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전선에서 살아가는 법-184화 (184/186)

184. 라그나로크.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는 것이냐-!”

눈을 크게 뜬 하이람이 콜로서스에 탄 얀을 향해 일갈했다.

얀이 벨커스의 몰락을 원한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 방법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치부를 드러내 공격하는 것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벨커스가 이면에 숨겨 온 모든 기술들을 전 대륙에 풀어버렸다.

마력을 담은 피.

그것을 인간에게 주입하여 마력을 지니지 못한 자를 마력 보유자로 만드는 기술.

심지어는 얀과 같은 계승자의 피 마저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대륙의 모든 존재들에게 뿌려버린 것이다.

“아무 자격 없는 자들이 이런 힘을 손에 넣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나?!”

당장은 이 진위여부에 대한 왈가왈부가 오가겠지만, 하이람은 이 곳에 적힌 기술이 진짜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동안 연구해온 것.

아니, 그 보다도 더 발달된 혈청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는 내용들이었다.

- 그렇겠지.

담담히 하이람의 일가을 받아낸 얀의 얼굴은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 너와 네 가문 같은 것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오겠지.

힘은 야망에 불을 지피고, 그것은 세상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 제 것도 아닌 힘에 미쳐 사방천지를 좀먹어대는 구더기 새끼들.

그 말에 하이람의 이마에 실핏줄이 올라왔다.

“구더기라고?”

하이람 벨커스.

몰락귀족이었던 변방의 벨커스 가문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하이람은 그런 자신의 인생을 구더기라 부르는 얀의 말에 이를 갈아붙였다.

“어디에서 나온 줄도 모를 쓰레기가, 감히 나와 내 가문의 대의를-!”

- 그 대의를 위해 같은 인간의 피를 빨아마시고, 그 시체를 알프라이아에 팔아넘겼지.

콜로서스의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너진 회의장 곳곳에 숨어 있는 다른 귀족들과 기자들에게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하이람 공이, 이런…!”

“빨리 기록해! 어떻게 되든 일단 보도만 하면…!”

“벨커스의 눈 밖에 나자는 말입니까?!”

“이 병신아,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눈앞에 나타난 얀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내뱉은 정보.

그리고 대륙 전체에 뿌려진 증거와 자신의 비밀들.

지금 회의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정당성이 박살난 상황.

사면초가였다.

“이게, 네 계획이야?”

글레이프니르의 조종석 뒤편에 앉은 렌이 그렇게 묻자 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람과 그 관련자들을 당장 없애버린다면 저 녀석은 영웅, 위인, 혹은 순교자가 되겠지.”

이 정보를 제국에 풀어놓기 전, 하이람에 대한 제국인들의 평가가 그러했다.

“그러니 내가 직접 그 명예를 잡고 끌어내린다. 제국의 명예로운 기사 가문이 아닌, 힘에 미쳐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살인자 집단으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네 위치 역시….”

얀이 대륙에 뿌린 정보는 단순히 마력을 담은 피를 만드는 법 만이 아니었다.

고대인의 유산을 작동시키는 창조주의 피.

얀과 같은 계승자의 피를 만들어내는 제조법 또한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알카트라즈에 있던 대부분의 인류 병기들은 파괴했어. 악용될 여지는 비교적 적겠지.”

“그들 사회에 끼칠 영향은 그보다 더욱 클텐데.”

그 말에 얀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을 만들어내고, 자신들에 의해 멸망한 옛 인류.

이 땅에 살고있는 자들은 그런 일류를 신격화하고, 그에 대한 신앙을 계속해서 쌓아나갔다.

문화, 종교, 사상.

그들이 그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그들이 믿어왔던 모든 권위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고대인의 기술을 통해, 벨커스는 제국 최대의 기사가문이 되었지.”

그가 연구한 피에만 반응하고, 그들만이 독점해오던 미지의 기술.

그렇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신비로운 창조주의 기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간부터, 피와 고대인의 유산을 이용하는 이들은 한낱 테러리스트들에 불과하게 돼.”

그와 동시에 얀 또한 창조주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자가 아닌,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이다!”

자신의 눈앞에 놓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하이람은 그렇게 외치며 얀의 글레이프니르를 노려보았다.

“이 곳을 장악하고, 네놈이 뿌린 정보가 엉터리라고 공표한다면, 어떻게든 틀어막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한 하이람은 오른 손을 들어 바깥에서 대기중인 기사들에게 수신호했다.

쿵-! 쿵-!

기존에 얀을 겨누고 있던 다른 콜로서스들 이외에, 수십 대의 콜로서스들이 차례로 나타나 글레이프니르가 있는 회의장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지간히도 많이 데려왔군!”

“베르카 영지에 있던 기사들까지 전부 동원한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던 클라우스 황자가 침음성을 내뱉다, 그것을 들은 하이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놈이 아무리 고대인의 유산을 휘두른다 해도, 이 콜로서스들을 전부 당해낼 수는 없겠지!”

그 말을 들은 얀은 자신을 둘러싼 콜로서스들을 바라보았다.

- 거기까지다, 베르쿠트 백작!

- 비델 경의 원수를 이 자리에서 되갚아주마!

- 네놈을 죽이고, 벨커스의 위명을 온 대륙에…!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사들의 악담에 얀은 흡족한 듯이 웃었다.

-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겠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전의를 다진 기사들이 일제히 글레이프니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고 했다.

쿵-!

발소리.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발소리에 돌격을 준비하던 기사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쿵-!

이윽고 한 번 더.

고대인의 기술로 만들어진 콜로서스를 탄 벨커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기체 모니터에 표시되는 붉은 점들을 보며 눈을 부릎떴다.

- 배, 백작님!?

- 수도 외곽에서, 적 콜로서스 집단이…!

하나, 둘.

점점 늘어나는 붉은 점들은 이윽고 모니터의 한 둘레를 완전히 덮어 벨커스의 기사들이 점거한 바일사르를 완전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 그래서 아는 사람들을 좀 불러왔는데, 이 정도면 되겠나?

얀의 그 한마디와 함께 제국 수도 바일사르를 둘러싼 곳곳에서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피유우우우-!

첫 번째 폭발과 함께 떠오른 것은 새하얀 상징이 새겨진 순백색 깃발.

- 손님의 부름에 따라, 성전을 개시한다-!

켈트 교국의 성기사단이 바일사르의 북쪽을 포위했다.

삐이이이-!

두 번째 폭발과 함께 떠오른 것은 진녹색의 위장막을 두른 콜로서스와, 그들을 호위하는 수많은 장갑기병대.

- 동지들이여! 비스크 10만 영지민들의 피를 되값을 때가 왔다-!

바일사르의 동문을 향해 들이닥치고 있는 것은 듄켈이 이끄는 바일사르 해방군이었다.

치이이익-!

서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군대는 콜로서스가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계들의 행진이었다.

“이 시간부로 잔스카르는 계승자와의 계약에 따라, 장벽을 깨고 벨커스를 척결하겠습니다.”

거미와 같은 다각전차. 그리고 궤도차량들. 루미가 관리하는 잔스카르의 원정대였다.

“기사들은 뭣들 하느냐?! 중요 인물들을 검거하고, 성벽을 지켜라! 침략자들에게서 이 제국을…!”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은 하이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카앙-!

하이람의 명령을 받고 회의장으로 난입하려는 콜로서스의 장갑판을 무엇인가가 쏴 맞춰 막아냈다.

쿵-!

이윽고 하나 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카만 카발리들.

그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의 87독립중대원들이 하늘에서 일제히 강하하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 하이람 벨커스. 우리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로렌츠의 이름을 지녔던 기사들과 형벌부대원들의 일갈에 하이람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냐…?”

자신이 무엇을 건드린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많고 많은 실험체 중 하나였을 텐데.

저 자와 같은 이도, 저 자 보다도 심한 이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이 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황좌를 손에 얻기 위해.

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바일사르 제국을 손에 넣기 위해 그 동안 하이람이 손을 뻗었던 온 대륙이, 이제는 그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전에 말한 대로, 모든 존재는 그 과거에 짓눌릴 수 밖에 없기에.

- 마력통신으로 긴급연락입니다! 케르단 전선에서 소요사태 발생! 72 보병사단이 수도로 진군중입니다!

- 케인 로렌츠를 자처하는 소속 불명의 콜로서스들이 곳곳에서 출현했습니다! 백작님!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사들의 추가적인 소식 또한 절망적이었다.

“교국에 잔스카르에 식민지…. 날 죽이기 위해 이 제국을 부숴버리기라도 할 셈이냐…?”

자신이 원한 제국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를 통제하고, 교국과 거래하며, 잔스카르를 노리는.

온 대륙을 호령하는 대제국을 만들어, 자신이 그 주인이 되려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온갖 국가의 군대가 뒤엉킨 채 제국의 국토를 유린하고 있었고, 이들을 막기 위해 국경에 배치해두었던 기사들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였다.

이제 자신이 이 상황을 극복하는, 그렇기 못하든, 제국은 끝장이었다.

알프라이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승전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이 절호의 타이밍에!

“아아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얀의 귓가에 들려왔다.

십 년을 그리고 또 그린 하이람의 비명소리.

그렇지만 그것을 듣는 얀의 얼굴에는 일말의 환희도, 한 줌 통쾌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얀. 식별 불가능 적 기체….”

“알아. 나도 확인했어.”

마치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는 글레이프니르처럼, 하이람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콜로서스를 보며 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쿵-!

델타 콜로서스의 3중 마력로와 흐레스벨그의 전자장비.

그리고 글레이프니르와 같은 재질을 한 중장갑을 두른 거대한 금빛의 콜로서스.

[혈액 인증 코드 확인. 사용자, 하이람 벨커스, 인식 완료.]

철컥! 철커덕-!

천천히 열리는 거대한 콜로서스의 조종석이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4&*[email protected]! 소속, 인형병기, ‘오딘.’ 탑승 대기중.]

금빛으로 빛나는 찬란한 콜로서스.

무너진 폐허와 사방을 둘러싼 적 사이에 꿇어앉은 그 모습은 왕의 탄생, 혹은 그 몰락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이 콜로서스에 타도록 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완전히 쉬어버린 목소리로 고개를 든 하이람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총기도, 귀족으로써의 기품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숴버린 네놈을, 지옥 끝까지 찾아가서 갈아마셔 버릴 테니까!”

산발한 야수와 같은 모양새를 한 하이람이 천천히 콜로서스에 몸을 싣고, 황금으로 빛나는 거대한 콜로서스, 오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분자 커터, 4번까지 작동 확인.]

[레일 캐논, 하전입자포, 전자기 펄스 장치. 온라인.]

광인과 같은 그의 얼굴에 하나 둘 떠오르는 인터페이스들이 거대한 콜로서스의 위력을 재확인시켰다.

“닐.”

[확인. 글레이프니르, 전 무장 임계. 이중동조 개시.]

키이이잉-!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온 몸의 장갑판을 열어젖힌 글레이프니르 역시 그에 맞서 몸을 일으켰다.

거의 세 배 가까이 되는 체격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두 거인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를 보고 있었다.

“내 마지막 명령이다.”

얀의 목소리에 등 뒤에 앉은 렌, 그리고 닐의 인터페이스에 작은 노이즈가 꼈다.

“내 몸, 존재. 전부 불태워서 네게 줄 테니…. 저 괴물을 죽여버려.”

자신의 모든 권한을 통해 내려진 명령.

그 말에 글레이프니르의 몸을 두르고 있던 장갑들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용권자 최종명령 승인.]

그 말과 함께 글레이프니르의 몸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최종 작전코드 입력. 기체 제어 프로그램 완전 삭제. 현 시간부로 본 기체명을 ‘글레이프니르’에서 ‘펜리르’로 변경.]

구우우우우웅-!

푸른 빛으로 빛나던 글레이프니르, 아니, 펜리르의 동력로가 붉게 물들며 연기가 거대한 몸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동력로 리미터 전면 해제. 전투 개시.]

그 말과 함께, 붉게 물든 거대한 짐승이 금빛 거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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