 2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은, 이후의 대륙의 정세,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벨커스의 몰락, 알프라이아와 바일사르의 정권교체, 교국과 잔스카르의 전면 개방. 루브라의 독립까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정세와 지난 기간 동안 이어진 종족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바일사르와 알프라이아는 정전협정을 체결.
이후 국가 간 전면전은 씨를 감췄지만, 전쟁의 불씨는 계속해서 이 땅에 남아있었다.
더욱 복잡해진 국경선은 수많은 소규모 갈등을 초래했고, 설상가상으로 하이람의 혈청 제조법이 유출되며 불법 무장단체, 괴뢰집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잔스카르를 중심으로 한 다섯 국가는 평화유지군을 구성해 대륙 곳곳의 분쟁지역에 콜로서스와 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투입된 교전지역을 통틀어 기갑전선이라고 부르게 된다.
***
“켈트와 알프라이아 접경지대에 무장 콜로서스 단체?”
제 87 평화유지군 기갑사단, ‘그레이 하운드’ 본부.
눈앞에 있는 서류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한 것은 주둔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단장, 단델 클라우스였다.
“혈청 주사기가 다수 발견됐어요. 거기에 지도자로 보이는 인물이 두르고 있는 망토에 이런 게….”
“벨커스의 문양이군.”
아이린이 건넨 서류에 첨부된 사진을 본 단델은 턱을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겼다.
“베르카 영지에서 도망친 벨커스의 방계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산 속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군.”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자, 아이린의 양 옆에 도열한 기사들이 보충하듯이 입을 열었다.
“주요 거점들은 전부 제압했지만, 가장 중요한 주동자를 놓쳤습니다. 아마 수정도시 쪽으로 향한 듯 합니다만.”
“알겠어. 켈트 쪽에 수사 협조 넣을 테니, 너희는 복귀해서 콜로서스 점검해 둬.”
“알겠습니다.”
짧은 문답과 함께 두 기사가 방문을 나서고, 아이린 또한 그 뒤를 이어 같이 나가려고 했다.
“아, 아이린. 잠깐….”
그러나 황급히 그녀를 불러세운 단델의 목소리에 아이린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 임무가 끝나고 다음 휴가 때…. 혹시 일정이…. 그….”
자기가 생각해도 진부한 방식이라는 것을 아는지, 계속해서 말을 더듬는 것을 보며 아이린은 작게 한숨 쉬었다.
훈련이나 교육 때는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다는 철혈교관인 양반이, 왜 자기 앞에만 서면 20살 초임 소위로 돌변하는지.
“아~ 진짜 감질나서.”
참다못해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성큼성큼 단델의 책상에 다가가 그가 아래에 감추고 있던 연극 티켓 두 장 중 하나를 빼앗아들었다.
“다음 주 수요일. 바일사르 81번가 시계탑 앞! 알겠죠?!”
“네, 넵!”
무심코 나온 존댓말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아이린은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아이린 단장님 뭔 일 있습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나가시던….”
뒤이어 루브라 해안선의 이상징후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들어온 대원들은 집무실을 나선 아이린과 똑같이 벌게진 단델의 얼굴을 보며 일제히 볼멘소리를 냈다.
“아~ 진짜 군 생활 할 맛 안나네.”
“우리는 뺑이 치는데 윗대가리는 연애질이라니.”
그렇게 말하자 단델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그들을 집무실 밖으로 쫓아냈다.
“보고는 안받습니까?!”
“이미 다 파악했어! 이따가 들어오던가!”
끝까지 자신을 놀려대는 대원들을 쫒아낸 단델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아, 벌써 신병 면담 시간이네.”
황급히 집무실에 걸린 정복을 차려입은 단델은 책상 한 편에 장식된 베르쿠트 백작의 인장을 보며 작게 웃어보였다.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 단델은 등을 돌려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아카데미 출신, 리프 로렌츠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했다면, 제국 사관학교 입학권이 주어졌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우리 부대에 지원한 이유가 있나?”
면접장.
단델을 포함한 두 명의 고참병과 교관 둘을 마주본 소년은 주먹을 꽉 쥐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르쿠트 백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뭐?”
그 말에 몇몇 대원들이 표정을 굳혔지만, 단델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그에게 되물었다.
“이유를 들어도 되겠나?”
그렇게 말하자 마른침을 삼킨 리프 로렌츠는 단델을 향해 말했다.
“제 주군이신 케인 경을 죽인 자가, 저와 제 가족들을 계속해서 후원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로렌츠 사람들까지도요!”
그 말에 대원들이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케인 경의 죽음까지도요! 전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리프 로렌츠의 말을 들으며 단델은 미소 지었다.
“역시, 우리 부대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구나.”
***
- 오늘의 국제 뉴스입니다. 잔스카르 주최 5개국 연맹의 초대 의장으로 당선된 클라우스 반 바일사르 전하께서는 이후 분쟁 지역에 대한 방비 강화를….
“허, 결국 저기 가서 한 자리 해 처먹는구만.”
독립국으로 거듭난 루브라의 야시장.
술에 거나하게 취한 제국인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으며 코웃음을 치며 잔을 들이켰다.
“벨커스 뒤집고 황권에는 관심 없네 뭐네 하더니, 결국 저 인간이 황족이니 귀족이니 다 작살낸 것 아녀?!”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좀 나아졌잖아? 이번에 의회인지 뭔지도 생긴다는데.”
“지랄! 저 높으신 분들이 우리 같은 것들 신경이나 쓰겠어?! 잠깐 빨다가 뱉어버리겠지 뭐!”
벨커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클라우스는 순식간에 제국 정계의 주류로 떠올랐다.
에드윌 백작과 그의 합의로 인해 공직 진출에 부여되던 귀족과 황족의 특권은 철폐되었고, 제국 역사상 최초의 국민 의회가 발족하며, 황제가 없는 바일사르 제국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거, 여기서 황자님 욕은 하지 마셔.”
다른 테이블에서 잔을 홀짝이던 남자가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자 흠칫한 제국인들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짝에서는 어떨지 모르는데, 여기서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알지?”
그 말에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국 황자의 신분으로 식민지를 안정시키고, 전권을 해방전선에게 위임한 클라우스 황자는 ‘루브라 황자’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곳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뭘 그렇게 겁을 주고 그러나? 이런 시국에 루브라를 찾아온 제국 손님인데. 그리 박하게 대하지는 말게.”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낮의 사내가 그들에게 두 잔의 술과 안주를 건넸다.
“오, 냄새 좋은데?”
“이게 뭐요?”
공짜 음식이라며 내놓은 내장 볶음을 보며 군침을 흘린 두 제국인이 그렇게 말하자 흐뭇하게 그들을 보던 듄켈이 입을 열었다.
“베르쿠트 백작이 식민지에서 먹었던 음식이지. 이곳 사람들에겐 친숙해.”
베르쿠트.
그 말을 들은 제국인들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음식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이걸 베르쿠트 백작이?”
“혹시 이거, 재료가 사람인가?”
그렇게 말하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듄켈이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그 자는 제국에서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그,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 켈트에서 그 작자를 봤다고….”
“예끼! 닮은 사람이겠지! 하이람과 함께 자폭했다며?!”
“시체가 안나왔잖은가! 혹시 모르지….”
그렇게 말하던 그들은 이내 소름이 돋는다는 듯 넌더리를 냈다.
“왜 그 이름만 나오면 벌벌 떠는 겐가? 벨커스가 제국을 장악하려는 것도 막았고, 이젠 아예 죽은 사람이지 않나?”
듄켈이 그렇게 묻자 손을 내저은 제국인들이 일제히 반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작자가 죽인 제국인만 몇인데!”
“형벌부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벨커스가 뒤에서 그런 일을 꾸몄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로렌 영지 사람들은 뭐 그리 좋다고 그 작자를 떠받드는지 원….”
그렇게 말하는 제국인들은 곧이어 더 생각하기도 싫다며 황급히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근데, 진짜 있다면 뭐 하고 살까?”
“그러게.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인데, 어디 여행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듄켈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꽃은 다 놓고 왔어?”
“어.”
케르단 전선기지의 공터.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전선기지로써의 역할을 잃어버린 이 곳은 수풀이 무성한 빈 땅이 되어버렸고.
일렬로 늘어선 이름 없는 묘비들만이 이전에 이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2년이 지나서야 묘지를 만들어주는군.”
“단델에게도 편지 해놨어. 나중에 찾아오겠대.”
그렇게 말한 렌은 얀을 향해 편지 무더기를 내보였다.
“그리고 이게 너한테 온 것들.”
그러자 얀은 피식 웃음 지으며 한 편에 걸터앉아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훈련 이야기. 단델과 아이린 사이에 흐르는 기류. 전역한 대원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 결혼식 청첩장에, 훈련 좀 봐달라는 편지까지.
대원들 한 명 한 명이 자신에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사이, 얀의 웃음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여전하네. 하나같이 나사 빠진 놈들 투성이야.”
“동감.”
그렇게 말하며 쿡쿡 웃어 보이는 얀은 지금까지의 그와는 다른 사람인 듯 했다.
만면에 가득한 웃음.
곳곳에서 베르쿠트 백작을 봤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모두 헛소리로 치부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지금 나한테 재입대를 하라는 말이야?”
렌의 농담을 맞받아친 얀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셔츠에 갈색 바지 차림.
정복도, 군복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는 순박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어. 굳이 있다면, 아직 남아있는 유산들을 찾아서 파괴하는 것 정도지.”
알카트라즈가 붕괴하는 것과 동시에, 전력화 할 수 있는 인류의 유산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대인의 유산을 갈구한다.
기술을 찾아내어 악용하고, 결국 괴물이 되어갔다.
그것들을 마저 처리하는 것이, 지금의 얀이 정한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손님-!”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드워프 한 명이 다가오며 얀을 향해 손짓했다.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알프라이아 북쪽 숲인데, 거기에 고대인의 공사장비가 있다는데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인 얀은 목소리를 높혀 그에게 말했다.
“바로 출발하죠!”
그렇게 말한 얀은 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여기서 노닥거릴 수는 없지?”
그 말을 들은 렌은 그와 마주 웃으며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훠이- 훠어이-!”
이윽고 수십 명의 드워프들과 호그들로 이루어진 드워프 유랑단이 서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검은 남자와 새하얀 소녀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유랑단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베르쿠트 백작의 실종과 함께,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 대륙 역사에 창조주의 유물이 나타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었다.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